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33화 (233/400)

Round 233. 호적수

2028년, 방송 장비를 실은 취재 차량들이 모즐리 마을로 진입했다.

BBC 로고가 찍힌 차량에는 취재원과 촬영 스태프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 ‘Football, The Great Player’라는 제목의 12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었다.

총 12부작 중, 6부 ‘Legend 1957’의 주인공은 존 Y. 리.

1950년대 말,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지켜 내고, 잉글랜드에 첫 번째 월드컵 우승을 안겨 준 인물이다.

그에 대한 취재를 위해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존 Y. 리의 제2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모즐리를 찾았다.

“이곳 모즐리는 그레이트 맨체스터 지역의 축구 요람과도 같은 곳이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클럽 하우스가 있고, 그 산하의 유소년 축구 클럽들이…….”

MC가 모즐리에 대해 설명을 하는 사이, 카메라와 드론들이 모즐리의 전경을 담았다.

영국 전통의 멋과 21세기의 세련된 스타일이 조화롭게 어울린 마을 거리에는 유니언잭과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70여 년 전만 해도 모즐리는 맨체스터 교외에 있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1957년 7월 말, 이곳에 낯선 이방인이 찾아오게 됩니다.”

버스비의 이단아, 오리엔트 특급, 골리앗, 리틀 존 등등.

온갖 별명을 가진 이 한국계 홍콩 축구 선수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당시 영국 축구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정체되어 있던 영국 축구는 이 이단아가 일으킨 충격으로 변화해 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의문인 것은 영국에 오기 전에 존 Y. 리가 어디서도 축구를 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시대 최고의 테크닉을 가진 선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처음 축구를 배웠는지, 전혀 알려진 바 없었다.

허더스필드나 맨유에서 그와 한솥밥을 먹은 선수들은 존 Y. 리가 프랑스에서도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실제 존 Y. 리는 프랑스어에 유창했지만, 프랑스 어느 팀에도 그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그래서 존 Y. 리가 MI6와 가까웠던 점, 당시 중국과 홍콩이 대혼란의 시기였던 점을 두고 관련 기록이 삭제된 것이라 보는 이들이 많았다.

“더구나 당시는 인종 차별이 만연한 시기였죠. 백인보다 뛰어난 선수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선각자들도 있었지요.”

그렇게 말하던 MC는 차를 타고 고즈넉한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의 주인은 아담한 체구의 노파.

그녀의 이름은 카리나 프레드로 가드너로, 최초의 영국인 우주 비행사이자 천문학자, SF 작가로 유명했다.

존 Y. 리의 처제로, 친남매처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MC는 자신을 반갑게 맞은 카리나, 아니 카린에게 질문을 건넸다.

“존 Y. 리를 허더스필드 타운에 추천한 게 박사님의 조부라고 들었습니다만?”

“맞아요.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먼저 오빠의 실력을 알아보았죠.”

카린은 본인이 기억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오빠는 종종 이런 얘기를 하곤 했어요. 자신이 성공한 건 어디까지나 좋은 사람들을 만난 덕분이라고. 그렇지 않았으면 역사의 물결 속에 묻혀 버렸을 거라고 했죠.”

“빌 섕클리나 맷 버스비 같은 분들 말이지요?”

“그래요. 섕클리 감독님의 경우엔 오빠를 놓친 걸 정말 두고두고 아쉬워했었죠.”

허더스필드 타운에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다시 재회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호적수로 만나 대결한 적이 더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 못 만난 건 아니었어요. 섕클리 감독님은 심심찮게 찾아오셨으니까.”

“이 저택에 말입니까?”

“아뇨. 올드 트래퍼드도 서슴없이 찾아가곤 했죠. 그때 일을 오빠가 이야기해 준 적이 있는데… 당시에 어린 나도 듣고 무척 황당했답니다.”

웃음을 지은 카린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MC에게 그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

1959년 5월 3일.

어제 FA컵 우승의 기쁨을 만끽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유러피언 컵 4강 2차전 마드리드 원정을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일요일임에도 시청각실에 모인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 영상들을 보며 그들의 전술이나 플레이를 분석했다.

