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23. 미래 재단
“나이스 골!”
“하핫! 펠레가 또 한 골 해 주는군!”
로저 헌트의 동점 골에 콥스는 일제히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들의 환호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방금 골 상황에 대해 선심이 깃발을 들어 올렸기 때문.
“오프사이드라고?”
“쳇, 어쩐지 유나이티드 놈들, 제대로 수비를 안 한다 했어.”
“아악! 또 저 간교한 원숭이 놈에게 당하다니!”
펠레가 패스를 하기 직전, 준영과 맨유 수비수들은 재빨리 전진하며 오프사이드 트랩을 깔았다.
그 함정에 로저 헌트뿐만 아니라 중앙에 있던 알란 아코트도 걸려들었다.
“씁, 주의를 하라고 그리 일렀건만!”
빌 섕클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존 Y. 리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조심하라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공격수들이 제대로 피하지 못했으므로.
‘그나저나 저 함정 수비는 우리도 빨리 습득해야 하는데…….’
허더스필드 타운 시절에 섕클리는 준영에게 함부로 오프사이드 트랩을 쓰지 말라고 일렀다.
하지만 유용한 수비 전술인 건 사실이고, 실제 1부 리그 팀들뿐만 아니라 2, 3부 리그에서도 이를 재빨리 도입하는 팀들이 나오고 있었다.
리버풀 수비수들도 훈련은 하고 있지만, 아직 실전에서 써먹을 만큼 능숙하진 못했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반드시 습득시켜야지. 안 되면 수비수를 새로 영입해서라도…….’
빌 섕클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펠레는 방금 전 상황이 계속 눈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젠장, 패스를 좀 더 빠르게 찔러 줬어야 했는데!”
약은 수를 쓴 상대가 얄밉긴 했다. 하지만 거기에 걸려든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다음번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겠어!’
펠레가 이를 악물고 있을 때, 해리 그렉이 찬 공이 리버풀 진영으로 떨어졌다.
자신을 마크하는 수비수를 밀어내며 공을 확보한 알렉스 퍼거슨은 측면 쪽으로 공을 내주고 중앙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에게서 패스를 넘겨받은 레논은 10미터가량 치고 가다 골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크로스!’
수비수는 그리 판단하고 몸을 날렸지만, 레논은 상대를 제쳐 내고 박스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의 눈앞에 리버풀 골문이 커다랗게 들어왔다.
‘나도 프로다. 그러니 프로답게 할 거다!’
필드에 뛰고 있는 동안은 쿼리멘의 리드 보컬이 아닌 레프트 윙어 존 레논.
그의 결의에 찬 슈팅이 곧은 궤적을 그리며 리버풀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좌악-!
그물을 세차게 흔든 공은 골대 안에서 팽이처럼 맴돌았다.
난데없이 날아든 일격에 리버풀의 선수와 관중들은 뒤통수가 얼얼한 기분을 느꼈다.
“저 자식, 우리 2군 선수 아니었나?”
“스키플 밴드도 하는 놈일걸.”
“친정 팀을 배신하다니!”
“저 녀석을 유나이티드로 보내 버린 우리가 바보지. 누굴 탓하겠어?”
거의 쐐기 골이나 마찬가지인 추가 골을 성공시킨 레논에게 수만 명의 시선이 꽂혔다.
레논은 신이 나서 모여든 동료들의 축하를 마다하고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그에게 준영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표정이 별로구나.”
“프로답게 플레이하자고 생각했지만… 친정 팀에 비수를 꽂은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수만 명이 보내오는 분노와 원망.
마치 송곳과 칼날에 푹푹 찍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살벌했다.
“이제 리버풀에서 밴드 활동을 못할지도 모르겠어요.”
“리버풀 사람들이 그 정도로 쩨쩨하진 않다고 생각해. 그리고 리버풀에서만 노래를 부를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준영의 말에 레논의 굳어 있던 표정이 풀어졌다.
“주장 말이 맞아요. 영국 전역을 무대로 삼아야죠.”
