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32화 (232/400)

Round 232. Great Player

“달려라, 유나이티드!”

“밀리지 마, 레즈(* 노팅엄 포레스트의 별명)!”

5월의 태양이 10만의 관중이 꽉 찬 웸블리 스타디움을 따스하게 비췄다.

목이 터져라 응원전을 펼치는 관중들의 시선은 필드에서 치열하게 부딪치는 선수들에게 향해 있었다.

붉은 상의에 커다란 엠블럼을 박은 노팅엄 포레스트, 그리고 깔끔하고 날렵한 흰색 어웨이 유니폼을 걸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가장 오래되고 영광스러운 우승컵을 차지하기 위해 양 팀 모두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바비 찰튼, 연이어 2명을 제치며 슛-! 하지만 골키퍼가 쳐 내고, 외곽에서 공을 잡은 데니스 로가 다시 슛! …아슬아슬하게 빗나갑니다. 아깝습니다.」

귀빈석에 자리한 높으신 분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중계를 들으며 눈은 필드에 있는 선수들을 쫓아다녔다.

“양 팀 모두 맞불을 놓고 공격을 하는데, 점수가 안 나오는 게 아쉽군요.”

“아무래도 1점 차 승부로 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중앙에는 이준영과 빌 포크스, 좌우 풀백에 레이 윌슨과 던컨 에드워즈가 자리 잡은 맨유의 수비 라인은 단단했다.

하지만 3백이다가 수비 상황에서 5백으로 변환하는 노팅엄 역시 만만찮은 수비력을 보여 주었다.

장신 공격수 숀 코너리의 고공 폭격과 큰 데니스와 작은 데니스, 그리고 2선에서 귀신같이 침투하는 바비 찰튼 역시 잘 막아 냈다.

“후후후, 트리플은 못할 거다, 유나이티드!”

“트로피 하나는 우리한테 양보하라고!”

노팅엄의 뻔뻔한(?) 요구에 준영이나 맨유 선수들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달란다고 해서 주고 싶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슈팅이나 먹어라, 시골 촌놈들아!”

오버래핑을 시도한 던컨이 과감하게 중거리 슛을 날렸다.

무회전으로 날아간 슈팅이 그물을 크게 흔들었지만, 아쉽게도 옆 그물.

‘와!’ 하고 탄성을 지르던 맨유 팬들은 아쉬움을 삭였다.

“쳇, 약간 빗나갔군.”

“영점 조절 좀 잘해 봐라, 던.”

맨유에겐 아쉽게도 전반전은 0 대 0으로 마쳤다.

라커룸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했던 선수들은 잠시 후 다시 필드로 나와 진영을 바꾸었다.

이때 맨유도 전술에 약간 변동이 있었다.

“어라, 캡틴 리가 전진 배치되는 모양인데.”

“그러게. 하프백인 로니 코프를 수비로 내렸어.”

“수비가 헐거워지는 걸 감수하고 골을 만들겠다 이거군.”

다소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맨유 팬 대부분은 기대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어렵고 답답한 경기에서 준영이 좋은 활약을 보여 줬으므로.

“질 수는 없지. 우리 집 여왕님이 와서 보고 계시거든.”

준영에게 최고의 서포터인 리즈뿐만 아니라, 귀빈석에는 진짜 여왕님이나 처칠 전 총리도 와서 지켜보고 있다.

절대 실망스러운 결과로 마무리할 수 없었던 준영은 바비 찰튼과 함께 부지런히 노팅엄 수비진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막아! 막으라고!”

“쿨리 쪽으로 공이 가지 못하게 해!”

준영이 본격적으로 공격에 가세하며 노팅엄의 수비 전열이 흔들렸다.

하지만 악착같이 마크를 펼치는 그들은 육탄 방어나 골키퍼 찰리 톰슨의 선방으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어 나갔다.

‘진짜 끈질긴 놈들이군. 하지만 끝까지 버티진 못할 거다.’

예상대로 후반 20분대를 넘자 노팅엄의 발이 느려졌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역습 시도라도 자주 했었는데, 이후에는 중앙선을 넘는 일이 드물 정도.

전반부터 오버 페이스를 했던 데다, 후반전엔 맨유 쪽에서 계속 공을 가지고 공격을 주도하니 흐름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이럴 때 마무리를 해야 한다.

맨유 선수들이라고 죄다 강철 체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 마무리를 못하고 흐름이 일순간 넘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후반전도 이제 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연장전으로 돌입할 것인지, 아니면 결판이 날 것인지?」

모든 관중들이 목이 타는 기분을 느끼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때, 바비 찰튼이 측면으로 달려가는 데니스 로에게 패스를 주었다.

