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27화 (227/400)

Round 227. 저마다의 행보

어두운 극장 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비롯한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스크린에 비친 영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영상에 나오는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지난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자신들에게 쓰디쓴 패배를 안겨 줬던 숙적이다.

레알의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올 시즌 퍼스트 디비전 1위를 달리고 있는 맨유의 플레이를 분석하고 파악하는 데 애썼다.

“지난 월드컵 브라질이 사용했던 4-2-4 포메이션을 쓰는군.”

“양쪽 풀백들의 활동량이 상당해요. 공격 가담도 좋고.”

“던컨 에드워즈는 완전히 부활했나. 아니, 재작년보다 더 실력이 올라간 것 같군.”

“휴우, 저 키다리 동양인은 여전하군. 어지간한 돌파나 패스로는 어림도 없겠어.”

이런저런 평가를 하는 사이, 경기 영상은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전에서 유러피언 컵 8강 2차전으로 바뀌었다.

이미 홈에서 0 대 3의 완패를 당한 비너 SC는 어떻게든 승리를 따내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데니스 바이올렛이 선제골을 넣은 지 1분도 되지 않아 기습적인 중거리 슛으로 동점 골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거기서 끝.

전반 15분부터 바비 찰튼의 원맨쇼가 벌어졌다.

장신 공격수 숀 코너리가 헤딩으로 떨어트려 준 공을 호쾌한 발리슛으로 골대를 흔들어 다시 리드하는 골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후반 64분에는 동료 공격수들의 견제로 빼앗아 낸 공으로 팀의 세 번째 골에 성공.

3분 후에는 전진해 온 존 Y. 리에게 패스를 해 주며 네 번째 골의 어시스트를 했다.

이후 2분 뒤에 인터셉트로 단독 찬스를 만들어 내 해트트릭.

후반 75분에는 세트 플레이 혼전 상황에서 침착하게 본인의 네 번째 골을 밀어 넣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경기 종료 직전에는 숀 코너리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최종 스코어 7 대 1.

맨유는 4골 2어시스트를 기록한 바비 찰튼의 대활약을 앞세워 준결승에 올랐다.

“발롱도르 수상 플레이어는 확실히 다르군요. 작년에도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괴물이 되었어요.”

프란시스코 헨토의 말에 디 스테파노는 동의하며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수비에 대한 부담이 없이 마음껏 공격에 전념할 수 있게 된 게 큰 것 같아.”

“그 수비 부담을 없애 주는 게 존 Y. 리와 던컨 에드워즈입니까?”

“거기에 2월에 영입된 레이 윌슨이라는 녀석까지……. 엄청난 체력과 활동력으로 상대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있어.”

거기까지 말한 디 스테파노는 옆자리에 있는 동료에게 힐끔 눈길을 돌렸다.

“어때, 페렌츠? 저 거인이 지키고 있는 수비벽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아?”

페렌츠 푸스카스.

악마의 왼발을 가진 매직 마자르의 대표 공격수는 대답 대신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않다는 거야?’

디 스테파노가 고개를 갸웃할 때, 극장 안이 밝아졌다.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 루이스 카르니글리아가 단상 위로 올라와 말했다.

“다들 봤겠지만, 영국의 붉은 악마 녀석들은 작년보다 훨씬 강해졌다. 나는 너희가 그 악마들보다 낫다고 보지만, 현재 우리 팀 상황이 썩 여유롭진 않아.”

레알 마드리드는 지난 시즌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팀 자격으로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 현재 리그 1위는 FC 바르셀로나.

만약 이번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하지 못하거나, FC 바르셀로나에게 리그 챔피언 자리를 내준다면 다음 시즌 유러피언 컵은 출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린 벼랑 앞에 서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진다면 벼랑 끝까지 내몰리겠지. 바르샤 놈들은 그런 우릴 벼랑 아래로 걷어찰 테고.”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큰 위기 상황.

이를 실감하고 있는 선수들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절대 패배해서도, 바르샤 놈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서도 안 된다. 제군들, 우리가 누군가?”

카르니글리아 감독의 물음에 선수들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레알 마드리드입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저승사자 군단이죠!”

유럽, 아니 세계 최강.

레알과 맞서는 상대가 얻는 건 실점과 패배, 절망과 두려움뿐이다.