“영국뿐만이 아니지. 유럽, 아니 세계 전역이 열광하도록 만들라고.”
“세계라……. 가능할까요?”
“꿈을 향해 계속 달려가면,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되지. 내 경우에는 그랬어.”
준영의 말에 레논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꿈을 현실로 이룰 수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
“좋아, 어디 달려 볼까.”
세계를 향해 나가 보자.
또 다른 결심을 세운 레논은 다시 기운차게 달려 나갔다.
***
1 대 3.
펠레는 분통한 심정으로 스코어보드를 바라보았다.
경기 전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복수를, 그리고 승리를 선언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동점 골을 넣었지만, 이후 다시 실점을 내줬다.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득점을 만들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난 채 경기 종료.
정말이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기분을 맛보려고 고국을 떠나 영국에 온 것은 아니건만!
“수고했다, 이드송. 이제 돌아가야지.”
빌 섕클리가 다독였지만, 펠레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우리가 약한 걸까요? 놈들은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가 많이 부족했지.”
섕클리가 팀을 맡은 건 반년 남짓.
펠레나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발탁하며 리그에서 좋은 성과를 냈지만, 아직 보완해야 할 점들은 많았다.
‘유나이티드는 아주 전문적인 전력 분석팀이 있다던가? 아마 경기 전부터 우리 팀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을지 모르겠군.’
지난번에 맷 버스비를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존 Y. 리는 단 1퍼센트라도 승산을 높일 수 있다면 어떻게든 그걸 준비하고 해낸다고.
‘원정 전용기도, 전력 분석에 무비 카메라 사용도 다 녀석이 제의한 거라지?’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훈련뿐만 아니라, 팀의 주주로서 투자와 지원까지 끌어오고 있었다.
최근에는 선수들을 위한 클럽 하우스 건설에 나서고 있다고.
‘평범한 선수가, 단지 발재간만 좋은 녀석이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저 패배의 쓰라림만 느껴서는 안 된다.
상대에게 배울 것은 배우고, 더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돌아가서 할 일이고, 지금 당장은 실망한 천재 소년의 기운을 북돋아 줄 필요가 있었다.
“이드송, 우린 다음 시즌에 승격할 거다. 그럼 유나이티드와 맞붙을 기회는 또 올 테지.”
“…….”
“앞으로 우리는 훨씬 강해지고 준비도 많이 하게 될 거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오늘의 패배를 절대 잊지 마라.”
펠레는 명심하겠다는 듯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때는 반드시 이길 겁니다!”
이제 토대를 잡은 붉은 제국의 축구 황제는 다음을 기약하며 필드에서 내려왔다.
***
경기가 끝난 후.
언제나처럼 준영에게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리 선수, 선제골을 넣고 별다른 골 셀레브레이션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맨체스터 가디언의 기자가 건넨 질문.
안 그래도 다른 기자들도 궁금하던 것이었기에 모두들 준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 뮌헨에서 비행기 사고로 우리 팀이 힘들 때 리버풀에서 도움을 준 적이 있었죠. 그 고마움을 봐서라도 어느 정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리버풀이 보내 준 5명의 선수 중에 존 레논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 출전해서 쐐기 골을 넣으며 승리에 공헌했다.
“혹시 예의상 비겨 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요?”
“전혀요. 어디까지나 승부는 냉정하게,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해야죠. 그게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봅니다.”
더구나 맨유 입장에서는 아예 지면 몰라도 비길 수는 없었다.
당장 3월 4일에 유러피언 컵 8강 일정 때문에 오스트리아 비엔나 원정을 가야 하는데, 그사이에 FA컵 재경기를 해서 득이 될 게 하나도 없으니까.
“오늘 경기, 상대 팀에서 가장 인상 깊은 선수가 누구던가요? 역시 펠레입니까?”
“예, 패하긴 했어도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죠. 그뿐만 아니라 로저 헌트 선수의 플레이도 아주 볼만했습니다.”
