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31화 (231/400)

Round 231. 명예를 위하여

“저녁에 축하연이 끝나고 드릴 말이 있습니다.”

“난 바빠. 좀 이따 바로 런던으로 내려갈 거야.”

너랑 말 섞고 싶지 않다.

바로 거절하며 돌아서던 루스는 이어지는 준영의 말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영국 축구의 위신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냉큼 돌아선 루스의 물음에 준영은 주변에 몰려온 기자들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가 있는 데서 말했다간 확실히 체면이 구겨질 일입니다.”

“그렇게 심각한 일이라고?”

“장담하건대, 이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면 미래의 사람들은 두고두고 조롱과 비판을 하게 될 겁니다.”

“흠…….”

루스는 생각에 잠겼다.

이 키 큰 원숭이 녀석이 자신을 놀리거나 골탕 먹이려고 그러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그렇게 보기엔 눈빛이 너무 진지하단 말이지.’

거기다 만약 자신이나 축구협회를 곤란하게 만들 목적이면 따로 대화를 요청하는 대신 기자들에게 다 떠벌려 버렸을 것이다.

“좋아. 대신 별거 아닌 일이라면 각오해야 할 거다.”

“네, 수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중히 감사를 표하는 준영의 태도에 루스는 문득 불안감을 느꼈다.

대체 얼마나 큰일이기에 이 시건방진 놈이 앙숙이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고개를 숙인단 말인가.

‘대단한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구만.’

안 그래도 다음 시즌 일정이나 진행할 계획들로 머리가 아픈 상황이다.

그렇기에 루스는 부디 지나치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기를 빌었다.

***

올드 트래퍼드와 가까운 호텔.

홀을 통째로 빌린 맨유 구단은 거창하게 축하연을 열었다.

구단 임원과 은퇴한 선수들, 후원과 투자를 하는 큰손들까지 어울려 샴페인을 터트리며 리그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자, 다음 목표는 FA컵이다!”

“그 전에 유러피언 컵 준결승 1차전부터 잘해야지.”

“일단 오늘은 신나게 놀죠!”

오늘 연회에 초대된 쿼리멘의 연주에 맞춰 선수들은 애인 혹은 부인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추었다.

“Wow! One more song!”

“Let’s dance together!”

젊은이들은 스윙과 로큰롤에 맞춰 스텝을 밟고, 어르신들은 박수를 치며 그것을 구경하고.

한바탕 어울리는 가운데 홀 안은 흥겨운 열기로 가득 찼다.

준영과 리즈도 그 열기에 동참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거야말로 ‘Saturday Night Fever’로군.”

“네, 정말 즐거운 밤이에요.”

한바탕 댄스 타임이 끝난 후, 끼리끼리 모여 대화와 만찬을 즐겼다.

리즈는 던컨의 부인 몰리와 알렉스의 여친 캐시, 데니스 로의 애인 다이애나 등과 한자리에 둘러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이지, 이렇게 신나게 춤춰 보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

리즈의 말에 캐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보기엔 주장과 리즈는 신나게 춤을 춘 것치고는 얌전하던걸.”

“에이, 우린 보통이었어. 캐시나 알이 유난스러웠던 거 아냐? 빙글빙글 돌다가 스텝이 엉켜서 넘어지기도 하던데.”

“하긴 우리 알이 너무 까불긴 했지. 뭐, 그런 점이 귀엽다고나 할까.”

리즈와 캐시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데다 나이도 비슷하고, 남친 직업도 같았으니까.

다른 점이 있다면 리즈는 연상, 캐시는 연하의 연인과 사귄다는 점이다.

‘어찌 생각해 보면 준도 나보다 한참 연하인가?’

리즈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준영은 21세기에서 태어났으니, 자신은 그의 할머니뻘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고서.

물론 준영이 그런 걸 두고서 농담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이 시대 패션이 썩 맘에 들지 않던지, 조셉에게 부탁해서 만든 의상을 권한 적은 있었다.

“그런데 캡틴 리는 댄스 타임이 끝나고 보이지 않네요.”

몰리의 물음에 리즈가 대답하려 할 때, 다이애나가 먼저 알려 주었다.

