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28. 공공의 적
“유나이티드 놈들은 이번 라운드도 대승이로군.”
축구협회의 집무실에서 신문 기사를 보고 있던 스탠리 루스 총무.
그는 준영의 골 셀레브레이션 사진을 보고는 낯을 찌푸렸다.
“망할 놈 같으니라고.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요즘 축구계의 화제는 ‘트리플 우승’이었다.
리그 우승, FA컵 우승, 그리고 대망의 유러피언 컵 우승!
이 꿈같은 목표에 상당히 근접한 팀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미 리그 우승은 확실시되는 분위기였다.
맨유의 남은 일정 중에 볼턴과 번리, 버밍엄 시티 같은 상위권 팀들이 있었지만, 최근 기세로 봐서 이들이 붉은 악마들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은 낮았다.
다들 맨유가 잔여 경기를 모두 끝내기 전에 우승을 확정 지을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유나이티드의 우승이야 그렇다 치고, 이 원숭이 자식은 왜 다치질 않는 거야. 풋볼 리그의 수백 명 선수들 중에 이놈을 처치할 용사가 없단 말인가!”
작년엔 그래도 이마가 터지거나 팔이 빠지기라도 했는데, 이번 시즌은 그런 부상들도 없었다.
사실 루스 총무가 원하는 대로, 존 Y. 리를 부숴 버리겠다며 달려드는 선수들이 없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많은 편이었지만 성공한 놈들은 아무도 없었다.
일단 준영이 작년에 비해 공격 가담을 자제하고 있기도 했고, 개인기가 뛰어나서 파울도 잘 피했다.
몸싸움에서는 애초에 비벼 볼 수 있을 만한 체격을 가진 선수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머저리 같은 화이트 디펜스 놈들, 처치를 하려거든 계획을 짜서 제대로 할 것이지!”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인종 차별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졌다.
하얀 고깔 쓰고 밤중에 습격하고 다니는 상스러운 양키들이나, 간악무도한 나치들과 다를 게 없다면서.
버킹엄 궁전의 고귀하신 분께서도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며 진노하실 정도였다.
“아무리 쥘리메컵을 가져왔다고 해도 너무 편애하시는 게 아닌가 싶단 말이야.”
루스가 투덜거리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보고서 하나를 루스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
“이번 시즌 협회 행정에 대한 풋볼 리그 팀들의 반응을 정리한 겁니다.”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아 보고서는 미완성.
하지만 시즌이 끝나기 전에 총무가 보고 검토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대다수 팀들이 시즌 일정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지금보다 세심하게 경기 일자를 배분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쳇, 지난 시즌에 한두 개 정도 요구를 들어줬더니 이젠 대놓고 불만을 쏟아 내는군.”
이래서 양보를 해선 안 되는 거였다.
일정에 대해서는 주로 유러피언 컵에 출전하는 유나이티드 놈들만 항의하곤 했는데, 이젠 대다수 팀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총무님, 일정 문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1~2년 안으로 TV 중계까지 할 예정인데, 제대로 해 두지 못하면 더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씁, 어쩔 수 없지. 늙은 나는 모르겠으니 똑똑한 친구들이 논의해서 결정하라고 해.”
TV 중계 이야기가 나오니 루스 총무도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중계에 걸린 수익이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돈도 돈이지만, TV 중계는 지금보다 더 많은 팬 층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즉, ‘크리켓 > 럭비 > 축구’의 인기 구도를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 확실히 개선해야 하는 건 분명해.’
한가하게 키 큰 원숭이 따위에게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장차 잉글랜드 축구계의 번영을 위해서라도 큰 그림을 그려 놓아야 한다.
하지만 루스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미래를 위해 준비 중인 그림에 이미 이준영의 스케치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캡틴 리, 잘 지내셨나요?”
“어서 오세요, 미세스 대처.”
준영이 3월 말의 빡센 일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런던에서 변호사 마거릿 대처가 찾아왔다.