“그래, 우리는 레알 마드리드다! 우리의 새하얀 저지만 봐도 상대의 낯빛이 하얗게 질리게 만들어 주자!”

“Si, Entiendo!”

감독의 말에 호응하듯 선수 전원이 우렁차게 외쳐 댔다.

다음 달에 있을 4강전을 앞두고 저승사자 군단은 낫 끝을 날카롭게 갈기 시작했다.

***

해 질 무렵, 고된 훈련을 마친 특무대 선수들은 개인 정비를 시작했다.

최정민도 동료들과 함께 땀에 젖은 유니폼을 빨고, 흙먼지가 묻은 축구화를 닦으며 스터드를 손봤다.

“그 구식 축구화 언제까지 신을 거야?”

옆에서 축구화 손질을 하던 함흥철이 최정민의 축구화를 보고는 말을 건넸다.

“이준영이 보내 준 축구화 있잖아. 그게 훨씬 좋은데 왜 아직 그걸 써?”

1월에 한국을 다녀간 이준영은 함께 시합을 했던 특무대와 고려대, 연세대 선수들에게 축구화와 축구공, 정강이 보호대, 훈련복 등의 장비들을 보냈다.

나2키라고 이준영이 운영하는 영국 회사에서 만든 것인데, 신기술과 신소재를 적용해서 훨씬 가볍고 튼튼했다.

거기다 축구화 스터드의 경우 아주 단단하게 붙어 있어서 따로 망치질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최정민은 그걸 쓰지 않고 예전부터 쓰던 투박한 축구화를 계속 사용했다.

물론 거기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아까워서 함부로 못 쓰겠어. 중요 경기에서만 쓰려고.”

“그렇다고 신줏단지 모셔 두듯 보관할 필요는 없잖아. 자주 사용해야 길이 드는 법이라고.”

그리 말한 함흥철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축구왕 아우님한테 부탁하면 또 보내 줄 텐데 무슨 걱정이야.”

“됐어. 내 사정이 아쉬운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국내 축구 선수들 중에 최정민은 살림이 넉넉한 편이었다.

그의 형이 냉면집 장사를 크게 하면서 뒷바라지를 해 주고 있었기 때문.

그래서 형편이 어려운 후배들을 돕기도 했다.

“아 참, 그 얘기 들었어? 내년에 제1모직에서 실업팀을 만든다던데.”

“거기 말고 다른 업체들도 팀을 만든다는 얘기가 있더군. 후배들도 대학 졸업하면 숨통 좀 트이겠어.”

듣자니 자유당의 높으신 분들이 각 기업체 사장들을 불러다 축구팀 창설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특무대나 헌병감실, 공병단 등 군부대 팀이나 대학에 있는 선수들이 무척 설레고 있었다.

보다 안정적으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근데 그게 썩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빵과 서커스 아니겠나. 국민들의 시선을 정치에서 돌리겠다는 수작인 거지.”

시커먼 속내가 있음을 알고도, 이를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다.

실업자가 수두룩한 가난한 나라에서 그나마 안정적으로 축구를 할 만한 기회였으니까.

“나라가 이 지경이라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으니……. 장교들조차도 빡빡한 형편이잖아.”

“서울은 그나마 낫지. 최전방은 진짜 심하다고 들었어.”

그래서일까.

얼마 전 중화민국 대사에서 물러나 귀국한 김홍일 장군은 뜻있는 사람들과 힘을 모아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전방 지역 장병들에게 위문품을 보내거나, 전사자 유가족들을 지원하거나.

힘들게 나라를 지키는 장병들 입장에선 정말 가뭄의 단비와 같았을 것이다.

“아무튼 여건이 좋아지면 제대하고 실업팀 쪽으로 들어가고 싶어. 아니면 태성이 녀석처럼 외국으로 나가든가.”

“아서라, 그게 어디 쉬운 줄 알아.”

취업과 유학이 목적이면 해외로 나가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문제는 낯선 땅에서 성공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

함흥철이 들먹인 차태성만 해도 그럭저럭 잘 풀린 경우다.

현지에서 직장도 구하고 아마추어 팀에도 들었다고 하니까.

“영어라도 잘하면 몰라. 그렇지 않으면 객사하기 딱 좋지.”

