Round 234. 악마의 왼발
경기가 시작되자, 공을 가진 데니스 바이올렛에게로 레알 공격수들이 잽싸게 달려들었다.
황급히 마크를 피한 데니스는 측면의 빈 공간으로 달려간 작은 데니스에게로 패스를 보냈다.
“역시 측면은 비었군.”
툭툭 치며 달려가는 데니스 로의 앞으로 후안 산티스테반이 달려와 막아섰다.
그가 비운 중앙의 공간은 공격 2선에 있던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가 잽싸게 내려와서 메웠다.
이에 중앙으로 패스하는 걸 그만둔 데니스는 라인을 따라 공을 치며 달려 나갔다.
“애송이 녀석이!”
산티스테반은 곧장 추격에 나섰다.
금방 따라잡았지만,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데니스는 드래그 백으로 산티스테반의 마크를 뿌리쳤다.
그러고는 레알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들어가는 숀 코너리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바로 과감하게 슈팅을 날렸다.
“헉……!”
파 포스트 쪽을 노리고 휘어져 들어오는 슈팅.
깜짝 놀란 도밍게스 골키퍼가 몸을 날렸다.
궤적이 뚝 떨어지며 바운드된 슈팅은 골대 옆으로 흘러나갔다.
하지만 꽤 날카로운 슈팅이다 보니, 관중석에서는 안도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 금발 애송이, 공 좀 찰 줄 아는데?”
“좀 차는 수준은 아니야. 그냥 두면 위험하다고.”
한 차례 아찔함을 뒤로하고, 레알이 공격에 나섰다.
도밍게스가 길게 내찬 공은 전방의 엑토르 리알에게 정확히 떨어졌다.
로니 코프를 제친 리알은 측면으로 파고드는 헨토에게로 패스를 보내고 본인은 중앙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헨토에게 가던 패스는 레이 윌슨이 뻗은 발에 맞고 라인 밖으로 나갔다.
‘역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만만치 않군. 하지만 오늘 경기를 이기는 건 우리다.’
헨토의 드로잉으로 다시 경기가 이어졌다.
달려와서 드로잉을 건네받은 리알이 절묘한 힐 패스로 디 스테파노에게 공을 넘겼다.
바로 중거리 슛을 시도하려던 스테파노는 번개같이 앞을 가로막은 바비 찰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또 너냐.”
성가신 녀석.
작년만 해도 애송이였던 녀석이 1년 사이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올드 트래퍼드에서의 1차전에서도 디 스테파노는 바비 찰튼의 찰거머리 마크에 막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뭐, 내가 아니라도 골을 넣을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
바비 찰튼의 마크를 슬쩍 피하며 디 스테파노는 측면의 레몽 코파에게 공을 보냈다.
곧장 맨유 페널티 박스로 돌파해 가려 했던 레몽은 던컨 에드워즈의 강력한 마크에 막혀 물러나고 말았다.
‘쳇, 그렇다면…….’
레몽은 때마침 맨유 박스로 달려 들어가던 푸스카스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
바로 논스톱 슈팅을 시도하던 푸스카스.
그는 자신의 앞을 떡하니 막는 장신 수비수를 보고는 멈칫했다.
‘확실히 크긴 크구만.’
‘놓치지 않아.’
바싹 자세를 낮춘 준영은 푸스카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여기서 중앙에 있는 다른 공격수들에게로 패스를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푸스카스는 스스로 결정할 생각인 듯했다.
한 차례 페인트를 넣은 그는 라인 가까운 곳에 와서 드래그 백을 시도했다.
하지만 준영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그 정도론 어림도 없수다.’
‘역시 만만찮은 녀석이군!’
한 차례 더 페인트를 넣은 푸스카스는 왼발 슈팅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가 왼발을 즐겨 쓴다는 사실을 21세기에서부터 알고 있던 준영은 잽싸게 공을 가로채서 역습에 나섰다.
그의 발끝에서 떠난 공은 허공을 크게 가로지르며 알렉스 퍼거슨 쪽으로 향했다.
“으차! 이번엔 내 차례다!”
발끝으로 공을 앞으로 떨군 알렉스는 레알 마드리드 진영의 왼쪽 측면으로 깊이 치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크로스.
하지만 숀 코너리의 머리로 전달되기 전에 미구엘 가르시아가 헤딩으로 끊어 냈다.
관중석에서 또 한 번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영국 놈들, 역습 속도가 굉장하구만.”
“계속 이렇게 좌우가 푹푹 찔리면 뒤가 불안해서 공격을 제대로 못하는데…….”