하지만 그 패스는 약간 길었고, 노팅엄의 제프 화이트풋이 먼저 잡아챘다.

‘큭, 되찾아 오지 않으면!’

‘귀찮은 애송이 녀석!’

과거 맨유에서 연습생을 지낸 제프는 껌딱지처럼 달려드는 데니스 로의 몸에 공을 맞혀 라인 아웃을 유도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찼던 공이 코너 플래그를 맞고 도로 튕겨 나왔다!

냉큼 그 공을 잡은 데니스 로는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낮고 빠르게 크로스를 올렸다.

때맞춰 중앙으로 쇄도하던 준영이 헤딩슛을 시도했다.

노팅엄 수비수들의 결사적인 마크에도 불구하고, 준영의 머리에 살짝 스치며 방향을 돌린 공은 골대 하단 구석으로 떨어졌다.

“아, 안 돼!”

찰리 톰슨 골키퍼가 기를 쓰며 손을 뻗었다.

손끝에 공이 닿았지만, 묵직한 공을 골대 바깥으로 밀어내기엔 힘이 부족했다.

“들어갔다아-!”

“캡틴 리의 헤딩골!”

고개를 쭉 빼며 바라보던 맨유 팬들에게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누가 봐도 이건 결승 골.

A보드 광고판 위로 뛰어올라 포효하는 준영에게 카메라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결국 또 캡틴 리가 결정짓는군.”

“작년에 이어 올해도 웸블리에서 결승 골이라니…….”

Great Player.

모든 기자들의 뇌리에 기사 타이틀로 쓸 만한 단어가 떡하니 떠올랐다.

***

“이겼다!”

“FA컵 2연패다!”

잠시 후, 심판의 마지막 휘슬과 함께 경기가 끝났다.

아쉬움에 고개를 떨군 노팅엄 포레스트 선수들과 달리, 맨유 선수들은 발에 스프링을 단 것처럼 껑충껑충 뛰며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가장 기뻐하는 건 던컨이었다.

작년엔 부상 때문에 관중석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올해 FA컵은 자신의 활약으로 우승을 견인했으므로.

“자자, 모두 정렬하자. 트로피 받으러 가야지.”

“Yes, Sir!”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선수들은 준영을 필두로 하여 시상식장으로 올라갔다.

“Wonderful Team!”

“Congratulations!”

계단을 오르는 그들을 향해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다.

준영은 손을 뻗은 사람들에게 악수해 주며 시상식장에 있는 여왕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트리플까지 우승컵이 하나 남았군. 어떤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의지가 있다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폐하.”

“호호호, 그대의 의지가 꺾이지 않기를 기원하지.”

축원을 건넨 여왕은 준영에게 메달과 우승 트로피를 건넸다.

정중히 건네받은 준영은 트로피에 입을 맞춘 후 보란 듯이 높이 치켜들었다.

“Glory Manchester! Glory Man United!”

“We Are The Champions!”

쏟아지는 갈채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준영과 선수들은 이번 시즌 두 번째 우승을 마음껏 만끽했다.

이제 남은 것은 유러피언 컵.

사기충천한 그들의 앞에는 벼랑까지 몰린 저승사자 군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

1958-59 시즌 유러피언 컵 4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레알 마드리드의 맞대결을 두고 유럽 언론은 ‘때 이른 결승전’이라 여겼다.

홈&어웨이로 진행되는 4강 첫 경기는 지난 4월 23일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렸다.

이 경기는 전반 13분 레알 마드리드의 엑토르 리알이 선제골을 터트리며 앞서갔지만, 2분 뒤 던컨의 어시스트를 받은 데니스 바이올렛이 동점 골을 성공시켰다.

이 추격에 흔들린 레알 마드리드는 전반 33분,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렀다.

맨유의 코너킥 상황에서 수비수 마르코스 알론소가 쇄도하던 준영을 잡아채 쓰러트린 것.

어찌나 심하게 잡아챘던지 유니폼이 다 찢어졌을 정도.

당연히 페널티킥 판정이 내려졌고, 키커로 나온 던컨이 이를 깔끔하게 차 넣었다.

스코어는 2 대 1로 역전.

후반전에도 더 이상의 추가 골 없이 경기가 종료되었다.

1차전 홈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맨유는 유리한 입장에서 다음 경기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2차전 원정은 비겨도 결승 진출이겠네요.”