“케케묵은 MW 포메이션을 쓰는군. 하지만 저 낡아 빠진 포메이션이 현재 놈들에게 가장 잘 맞는 전술인 건 틀림없어.”

“역시 디 스테파노를 묶어야 해. 기술만 좋은 게 아니라 활동 영역도 넓어. 미드필드 전 지역을 커버하고 있다고. 2~3명이 할 일을 혼자서 하다니…….”

“푸스카스는 2선을 중심으로 움직이는군. 이놈도 틈을 줘선 안 돼. 방심하면 돌파에 중거리 슛을 터트리는 놈이니까.”

준영과 선수들은 영상을 보며 분석하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사람은 맷 버스비도, 지미 머피 코치도 아니었다.

바로 리버풀의 감독 빌 섕클리였다!

“저 아저씨,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난 여기가 혹시 안필드인가 했어.”

“혹시 일일 초빙이라도 받아서 온 걸까?”

그러나 섕클리는 초빙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리버풀도 정규 시즌을 마쳤고, 그 전에 다음 시즌 승격을 확정 지었다.

오늘은 그저 맷 버스비나 옛 제자인 데니스 로와 준영을 만나러 와 본 것뿐.

그러다 맨유의 영상 분석에도 한 다리 걸치게 된 것이다.

“내가 볼 땐 측면 공격이 답일 듯싶군. 좌우 윙어와 풀백들의 활약이 관건으로 보여.”

“음, 빌 자네도 그렇게 보나?”

“보면 알 수 있잖아. 저 상황에서도 레알 마드리드는 미드필드 측면 공간이 비었군.”

맷 버스비 감독은 거리낌 없이 섕클리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러니 마치 빌 섕클리가 맨유의 정식 코칭스태프 같아 보였다.

“측면을 장악하고 디 스테파노를 묶어 놓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안 그래도 유나이티드에는 적당한 인재들이 많으니까.”

“고맙네, 빌. 자네 덕에 좀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

화기애애하게 영상 분석이 끝난 후, 준영은 빌 섕클리와 따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저희 팀 도와주시러 온 겁니까?”

“아니, 염탐하러 온 건데.”

염탐이라니!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니, 준영은 어이가 없었다.

“다음 시즌에 네놈들과 우승 경쟁을 해야 하잖냐. 네놈들이 어떤 식으로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고 숙지하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점에서 섕클리는 오늘 확실히 소득을 올렸다.

다만 영상 촬영이나 경기 영상 수집 등은 바로 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틀림없이 적잖은 비용이 들 게 틀림없다. 이 점은 리버풀 구단주 윌리엄스와 상의를 해 봐야 할 듯싶었다.

“단순히 염탐하러 온 것치고는 많은 도움을 주셨네요.”

“후후,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유러피언 컵에 나가는 팀의 작전 구상에 참여해 보겠어.”

결론적으로 영상 분석에 끼어든 것은 본인이 하고 싶어서, 재밌을 것 같아서였다.

그 뻔뻔함이 영 싫지 않았던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럼 나중에 결승전도 부탁드립니다.”

“오냐. 결승전에 올라가기나 해라. 이드송 그놈이 바라는 대로 미끄러지지는 말고.”

“펠레가 저희 팀이 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고요?”

“그래. 그놈, 올드 트래퍼드에서 있었던 4강 1차전도 봤다고 하더라. 2차전은 너희가 0 대 3으로 완패할 거라던데.”

그런 고마운 저주를 해 주다니!

어린 축구 황제의 아량에 준영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너희의 트리플 도전을 보고 있으면 솔직히 나도 부럽고 배가 아파. 하지만 성공하길 빌고 있으마.”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사는 무슨. 명심해. 난 너희 팀을 타도하려는 사람이야. 너희가 유명해지는 만큼 쳐부쉈을 때 보람도 커져서 그런 거라고.”

방심하지 말라는 듯 충고하는 빌 섕클리.

이 야심 찬 붉은 제국의 어버이에게 준영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여기까지 오고, 또 더 멀리 나갈 수 있게 밀어주는 고마운 분이었으므로.

