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30. 더 늦기 전에
라커룸에서 한바탕 광풍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맷 버스비 감독과 지미 머피 코치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주로 트레블과 관련한 질문이었는데, 버스비 감독은 기대감을 감춘 상태로 신중한 답변을 했다.
“우리가 목표에 근접했다고 하지만, 아직 한 개의 트로피도 들어 올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다음 번리전에 집중해서…….”
버스비 감독의 대답은 도중에 끊어졌다.
취재원들을 제치고 준영이 나타났기 때문.
기자들은 그에게도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무슨 일인가, 존?”
“급하게 상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지막한 준영의 말투에는 심각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에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는 그와 함께 구단 사무실로 향했다.
“로베르트 씨,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기자들을 절대 사무실 앞으로 접근시키지 마세요.”
뭐 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로베르트는 부하 경호원들과 함께 준영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그렇게 주변이 정리되자, 준영은 두 사람 앞에 암페타민이 든 약병을 꺼내 놓았다.
“이, 이건……!”
“해리가 치료 차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해리 말고 2명이 더 있고요.”
“오, 맙소사!”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세간에는 의료용으로 처방되는 각성제이고, 풋볼 리그에도 약물 복용을 금지하는 규정은 없다.
하지만 암페타민의 폐해에 대해서는 언론에서 계속 지적되었고, 스포츠 업계에서도 이를 과다 복용했다가 죽은 선수들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제정신을 가진 지도자라면 성적을 내자고 선수의 생명을 깎아 먹는 짓을 용납할 리 만무했다.
당연히 이는 규정에 없어도 매우 부도덕한 행위로 여겨지고 있었다.
“지난 시즌 맨시티 선수들이 약물 복용을 한 게 아닌가 의심했었는데, 오히려 우리 팀에 있다니……. 레스를 볼 면목이 없구만.”
“존, 다른 2명은 누구야?”
머피의 물음에 준영은 곧장 대답했다.
“스캔론이랑 레논입니다.”
“이런 망할 놈의 자식들!”
스캔론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뮌헨 비행기 사고 때 그는 다리와 두개골 골절, 거기다 신장까지 다쳐 회복이 쉽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
하지만 기적적으로 회복되었고, 현역 복귀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자신이 없는 사이 입지가 줄어들다 보니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시즌 초만 해도 뭔가 보여 줘야 한다고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런 심리적인 압박에 손대지 말아야 할 것에 손을 대고 말았을 것이다.
“레논은… 밴드 하는 놈들에게 배웠겠구만.”
“소위 예술 한다는 사람들이 각성제 쪽으로 손대다 선을 넘곤 하니까요.”
존 레논, 아니 비틀즈 멤버들이 약물 복용을 했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그들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히피 문화 등 당대 서브컬처에 물들어 있던 가수들도 약물에 손을 댔다.
늦은 밤까지 공연을 진행하기 위한 각성제로 섭취했지만, 신곡을 구상하기 위해, 아니면 현실 도피나 단순한 취미(?)로 환각에 빠지기도 했다.
“배우들 중에도 그런 놈들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숀 그 친구도?”
“숀 형님이라면 그딴 거 손댈 시간에 담배나 태우고 위스키나 마실 겁니다.”
숀 코너리가 약물에 손댔다는 얘기는 전혀 없다.
그런 거에 손댔으면 90살까지 장수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웃긴 건 그 형님이 장차 맡을 역은 약쟁이란 말이지.’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는 임무를 수행할 때 암페타민의 일종인 벤제드린이 든 샴페인을 마신다는 설정이 있다.
영화상으론 나오지 않았지만, 1955년 발간된 ‘문레이커’에 그런 묘사가 있었다.
“아무튼 약물 쪽과 관련해서 확실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미리 경각심을 높여 두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일이 일어날 겁니다.”
“맞는 말이야. 팀 닥터에게 관련 자료를 부탁해야겠군.”
“저도 아는 게 몇 개 있으니 돕겠습니다.”
준영이 암페타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21세기에 따로 교육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금지 약물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투여했다가 어떤 식으로 징계를 받는지 등등.
그와 관련한 자료 파일은 따로 전송받아 스마트폰에 저장해 두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금지 약물이 첨가된 치료약이나 상품을 쓸 수도 있으므로.
‘문제는 아직 관련 규정이 없다는 건데……. 잘못하면 도리어 권장하게 되는 꼴이 될 수도 있겠군.’