리즈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이 제일 위험한 거야.”

벼랑 끝까지 몰린 상대는 독이 바싹 오른 상태다.

어설프게 빗장 걸어 잠갔다간 무승부는커녕 대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다.

더구나 레알 마드리드는 내로라하는 공격수들을 무수히 보유한 팀이었다.

“그렇게 잘하는 팀이 왜 지난달에 진 거죠? 그 디 스테파노라는 사람도 별 활약 못했잖아요?”

“그만큼 원정이란 게 힘들다는 거야. 낯선 환경과 부담감은 사람을 무디게 만드니까 말이지.”

그것도 그렇지만, 그 경기는 뭔가 탐색전 같아 보였다.

역전을 당하자, 레알 선수들은 성급하게 동점 골을 만들어 내려 하기보다 추가 골을 내주지 않겠다는 뉘앙스로 경기를 운영해 나갔다.

“마드리드 홈경기에서는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거겠지. 그것도 다득점으로 말이야.”

준영이 찜찜하게 여기는 것은 또 하나 있었다.

올 시즌 정식으로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한 페렌츠 푸스카스가 1차전에서 출전하지 않았던 것.

‘징계나 부상 같은 것도 없었어. 분명히 1차전에 출전할 것 같았는데…….’

하지만 선발 명단에서 제외된 상태로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레알 감독은 언론에다 컨디션 난조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핑계 같아 보였다.

“내 생각엔 자기네 홈경기에서 히든카드를 써먹을 속셈인 것 같아. 겪어 보지 못하면 대응하기도 힘드니까.”

“시험에서 배우지 못한 수학 공식의 문제가 나오는 거랑 비슷하다는 거군요.”

“그런 셈이지. 뭐, 말이 나온 김에 이 문제를 다시 풀어야겠군.”

지금 준영은 저택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었다.

이제 시즌도 끝났고 유러피언 컵 말고는 경기도 없다 보니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당장 다음 달에 대입 시험이 있다 보니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리즈가 도와주는 덕분에 성과는 나고 있었다.

“근데 준은 어떤 학과를 선택할 거예요?”

“글쎄, 일단 선수 활동에 크게 지장이 없는 학과면 좋겠어.”

레알 마드리드만큼이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수학 문제들과 씨름을 하던 준영.

그의 눈에 앤지가 도서관에서 책 한 무더기를 빼내서 들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거 한꺼번에 가져가서 보려고?”

“보는 거 아니야. 갖다 버릴 거야. 아님 찢어서 태워 버리든가 하려고.”

“그 시리즈 좋아했으면서 왜?”

“이젠 싫어.”

앤지가 버리겠다며 빼낸 책은 이안 플레밍이 쓴 007 시리즈였다.

첩보물을 좋아하는 앤지는 지금까지 출간된 소설들을 꼬박꼬박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 4월에 출간된 ‘골드핑거’를 보고 급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도 황당한 데다, 한국인에 대한 표현이 매우 악랄한 수준이었기 때문.

작품에 나오는 한국인은 검은 이빨에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거한으로 묘사되는데, 말도 서투르고 고양이 고기를 좋아하는 걸로 나왔다.

거기다 주인공인 본드는 한국인에 대해 유인원보다 못한 인종이라는 둥, 잔인무도하다는 둥, 백인 여자에 환장했다는 둥 떠들곤 했다.

“내가 형부였으면 당장 작가를 고소했을 거야.”

“고소라……. 난 머가리를 쪼개 버릴 생각이었는데.”

사실 준영도 골드아이 소설을 보고 불쾌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이런 불쾌한 내용들을 쳐 내고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이 참으로 양반이구나 싶었을 정도.

어쨌거나 아쉽게도 지금은 이안 플레밍의 머리를 쪼개러 갈 시간은 없었다.

트리플을 달성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렇기에 편견에 빠져 마음대로 써 갈긴 글쟁이에게 인생이 실전임을 알려 주는 건 다소 미뤄 두기로 했다.

***

본문에 언급된 제프 화이트풋은 1950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데뷔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16세 105일로 맨유 역사상 가장 어린 선수였습니다.

1955-56 시즌에 우승을 견인하긴 했지만, 이후 에디 콜먼에게 밀려 입지를 잃고 그림비스 타운을 거쳐 노팅엄 포레스트로 이적해서 1958-59 시즌 FA컵 우승에 공헌했죠.

참고로 1933년생인데, 아직 정정하게 살아 계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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