***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약 12만 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입추의 여지도 없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거대한 열기와 함성에 준영은 혀를 내둘렀다.

“과연 제왕의 본거지로군.”

“원정팀의 지옥이지.”

던컨의 말에 준영은 그 지옥을 지키는 저승사자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디 스테파노와 레몽 코파 등, 대부분의 선수들이 작년 결승전이나 1차전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 대면하는 사람도 있었다.

‘악마의 왼발 페렌츠 푸스카스!’

매직 마자르의 주장, 현재 레알 마드리드의 주포.

키는 170대 초반으로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부진 체격과 인상, 그리고 매직 마자르의 캡틴이라는 위상 때문인지 준영의 눈에는 자신보다 더 큰 거구로 보였다.

‘정신 차려라, 이준영. 시작하기 전부터 쫄아서 어쩌자는 거냐.’

스스로를 다그친 준영.

상대에 대한 긴장감과는 별개로 기대와 흥미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시대에 왔을 때부터 꿈꿨던 상대와의 맞대결이 드디어 이뤄졌으므로.

“양 팀 주장은 앞으로 나오도록!”

오늘 경기의 심판을 맡은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모리코니 주심이 준영과 디 스테파노를 불러냈다.

둘은 심판 앞에서 동전을 던져 양 팀의 진영과 선축을 정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이번 시즌 사실상의 결승전이 마침내……!”

골대 양쪽 뒤편에 자리 잡은 기자들은 오늘 출전한 선수들을 다시 한번 체크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GK:해리 그렉

DF:던컨 에드워즈, 이준영(주장), 빌 포크스, 레이 윌슨

MF:로니 코프, 바비 찰튼

FW:알렉스 퍼거슨, 데니스 바이올렛, 숀 코너리, 데니스 로

<레알 마드리드>

GK:로겔리오 도밍게스

DF:미구엘 가르시아, 라파엘 레스메스, 호세 산타마리아

MF:안토니오 루이즈, 후안 산티스테반

FW: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주장), 엑토르 리알, 레몽 코파, 프란시스코 헨토, 페렌츠 푸스카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4-2-4, 레알 마드리드는 상당히 공격적인 MW 포메이션으로 나왔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공격진의 중량감에 있어서 레알 마드리드를 따라갈 팀이 없단 말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1차전은 패배했어. 레알의 창끝에 쉽사리 뚫릴 정도로 맨체스터의 성벽은 얇지 않아.”

기자들은 카메라 렌즈를 중앙선 쪽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 유니폼의 맨유 공격수들이 심판의 휘슬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는 쉬이 시작되지 않았다.

경기 진행을 맡은 UEFA 담당자가 주심에게 기다리라는 사인을 보냈기 때문.

“뭐야, 왜 늦장을 부리지?”

“누굴 기다리는… 아아!”

기자들이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 귀빈석 쪽에서 누군가 바쁘게 들어와 착석했다.

레알 마드리드 구단주 베르나베우 옆에 자리한 군복 차림의 콧수염 사내.

그는 바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였다.

“흥, 마드리드 축구의 가장 큰손이 오셨군.”

“파시스트 인간 백정 새끼!”

“올 시즌은 심히 불쾌했겠구만. 카탈루냐 빨갱이들이 우승을 했으니 말이야.”

기자들은 경기장에 배치된 경찰들 몰래 프랑코에 대해 욕설과 조롱을 늘어놓았다.

그사이 경기 시작을 알리는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울렸다.

삐익-!

유러피언 컵 4강 2차전.

사실상의 결승전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는 수도권 팀인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대치하는 카탈루냐 공화파의 바르셀로나에 대해서는 엄청난 탄압을 가해서, 내전 기간 중에 당시 바르샤 구단주 호셉 수뇰이 프랑코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FC 바르셀로나는 주축 선수들 절반 이상이 해외로 망명하고 회원 수가 크게 줄어드는 등 피해와 수난이 엄청났습니다.

이 악연 때문에 엘 클라시코가 굉장히 치열해지게 되었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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