일전에 준영은 앞으로 시작할 축구 TV 중계로 인한 광고 노출과 관련해 법적인 문제가 없는지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대처는 오늘 그에 대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일단 절차상으론 크게 문제 될 부분은 없습니다. 중계방송 시대에도 지금처럼 경기장에 A보드 광고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뭔가 걸리는 점이라도 있습니까?”
“방송사 쪽에서 일정 페이를 요구하고 있어요. TV를 통해 광고를 노출시키는 게 가능한 건 자신들의 방송 기술과 장비 덕분이라고 하면서요.”
“그런 이유라면 페이를 챙겨 주지 못할 건 없죠.”
다만 수고료를 얼마로 하느냐를 앞으로 협상해야 할 것이다.
준영은 그 협상을 대처에게 맡기기로 했다.
“수고료는 적당한 선에서 양보해도 좋습니다. 다만 하프타임 사이에 들어가는 영상 광고 독점권을 받아 내야 해요.”
“과연, 쉬는 시간 사이에 재생되는 영상 광고가 더 대중의 눈에 들기 좋겠죠.”
“네, 영구 독점권은 어차피 불가능할 테니 최대 10년, 최소 5년 정도로…….”
준영은 광고 계약 문제와 관련해서 대처와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정도 결론이 나자, 준영은 대화의 주제를 슬쩍 바꾸었다.
“남작 어른께 듣자니, 올해 10월 총선에 나가실 계획이라면서요?”
“네, 런던 핀칠리 지역구에 입후보하려고 해요.”
대처는 1955년 재보궐 선거에 보수당의 예비 후보로 나섰지만,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드시 당선이 되고 싶었다.
“이번에 노동당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요. 수에즈 전쟁 여파로 보수당의 인기가 많이 떨어졌으니까요.”
“그래도 딱히 큰 실정은 없었잖습니까. 경제도 잘 돌아갔고요.”
“물론 그렇지만, 빈부 격차를 줄이지 못한 점에 대해서 공격을 받고 있죠.”
준영은 알버트에게서 영국 정치판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의 자유당 독재만큼 버라이어티하진 않지만, 보수당과 노동당 간의 대치 구도는 꽤 볼만했다.
물론 가장 관심 있는 사항은 해저 유전 개발을 위한 대륙붕 관련 법안과 눈앞에 있는 철의 여인이었다.
“아무래도 저는 정치 경력에서 부족한 면이 많아요. 그래서 이번에 온 김에 남작님께 조언을 받아 보려고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 혹시 선거 자금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두 팔 걷어붙이고 돕겠습니다.”
“어머, 캡린 리가 나서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단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다.
마거릿 대처는 장차 영국의 총리가 될 사람.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르는 인물이니, 앞으로도 꾸준히 친분을 유지하고 싶었다.
***
맨유와 루턴 타운의 FA컵 4강 경기는 런던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렸다.
중립 지역 경기라고 하지만, 런던에서 루턴 타운은 자동차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당연히 경기장에는 루턴 타운 팬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런던 지역 축구팬들도 맨유의 편은 아니었다.
“Lose, Manchester!”
“United will be defeated!”
다들 맨유를 향해 야유와 저주를 퍼부었다.
예상보다 강한 적대감에 맨유 선수들은 당혹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우릴 못 잡아먹어 저리 난리들이지?”
“마치 공공의 적이 된 기분이야.”
“샘이 나서 저러는 거지, 뭐.”
트리플 크라운, 트레블(Treble)은 지금까지 영국 축구계에 전대미문.
자신들의 팀이 아닌 다른 팀이 최초로 그 업적을 달성하는 꼴을 잠자코 지켜볼 이들은 없다.
괜히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겠는가.
영국 축구팬들이라고 다를 거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저주는 효과가 있는 모양이군.”
루턴 타운의 거친 플레이에 밀려 맨유 공격수들은 좀처럼 기회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첫 번째 유효 슈팅도 상대 진영으로 오버래핑해 들어간 던컨이 만들어 냈을 정도.