“역시 힘들려나.”

이준영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최정민은 그렇게까지 염치없이 굴고 싶진 않았다.

“지금은 힘들지. 그러니까 앞으론 나아져야 할 텐데…….”

과연 나아질 날이 올 것인가.

나아지지 않아도 좋으니, 이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기를.

어느새 하늘에 뜬 달을 보며 최정민은 간절히 기원했다.

***

3월 18일 비너 SC를 7 대 1로 대파한 맨유는 3일 후 리즈 유나이티드와 경기를 치렀다.

“오늘은 몇 대 0으로 이기려나?”

“얀마, 설레발치면 망하는 거 모르냐?”

“하지만 리즈 유나이티드인걸. 하위권 떨거지라고.”

대다수 관중들이 결과를 낙관했다.

그리고 맨유의 주전 스트라이커 데니스 바이올렛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전반 14분, 바비 찰튼이 찔러 준 스루패스를 받아 가볍게 선제골을 만들어 냈다.

“형, 좀 잘해 봐. 우리 팀 후보도 그보단 잘하겠어.”

“뭐, 인마? 이 자식이 좀 잘나간다고 까불긴!”

키득대는 바비의 도발에 그의 형 잭 찰튼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음 같아선 동생이라 쓰고 웬수 같은 녀석을 쥐어박고 싶지만, 그랬다간 바로 퇴장당할 터.

잭 찰튼은 분기를 억누르며 수비에 집중했다.

그 덕분인지 리즈는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크게 흔들림 없이 경기를 운영해 나갔다.

그런 잭의 활약을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도 눈여겨보았다.

“저 친구가 바비의 형이라고 했던가?”

“네, 체격도 굉장히 좋고 투지 넘치는 수비력도 볼만하죠. 주변에 제대로 받쳐 주는 선수가 없는 점이 아쉽네요.”

상위권 팀으로 가도 충분히 활약할 만한 인재.

두 지도자는 탐이 나는 표정으로 잭 찰튼의 플레이를 계속 지켜보았다.

전반전을 1 대 0으로 마친 맨유는 후반에 보다 공격적으로 나왔다.

상대 공격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준영이나 던컨 등 후방 수비수들까지 전진해서 올라왔다.

「던컨이 과감하게 리즈 진영으로 돌파해 들어갑니다. 도중에 방향을 전환하며 데니스에게 패스, 그리고 데니스가 백힐, 던컨이 재차 받아서 슛-! 아, 수비수 지미 던의 손에 맞았습니다!」

“핸들링이다!”

“페널티킥이야. 저 자식 손에 맞았다고!”

골대 뒤쪽에 있던 맨유 서포터들이 곧장 언성을 높였다.

라디오 중계 캐스터가 본 것을 그들이 못 봤을 리 없으므로.

심판 역시 핸들링이라 판정하고 곧장 페널티킥을 주었다.

그리고 키커로 나온 바비 찰튼이 깔끔하게 이를 성공시켰다.

스코어가 벌어지자, 리즈의 페이스는 급격히 무너졌다.

준영은 힘겹게 비틀거리던 그들에게 가차 없이 확인 사살을 가했다.

후반 20분에 세트 플레이에서 잭 찰튼을 제치고 헤딩슛에 성공했고, 종료 직전에는 무회전 중거리 슛으로 리즈의 골문을 세차게 흔들었다.

최종 스코어 4 대 0.

또다시 대승을 거둔 맨유는 팬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필드에서 퇴장했다.

“앞으로 4경기인가.”

정규 리그 남은 경기는 7경기.

그중에 4경기를 이기면 남은 경기와 상관없이 자력 우승이다.

문제는 당장 치러야 할 그 4경기의 일정들이다.

“3월 24일 FA컵 4강 루턴 타운전, 3월 27일 포츠머스전, 28일 번리 원정, 30일 포츠머스 원정… 에라이, C8.”

남은 일정을 확인해 보던 준영은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작년 박싱데이 때보다 더 빡센 일정.

FA의 클래스는 여전했다.

***

1958-59 시즌 3월 일정은 진짜 뒤죽박죽 수준이더군요.

실제로 FA컵 준결승 올라가고 유러피언 컵 경기 치렀으면 도대체 일정 조정을 어찌했을까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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