거기다 아직 이 시대는 도핑 검사 기술도 부족한 상황.
어쨌거나 더 늦기 전에 발견했으니 신중하게 처리하리라 마음먹었다.
***
잉글랜드 중부 도시 노팅엄.
남쪽 트랜드 강가에 자리 잡은 시티 그라운드에서 노팅엄 포레스트와 블랙번 로버스의 시합이 진행되고 있었다.
앞서 금요일 이우드 파크에서 벌어진 경기에서는 홈팀인 블랙번이 3 대 0의 완승을 거뒀다.
이에 노팅엄은 오늘 경기는 반드시 설욕하고자 했다.
그들의 의지는 전반 13분에 결실을 맺었다.
미드필더 조니 퀴글리가 과감한 중거리 슛으로 선제골을 터트린 것.
하지만 블랙번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실점에 당황하지 않고 공세를 퍼부었다.
“아아, 저렇게 자꾸 측면이 무너지면 안 되는데!”
“젠장, 잘못하면 또 저 Jap에게 골을 처먹겠군!”
위태로운 수비를 보며 노팅엄 팬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 오늘 블랙번의 공격을 주도하는 일본인 공격수 가와부치 사부로는 동료 브라이언의 패스를 받아 노팅엄의 문전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까불지 마라, 노란 원숭이!”
수비수가 거칠게 차징을 걸며 그를 밀어붙였지만, 가와부치는 전혀 밀려나지 않았다.
끝까지 어깨싸움에서 이긴 그는 골키퍼를 제치고 득점에 성공했다.
“나이스 슈또!”
“최고다, 가와부치!”
일본인 응원단 속에서 응원을 하고 있던 나가누마 겐과 히라키 류조는 만세를 불렀다.
정말이지 장하고 부러웠다.
자신들과 달리 후배 가와부치는 당당히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으니까.
“저 녀석, 전반기에 조센징한테 부상당했을 때만 해도 세상 다 끝난 것처럼 굴더니만…….”
“그 시련이 녀석을 더 강하게 성장시킨 거겠죠.”
쇄골 부상에서 회복 후, 가와부치는 블랙번의 팀 훈련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동안의 약점이던 몸싸움도 전혀 밀리지 않았고, 체력도 다른 선수들보다 강해진 것.
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조니 캐리 감독도 가와부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래서 2월부터 출전을 시켜 봤더니, 상당한 활약을 보여 주는 게 아닌가.
지난 경기에는 데뷔 골을 터트렸고, 오늘도 팀에 귀중한 동점 골을 안겨 주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이야,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고?”
경기가 1 대 1로 마무리된 후, 나가누마 겐과 히라키 류조는 가와부치를 만났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가와부치는 굉장히 다부져 있었다.
노팅엄의 수비수들이 그의 돌파에 쩔쩔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단련을 한 거야? 우리한테도 비결 좀 알려 줘.”
“그냥 뭐… 운이 좋았죠.”
가와부치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의사 선생님.
쇄골 치료를 위해 병원에서 만난 그 선생님이 철저히 비밀로 하라고 했으니까.
‘하긴 알려지면 다른 놈들도 그 명약의 도움을 받을 거잖아.’
친절한 선생님이 준 명약은 양키 만화의 초인이 투여받은 특수 용액 같았다.
많이 훈련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루에 알약 몇 개씩 섭취한 것만으로 근육이 쉽게 만들어지고, 체력이 늘었다.
‘물론 단점이 없진 않지만…….’
예전에는 글래머 미녀들을 보면 혈기가 불끈 솟구치곤 했는데, 요즘은 담담했다.
사실 이것도 나쁘진 않았다. 여색을 멀리하고 축구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
‘뭐, 실험실의 생쥐가 된 것 같아 불쾌하긴 하지만 말이야.’
선생님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체크하고, 별다른 증상은 없는지 성가시게 묻곤 했다.
그래도 선생님이 속인 건 아니고 임상 실험에 참가하는 거라고 알려 주긴 했다. 대외적으로 비밀로 하라고 했을 뿐.
세상에 공짜는 없고, 이만큼 성과도 이루었으니 선생님을 감히 원망할 수는 없었다.
“운이라…….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줘라, 응?”
나가누마 겐의 말에 가와부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비결 같은 것도 없고, 알아도 가르쳐 줄 생각 없어요.”