뭔가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경기를 보는 기자와 관중들의 생각과 달리, 레알 마드리드의 카르니글리아 감독은 딱히 역습에 대처할 만한 변화를 주지 않았다.
‘놈들의 역습이 빠르다지만, 현재 우리 하프백이나 수비수들의 기량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오히려 상대가 좌우 측면 역습에 더 매진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나온다면 대응하기 더 쉽다.
‘우리가 필요한 건 점수, 그리고 승리다. 그리고 공격이야말로 최선의 수비지.’
그러니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 공격에 무게를 둬야 한다.
더구나 오늘 귀빈석에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와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드리드, 아니 스페인을 쥐락펴락하는 군부 독재자의 성에 차지 않은 경기를 했다간 뒷일이 좋지 않을 게 뻔하다.
“일단은 빨리 골을 만드는 게 우선이야.”
선제골만 터트릴 수 있다면 경기 흐름을 완전히 레알 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그리할 수 있는 기량이 충분하다.
이에 카르니글리아는 차분하게 선제골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
카르니글리아 감독의 바람과 달리 골은 쉽사리 터지지 않았다.
던컨 에드워즈, 이준영, 빌 포크스, 레이 윌슨으로 짜여진 4백과 바비 찰튼, 로니 코프 2명의 하프백이 아주 견고한 수비를 펼치고 있었다.
거기다 알렉스 퍼거슨과 데니스 로도 수비 시에는 내려와서 동료들을 거들었다.
이런 견고한 농성에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은 중간에 끊기거나, 슈팅은 골대와 먼 방향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스테파노! 돌파해 들어가라고!”
“푸스카스, 악마의 왼발은 어떻게 된 거냐?”
“슛하라고, 슛!”
경기가 쉽사리 풀리지 않자, 관중석 곳곳에서 야유와 항의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제일 답답한 건 보는 관중들이 아닌 뛰는 선수들이었다.
‘빌어먹을, 틈이 없구만.’
이미 1차전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이번 시즌 맨유의 수비는 작년보다 훨씬 견고했다.
거기다 공수의 간격 유지나 협력 플레이도 상당히 좋았다.
‘틈이 없다면, 틈을 만드는 수밖에!’
바비 찰튼의 마크를 뿌리친 디 스테파노는 곧장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성급하게 날린 슛은 제대로 발에 걸리지 않았고, 빌 포크스가 곧장 걷어 냈다.
외곽에서 이를 잡은 푸스카스가 슈팅을 시도했지만, 가까이 있던 로니 코프에게 마크를 당하면서 무위로 끝났다.
‘주장 말이 맞는군. 왼발을 고집한다더니만.’
고집인지 아니면 습관인지.
푸스카스는 오른발로 찰 기회가 있어도 한 번 더 공을 컨트롤한 후 왼발 슛을 시도하곤 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왼발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었다.
전반 28분에 푸스카스가 찬 왼발 슛이 골대를 지나친 적이 있었는데, 골키퍼 해리 그렉이 전혀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거기다 위력은 어찌나 강한지, 빗나간 슈팅을 맞고 취재 기자 2~3명이 나동그라질 정도였다.
‘그야말로 캐논슛이군. 절대 유효 슈팅을 내주면 안 되겠어.’
준영이 푸스카스를 계속 주목하는 사이, 레몽 코파의 패스를 받은 프란시스코 헨토가 문전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준영과의 몸싸움에 밀리며 공을 놓쳐 버렸고, 이어 빌 포크스가 박스 밖으로 공을 걷어 냈다.
“나이스 패스… 아앗!”
알렉스 퍼거슨이 흘러나온 공을 잡아챈 순간, 레알 마드리드의 하프백 안토니오 루이즈가 거칠게 달려들었다.
“젠장, 이거 파울이라고!”
이미 공이 빠진 상태에서 날아든 태클.
명백한 파울이었기에 알렉스가 버럭 언성을 높였지만, 주심은 무시로 일관했다.
‘쳇, 홈 어드밴티지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
지금은 따지기보다 일단 상대 공격을 차단하는 게 급했다.
“푸스카스가 공을 잡았다!”
“때려, 푸스카스!”
관중들의 외침에 호응하듯, 푸스카스의 왼발에서 슈팅이 터졌다.
엄청난 고속의 슈팅이었지만, 방향은 정면.
잡기 버거웠던 해리 그렉은 양손 펀칭으로 공을 쳐 냈다.