“좀 전에 협회 총무라는 노인분과 함께 밖으로 나갔어요.”

“협회 쪽 사람이랑요? 대체 무슨 일로?”

다들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준영이 축구협회와 껄끄러운 사이라는 건 언론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

‘그 얘기를 하려는 모양이구나.’

리즈는 미리 준영에게 언질을 받았기에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루스 총무가 준영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 주기를 바랐다.

***

“기다리느라 지루하지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준영을 따라 호텔 라운지로 자리를 옮긴 루스는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 얼른 본론이나 이야기해. 빨리 듣고 숙소로 가서 눈을 붙이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말하려는 건 암페타민 문제입니다.”

심드렁하던 루스가 암페타민이 들먹여지자, 눈을 부릅떴다.

“그 각성제로 무슨 문제라도 벌어졌나? 안 그래도 국제 사이클 연맹 쪽에서는 그걸 두고 꽤 시끄러운 모양이던데…….”

“시끄러운 게 당연하지요. 남용하면 굉장히 위험한 약품이니까요.”

그냥 과다 섭취해도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나지만, 알코올과 함께 사용했다간 심장에 바로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번에 저희 팀에서 암페타민 사용자가 3명 발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선 2경기에선 출전에 제외되기도 했죠.”

“쯧쯧, 트리플을 노리느라 기둥뿌리가 썩어 가는 줄 몰랐구만.”

현재 풋볼 리그는 약물 금지 규정이 없다.

하지만 언론에 알려지면 분명히 논란이 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놈이 나에게 자기네 치부를 말한 이유가 뭐지?’

잠시 의아해하던 루스는 이내 낯빛을 굳혔다.

과연 이게 유나이티드만의 치부로 끝날 일인가 생각이 들었으므로.

언론에 알려지면 그 불길이 풋볼 리그의 다른 팀들로 옮겨 붙는 건 아닌지?

“저도 이번 일을 겪고 알게 된 것이지만, 암페타민은 진짜 흔하게 구할 수 있더군요. 굳이 의사의 처방을 받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알고 있다. 전쟁 때 풀린 분량이 너무도 많으니까.”

그렇다 보니 예술가나 일부 젊은이들은 암페타민을 마치 과자처럼 섭취하곤 했다.

그러니 운동선수라고 해서 예외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총무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이런 약물은 선수의 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약물 금지 규정을 만들어 달라 이거군.”

준영이 영국 축구의 위신이 걸린 일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현재 서독 축구대표팀만 해도 푸스카스의 폭로 때문에 의심의 눈총을 받는 형편이 아닌가.

진짜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스위스 월드컵에서 우승한 게 맞느냐고 말이다.

‘우리 축구 종가가 그런 지저분한 논란에 휘말려 도덕적인 비판을 받게 되는 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

대영제국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루스도 아편 전쟁과 같은 지저분한 과거사에 대해선 수치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만드는 더러운 약물 따위가 자신이 몸담은 축구계에 판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혹시 암페타민 말고 금지해야 할 부류가 있나?”

“메스암페타민과 모르핀, 마리화나, 테스토스테론, 에리스로포이에틴, 에스트로겐… 솔직히 술 같은 알코올도 경기 전에 복용하는 건 안 좋습니다.”

“으음… 꽤 많구만.”

눈살을 찌푸리는 루스에게 준영은 미리 정리해 둔 서류 파일을 건네주었다.

거기엔 금지해야 할 약물들과 어디에 악용되는지, 어떤 부작용이 나타나는지 상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루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걸 어떻게 알아낸 거냐?”

“그야 의학 전문가의 의견을 구했지요.”

스마트폰에 들어 있던 21세기 자료들이 중심이지만, 맨유의 팀 닥터나 맨체스터 지역 의사들에게 검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도 서류에 실려 있었다.

“한 가지 좀 궁금하군.”

“뭐가 말입니까?”

“네놈이 이렇게 신경 쓰는 이유 말이다. 유나이티드면 몰라도, 풋볼 리그 전체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텐데?”