그렇게 전반전은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후반전에도 이러면 재경기를 대비해야겠구만.”
“재경기는 절대로 안 됩니다!”
머피 코치의 말에 숀 코너리는 펄쩍 뛰었다.
급정색을 하는 그의 반응에서 다들 저 형님이 또 연극 일정이 겹치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난감한 건 숀뿐만이 아니었다.
“저도 안 돼요. 지금 일정도 빡빡한데 경기가 또 늘어나면 라이브가 펑크 나고 말거든요.”
레논도 곤란한 기색을 보이자, 골키퍼 해리 그렉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럼 골을 만들어. 45분 안에 결판을 지으라고.”
“으…….”
그게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루턴은 거칠게 플레이할 뿐만 아니라 필드 플레이어들이 문전 앞에 두 줄로 늘어서서 우주 방어 태세로 나오고 있었다.
웬만한 돌파나 침투 패스, 슈팅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준영도 그 점을 알기에 침착하게 경기를 할 수 있게 동료들을 다독였다.
“두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우린 여기까지 왔어. 이제 한 계단만 더 올라가면 웸블리야.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자.”
웸블리에서 만날 상대는 아스톤 빌라 아니면 노팅엄 포레스트.
전자는 포츠머스와 함께 유력한 강등 후보였고, 노팅엄 역시 올 시즌 성적이 썩 좋은 편은 못 된다.
물론 단판전이란 게 리그 성적만으로 판단할 순 없지만, 그래도 아스날이나 울버햄프턴 같은 상위권 팀을 상대하는 것보단 낫다.
‘그래, 힘을 내자.’
‘우승컵을 코앞에 두고 미끄러질 순 없지.’
‘침착하게 하나만 해내는 거야.’
선수들이 심기일전하는 사이, 머피 코치가 준영에게 따로 지시를 내렸다.
“수비는 로니에게 맡기고 앞으로 올라가. 네 높이와 발재간은 큰 힘이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따로 지시할 건 없습니까?”
그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머피 코치.
그는 준영의 어깨를 두들기며 부탁했다.
“절대 다치지 마라. 앞으로 중요한 경기들이 있는데, 작년처럼 결장하면 큰일이니까.”
“걱정 마세요. 안 그래도 우리 여왕님이 신신당부하셨으니까.”
결과가 어떻든 항상 몸조심할 것.
이렇게 당부한 리즈는 협박(?)을 곁들였다.
부상당하면 같은 이불을 덮고 잘 생각은 말라면서.
“자, 후반전엔 잘해 보자!”
“Glory Manchester!”
새로운 파이팅 구호를 내뱉으며 맨유 선수들은 다시 필드로 나갔다.
삐익-!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호각이 울리자, 맨유 공격수들이 루턴 진영으로 달려갔다.
머피 코치의 지시에 따라 전방으로 올라갔던 준영은 바비 찰튼이 밀어 준 패스를 받았다.
곧장 슈팅을 시도했지만, 루턴 선수의 육탄 방어에 막혀 튕겨 나고 말았다.
‘역시 쉽지 않나…….’
“조심해요, 주장!”
레논의 외침과 동시에 준영의 등 뒤에서 태클이 날아들었다.
발바닥의 스터드가 몽땅 다 보일 정도로 의도성이 있어 보이는 살인 태클.
거의 공중제비를 돌듯이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준영은 살인 태클을 날린 녀석을 무섭게 째려보았다.
방금 전 그 살인 태클은 정말 위험했다.
아찔함과 함께 치솟아 오른 분노가 한순간 그의 의식을 집어삼켰다.
***
K리그 2018 시즌에 공공의 적이 FC 서울이었죠.
그때 FC 서울 팬들을 제외하고 모든 팀의 서포터들이 대동단결해서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부산을 응원하고 FC 서울이 강등되기를 바랐었지요. ^^;;;
그러나 조영욱과 박주영의 활약으로 부산을 물리치면서 FC 서울은 기사회생, 1부에 잔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