“젠장, 아깝게…….”
“괜찮아. 다시 기회가 있어!”
푸스카스가 다시 리바운드 볼을 잡았다.
좋아하는 왼발 쪽으로 공이 떨어지자 그는 곧장 다이렉트 발리슛을 날렸다.
퍼억-!
“컥!”
묵직한 타격음과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리바운드 볼을 잡아 내러 전진해 나오던 준영이 푸스카스의 슈팅을 맞은 것.
그가 안면을 잡고 털썩 주저앉자, 던컨은 황급히 라인 밖으로 공을 내보냈다.
경기는 바로 중단되었고, 쓰러진 준영에게로 동료들이 다가왔다.
“주장, 괜찮아요?”
“이게 몇 개인지 알아보겠어?”
시끄러운 물음과 어지러운 시야에 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간신히 일어났지만 몸이 흐느적거렸고, 턱은 욱신욱신 아팠다.
‘빌어먹을… 정신을 못 차리겠군.’
방금 전 푸스카스의 슈팅이 턱에 꽂혔다.
순간 고개가 휙 돌아가면서,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마치 어퍼컷을 정통으로 맞고 다운당한 기분이었다.
“경기, 뛸 수 있나?”
주심이 짤막한 영어로 물음을 건넸다.
바로 ‘Yes.’라고 말하려 했지만, 어째 쉽게 말문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결국 준영은 동료들의 부축을 받아 라인 밖으로 나와 팀 닥터에게 검사를 받았다.
“좀 어떤가?”
버스비 감독이 걱정스러웠던지 팀 닥터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며 검사하던 팀 닥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벼운 뇌진탕입니다.”
“심각하진 않다는 건가?”
“네, 하지만 경기를 뛰는 덴 좀 불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버스비 감독은 일단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한 후 준영을 다시 경기에 투입하기로 했다.
그사이 맨유는 일시적으로 10명으로 줄어들었지만, 실점을 주지 않고 잘 버텼다.
그리고 어지럼증이 어느 정도 가신 준영이 다시 필드로 돌아왔다.
“어때, 존? 괜찮아?”
“응, 그게…….”
괜찮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얼떨떨하고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이 휘청거렸다. 거기다 메스꺼운 기분도 들었다.
‘뛰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아니, 괜찮아지지 않으면 안 돼!’
상대는 준영의 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푸스카스와 순간적으로 위치를 바꾼 레몽 코파가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쇄도하는 헨토를 향해 낮고 빠른 크로스를 넣었다.
‘막아야 해!’
준영은 황급히 달려가 발을 내찼다.
그런데 시원하게 헛발질을 하고 말았고, 공은 헨토의 무릎에 맞고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들어갔다아-!”
“Goal! Goal! Gooooo-al!”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제골!
라디오 잡음 같은 소리만 울리던 경기장에 우레 같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레알 선수들이 신나게 골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사이, 주저앉아 있던 준영은 방금 전 상황을 곱씹고 있었다.
‘분명히 걷어 낼 수 있는 공이었는데…….’
자신의 판단과 다르게, 몸이 제때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좀 전의 그 뇌진탕 후유증 때문이었다.
‘악마의 왼발에 당한 건가.’
준영은 푸스카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골 셀레브레이션에 끼지 않고 가만히 준영을 바라보던 푸스카스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고의는 아니고, 경기 중에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어.’
교체 규정도 없고, 이대로 경기에서 빠질 수도 없다.
홀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서 준영은 이를 악물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
K리그에서 조기 축구 막걸리(…) 해설로 유명한 이상윤 해설위원은 현역 시절 최용수 감독과 더불어 차범근호를 캐리하던 공격수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서는 부진했는데, 멕시코전 직전, 간단한 훈련으로 몸을 풀던 중에 동료 선수의 강슛을 맞고 기절한 탓이었죠.
치명적이진 않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뇌에 쇼크를 받은 것이다 보니 몸이 정상일 리 만무합니다.
아무리 좋은 플레이를 하려고 해도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축구에서도 경기 중 뇌진탕으로 보이는 부상을 입은 선수들을 투지라는 명목하에 계속 경기를 뛰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올해 7월 안산의 연제민 선수가 헤딩 경합 과정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그대로 뛰었고, 작년 11월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아스날의 수비수 다비드 루이스가 상대 공격수와 충돌한 후 뇌진탕 증세를 보였지만 그대로 경기를 뛴 적도 있었죠.
선수 보호를 위한 규정들이 계속 보완되고 있지만, 아직 미흡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