루스의 물음에 준영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야 앞으로 영국 축구가 걱정되니까요. 제가 축구를 하고, 업적을 쌓아 올린 터전이 썩어 문드러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

“결국 네놈의 명예를 위해서라 이거군.”

“그렇죠. 하지만 이건 모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준영의 대답에 루스는 잠시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차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군. 바로 런던으로 가 봐야겠어.”

“제가 역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택시를 타면 돼.”

손을 내저은 루스는 곧장 호텔을 나가 택시에 올라탔다.

그를 배웅한 준영은 한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퉁명스럽게 굴긴 했지만, 이번 일은 루스가 잘 처리해 줄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걱정거리는 남아 있었다.

도핑 검사 기술이 부족한 지금 어떤 식으로 규정을 세우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그건 정말 앞으로 계속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

맨유가 우승을 확정 짓고 일주일 후.

축구협회가 다음 1959-60 시즌에 적용할 새로운 규정이 언론에 보도되어 축구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금지 약물 지정 및 위반에 대한 징계 규정이라…….”

“뭐야. 앞으로 각성제는 쓰면 안 되는 거야?”

“의료용으로 피치 못할 경우에는 처방받을 순 있지만, 공식 경기 출전은 안 된대.”

위반 시 징계 규정이 무시무시했다.

금지 약물을 소지 및 투여한 상태로 경기에 출전한 것이 발각될 경우, 해당 선수는 10경기 출전 금지 및 해당 기간 동안 받는 주급을 벌금으로 내야 했다.

그런데도 재범을 저지르면 1년간 출전 정지, 그리고 세 번째로 적발되면 영구 제명으로 처분되었다.

“선수뿐만 아니라 팀 역시 관리 미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모양이야.”

“어떻게?”

“일단 규정 위반 선수가 나오면 해당 팀은 승점 10점 삭감에 벌금이래.”

만약 이를 은폐하려는 시도를 하면, 승점 삭감과 벌금은 배로 늘어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구단이 도핑을 주도한 사실이 적발되는 경우, 등수와 상관없이 강등에 3시즌 동안 승격 금지였다.

“와, 이거 굉장히 엄격한데. 각성제 사용이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건가?”

“사이클 쪽에서는 남용하다 죽는 선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그럼 선수 보호 차원에서 금지하는 건가?”

“그래. 협회에서 금지시킨 약물의 부작용을 보라고.”

뇌졸중에 심장마비, 호흡 곤란, 정신 착란 등등.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주목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탈모에 성 기능 장애라…….”

“아, 확실히 이런 건 하면 안 되겠다.”

“나도 집에 있는 각성제 다 버려야지.”

신문을 본 대다수 사람들은 도핑의 위험을 제대로 인지했다.

물론 한편에선 찔끔하면서도 경악하는 이도 있었다.

‘이럴 수가! 그럼 선생님이 준 게 금지 약물이었나?’

숙소에서 신문을 본 가와부치 사부로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요즘 자꾸 빠지는 머리와 영 서지 않는 분신이 신경 쓰였다.

‘복용을 그만둘까? 안 그래도 징계도 심한데……. 아냐. 그랬다가 또 주전 경쟁에서 밀리면 어쩌려고?’

한동안 갈팡질팡하던 그는 결심을 굳혔다.

‘몰래 먹으면 돼. 어차피 저런다고 해서 알아내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

이제 겨우 올라선 무대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았던 가와부치.

그는 악마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

영국 축구에서 최초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복용이 들통난 선수는 5부 리그 내셔널 리그에서 뛰던 윌리엄 리 털리라는 골키퍼입니다.

그는 코카인까지 손을 대고 있었고, 결국 FA로부터 반년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EPL에서 최초로 적발된 선수는 포르투갈 출신의 아벨 사비에르라는 선수인데, 2002년 월드컵 대표로도 뽑혀서 우리나라와의 경기에도 교체 출전한 바 있습니다.

이 선수는 미들즈브러에 있을 때 UEFA컵에 나가서 약물 검사를 받았다가 적발되어 18개월 동안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았죠.

본인은 치료 목적에서 투여받은 항생제에 스테로이드 성분이 있었던 거라며 끈질기게 항소했고, 징계는 12개월로 경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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