“야, 너 매정하게 이러기냐? 다 같이 외국에서 땀 흘리며 고생하고 있는데…….”
나가누마가 서운한 기색을 보이며 계속 졸라 대자, 짜증이 솟구쳤던 가와부치는 버럭 화를 냈다.
“내가 땀 흘리고, 내가 고생해서 얻은 성과예요! 나가누마 씨는 도와준 게 뭐가 있다고 나한테 손을 내미는 겁니까?”
“뭐라고? 야, 내가 뭐 그리 대단한 걸 요구했어?”
“싫다고 하잖아요! 왜 자꾸 귀찮게 굽니까!”
두 사람의 말다툼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당장이라도 멱살잡이, 아니 주먹다짐이 일어날 분위기였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바라보자, 히라키 류조는 황급히 나가누마를 만류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젠장, 가와부치 망할 자식!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어!”
“주전 경쟁을 하느라 신경이 날카로워 그런 거겠죠. 본인도 분명 오늘 일을 미안해할 겁니다.”
이렇게 가와부치를 변호해 주던 히라키도 방금 전 그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필드에 나가면 투지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긴 하지만, 가와부치의 평소 성격은 착실하고 예의 발랐다.
그런데 축구계의 선배인 나가누마에게 언성을 높일 정도로 무례하게 굴다니?
‘뭔가 공격적인 성격이 된 것 같군.’
이 거친 풋볼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격이 변한 걸까?
서운함과 의문이 남은 채 두 일본 선수는 다시 런던으로 발길을 옮겼다.
***
1959년 4월의 첫 번째 토요일.
올드 트래퍼드의 관중석은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대다수 관중들은 싱글벙글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오늘 경기 원정을 온 볼턴 원더러스 응원단과 축구협회 총무 스탠리 루스였다.
‘쳇, 어찌 중간에 발목을 잡아 줄 만한 팀이 없는 건지!’
오늘 경기에 승리하면 남은 경기와 상관없이 맨유는 리그 우승 확정.
그럼에도 루스는 볼턴이 맨유의 잔칫상에 초를 쳐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골! 골입니다! 바비 찰튼, 캡틴 리의 롱 패스를 받아 볼턴의 골대를 흔들어 놓습니다!」
‘이런 젠장!’
루스의 기대와 정반대로, 맨유는 전반 8분 만에 선제골을 터트리며 앞서 나갔다.
볼턴은 나다니엘 로프트하우스가 최전방에서 분전을 했지만, 이준영에게 번번이 막혔다.
결국 경기는 맨유가 2골을 더 추가하며 3 대 0의 완승으로 끝났다.
“이겼다. 우승이다!”
“Glory Manchester United!”
심판의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관중들이 필드로 우르르 난입해 들어갔다.
통제를 위해 배치된 경찰과 용역들이 손쓸 틈도 없었다.
선수들에게 다가간 관중들은 목말을 태워 주거나 헹가래를 해 주며 함께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완전 난장판이군.”
“그만큼 기쁜 일이니까요.”
하드먼 회장의 대꾸에 별말을 하지 않은 루스 총무는 묵묵히 필드로 내려가 우승컵을 전달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맨유의 주장인 이준영과 악수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총무님.”
“그래. 근데 하나도 안 반가우니 이를 어쩌나?”
퉁명스러운 루스의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준영은 오늘 그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다음 시즌에는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 있었으므로.
***
올해 국내 복귀를 한 강수일 선수는 과거 국대에 발탁되었을 때 발모제에 스테로이드가 든 걸 모르고 썼다가 대표팀에서 하차당했죠.
물론 본인 커리어가 박살 난 건 이보다 본인의 음주 운전 때문이었지만요.
스테로이드의 경우, 민첩성이나 지구력이 중요한 축구와는 거리가 먼 약물로 여겨지지만, 피지컬을 강화하려는 수단으로 종종 남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축구는 아니지만, 이번 도쿄 올림픽 배구 종목에서 우리나라와 맞붙은 브라질의 탄다라 선수가 스테로이드계 약물인 오스타린을 썼다가 발각이 나서 퇴출되기도 했었지요.
이렇게 문제가 되는 스테로이드는 1940년대 공산권의 역도 선수들이 몰래 사용하다 1950년대 말에 서방으로 전파되었습니다.
60년대부터 헬스와 보디빌딩이 유행했는데, 불행하게도 이때 스테로이드가 퍼져서 현대에 와서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