오늘 경기와 관련해서 기자들의 질문에 응답한 준영은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때, 뒷줄에 있던 기자가 손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 선수, 최근에 새로운 장학 재단을 설립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존의 기술학교 장학 지원과는 다른 겁니까?”
“예, 일반 학생들과 한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지원하는 재단입니다.”
이름은 일단 ‘미래 재단’이라고 지었다.
영국 학생들도 지원하지만, 이미 한국에 설립되어 있는 한영 재단과 연계하여 한국의 인재들에게 영국에 유학할 기회를 줄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이 장학 재단을 통해 육성된 인재들은 영국과 한국에서 자신의 든든한 수족이 되어 줄 것이다.
“리 선수가 사업가로도 크게 성공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여러 가지 진행하는 사업들이 많은데, 장학 재단에 투자할 만큼 충분한 자금이 있는 겁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염려하실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자세한 건 노코멘트.
안 그래도 미래 재단 문제와 관련해 만날 사람이 있었던 준영은 인터뷰를 마치고 맨체스터로 향했다.
***
맨체스터 피카디리 역 부근의 레스토랑.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장년의 동양인 신사는 준영이 들어오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여기.”
한걸음에 그에게 달려간 준영은 꾸벅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사님.”
“이 친구도 참……. 대사직 때려치운 지가 언젠데 아직도 대사래. 그냥 교수라고 해.”
오늘 저녁 준영이 만난 사람은 전 주영 대한민국 대사인 김용우였다.
그는 작년에 대사직에서 물러난 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지난달에 준영이 한국에 갔을 때 잠시 만나기도 했다.
그때 김용우는 준영에게서 놀랄 만한 제안을 받았다.
꽤 흥미로운 제안이라, 그는 주변 정리를 하고 다시 영국으로 왔다.
“솔깃해서 받아들이긴 했는데, 내가 이사장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영국과 한국 양쪽 사정에 밝으신 대사님, 아니 교수님이라면 잘 해내실 겁니다.”
김용우는 이번에 준영이 설립하는 미래 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기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 학생들에게 넓은 세상에서 보고 배울 기회를 제공한다는 게 맘에 들었다.
“물론 영국 학생들도 무시하진 말아야지. 근데 한국 학생들 선발이야 한영 재단에서 할 거고……. 영국 학생들 지원 기준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영국의 한국 전쟁 참전자 가족 중에서 선정할 생각입니다.”
“그래, 우리나라를 위해 피 흘려 준 분들에게 그만한 보은을 해 주는 게 옳지. 근데 말이야…….”
김용우는 미심쩍은 눈길로 준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혹시 자네 애인이나 그 동생들을 1순위로 뽑을 생각은 아니겠지?”
“어휴, 교수님도 참… 사람을 어떻게 보시고…….”
“하하핫, 농담이야.”
농담이라도 논란이 생기는 일은 사양.
고개를 내젓는 준영에게 김용우가 약간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건넸다.
“이런 일에 혈연이나 학연, 지연을 적용해서는 안 되겠지. 그래도 개인적으로 추천했으면 싶은 학생이 있어.”
“누군데요? 대사님 친척입니까?”
“음, 나랑 같은 안동 김씨인데, 전쟁통에 부친과 형제를 잃은 불쌍한 녀석이지. 미군 부대 하우스보이를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 외교학과에 들어갔어.”
같은 가문 출신에, 외교학을 전공하고 있어서 김용우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
“서울대에 입학할 정도라면 확실히 뛰어난 인재로군요. 그 학생, 이름이 뭐죠?”
“김재익이라고 해.”
김재익.
분명히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김재익은 5공화국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으로 일한 사람입니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 80년대 당시 물가 안정에 힘썼습니다.
당시에 경제에 있어서는 대통령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권한을 갖고 한국의 경제 개혁에 힘썼습니다.
꽤 선견지명이 있던 사람이지만, 안타깝게도 북한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 휘말려 순직하고 말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