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19.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하여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혹시 맹수가 사람에게 달려들기라도 한 걸까.
태성의 물음에 사육사 하나가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곰 한 마리가 도망갔어.”
“예? 아니, 어떻게요?”
“경첩이 녹이 슬어 낡아 버린 문을 부수고 뛰쳐나갔지. 얌전한 놈이라서 이런 사고를 칠 줄은 몰랐는데…….”
동물원 안을 다 뒤졌지만 곰을 찾아내지 못했다.
분명히 밖으로 빠져나간 게 틀림없다고 판단했을 때, 외부에서 신고가 들어왔다.
“소튼 파크 부근에서 곰이 트럭에서 뛰어내리는 걸 봤답니다.”
“트럭을 타고 도망갔다고?”
“아침에 들어오는 먹이 납품 트럭에 숨어든 모양입니다.”
경찰과 동물원 직원들은 부랴부랴 소튼 파크 쪽으로 향했다.
차태성도 사육사들을 따라 곰 수색에 나섰다.
“난 이쪽을 살펴볼 테니까, 넌 저쪽 골목을 둘러봐. 발견하면 바로 호루라기 불고.”
호루라기 하나를 덜렁 건네받은 태성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얌전한 놈이라지만 상대는 곰이다.
그럼 호신용으로 권총 같은 거라도 줘야 하는 건 아닌지?
“어휴, 제발 내 쪽으로 나타나지 마라.”
골목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태성.
근처 펍에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술집은 장사를 안 할 텐데…….’
가까이 가서 보니 문이 부서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도둑이 들었나 싶어서 슬쩍 살펴봤더니, 정말 큰 도둑이 가게를 이리저리 뒤지고 있었다.
‘고, 곰이다!’
두 발로 술집 안을 돌아다니는 커다란 털북숭이는 틀림없이 곰이었다.
그런데 이 곰이 하는 짓이 참 요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빨로 물어서 맥주병 뚜껑을 딴다 싶더니, 마치 사람처럼 앞발로 술병을 들어 마셨다.
꺼억-!
‘사람처럼 트림을 하네.’
한 병 정도로 성이 차지 않았던지, 곰은 연달아 맥주병을 따서 쭉쭉 들이켰다.
그 모습이 하도 신기해서 태성은 두려움도 잊고, 신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잠시 잊었다.
한동안 맥주를 들이켜던 곰은 뭔가 다른 게 먹고 싶었던지 카운터 서랍 쪽을 뒤졌다.
‘안주라도 찾나?’
쾅!
차태성이 슬쩍 고개를 빼서 살펴보던 그때, 부서진 문이 완전히 뜯겨져 바닥에 쓰러졌다.
꾸어엉?
“허억!”
곰과 시선이 마주친 태성은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뒤를 힐끔 돌아봤더니 곰이 맹렬히 쫓아오고 있었다.
‘미련곰탱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곰을 모르는 사람이 지어낸 말인 듯했다.
‘크악! 잡히면 먹힌다!’
뒤늦게 호루라기 생각이 난 태성은 호루라기를 주머니에서 꺼냈지만, 급하게 꺼내려다 그만 땅바닥에 흘리고 말았다.
거기다 앞쪽은 막다른 골목!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었다.
“으아아아… 사람 살려! 누구 없어? 곰이 사람에게 달려들고 있다고!”
외쳐도 아무도 와 주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한국말로 내뱉었기 때문일까.
궁지에 몰린 태성은 구석에서 주먹을 마구 휘둘러 댔다.
“오지 마! 나는 맛없다고!”
꾸엉?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이던 곰이 태성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 와중에 녀석은 주먹에 몇 대 얻어맞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입에 물고 왔던 종이 상자를 태성의 발치에 내려놓았다.
“뭐, 뭐야? 이거 담배 아니야?”
종이 상자에 든 것은 시가라 불리는 커다란 궐련.
곰은 궐련 하나를 입에 물고 일어나서는 앞발로 끄트머리를 툭툭 쳤다.
뭔가 몹시 간절한 그 행동에 태성은 저도 모르게 맥이 풀리고 말았다.
“너 지금 나한테 담뱃불 붙여 달라고 그러는 거냐?”
꾸엉! 우어엉!
뭔가 성화를 부리는 듯한 녀석의 태도에 태성은 시가 상자에 든 성냥을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만족한 듯 헤벌쭉한 표정을 지으며 코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 댔다.
“거참, 담배 피울 줄 아는 곰이라니…….”
혹시 이 녀석, 술담배가 하고 싶어서 탈출한 걸까?
도대체 이 녀석에게 술담배를 가르친 건 누구인가?
우어엉!
순식간에 시가 하나를 다 피운 녀석이 또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다시 불을 붙여 달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이놈, 아주 골초구만.”
어이가 없어 그럴까.
더 이상 이 골초 곰탱이가 무섭게 보이지 않았다.
다시 담뱃불을 붙여 준 태성은 남은 시가를 챙겨 들고 곰에게 말했다.
“남은 건 동물원에 돌아가서 피우자. 알겠냐?”
알았다는 듯 고개를 흔든 곰은 태성을 따라 골목을 나왔다.
아침부터 에딘버러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곰 탈출 소동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패스! 빨리 패스!”
“뭐 해? 얼른 달려 들어가야지!”
하얗게 눈이 내린 훈련장 위로 선수들이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2월 7일 토트넘과 리그 경기가 있었던 맨유 선수들은 찬바람 속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을 소화했다.
그러다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던컨이 숀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아침 신문 봤어요? 어제 숀의 고향에서 곰이 탈출했다던데.”
“그거? 펍에서 맥주랑 시가를 훔쳤다는 녀석 말이지? 그 녀석, 유명해. 보이텍이라고, 폴란드 군인들이 키우던 녀석이지.”
“군대에서 곰을 키웠다고요?”
“그래, 전투에도 몇 번 나갔다고 들었어.”
곁에서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준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보이텍인지 하는 그 곰이 일으킨 소란에 낯익은 사람이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한국에 가서 경기도 하고 지도도 해 주었던 연세대 학생 차태성.
신문 기사를 보니 선진 축구를 경험하고 싶어서 영국에 온 것이라고 했다.
‘이 친구도 윤옥이랑 비슷한 도전자구만.’
그 도전자 차태성은 이번에 좋은 기회를 잡았다.
에딘버러 동물원에서 가까이 있는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FC 구단에서 ‘곰을 포획한 용사’에게 특별히 입단 테스트 기회를 주겠다고 했던 것.
“존, 그 곰을 잡았다는 Cha라는 친구, 실력은 어때? 쓸 만해?”
던컨의 물음에 준영은 차태성의 플레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꽤 저돌적이야. 여러 가지 포지션을 소화할 줄 아는데, 기본기가 좀 부족해.”
듣자니 한때 축구를 그만둔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프로 수준은 아니라는 거야?”
“한국에 있을 때도 대학 선수였어.”
준영의 말을 들은 던컨은 뭔가 실망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나는 존이 잘하니까 한국에도 뛰어난 선수들이 꽤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좀 특이 케이스라서. 그리고 전쟁 때문에 젊은 선수들도 제대로 육성되지 못한 상태야.”
“쩝, 우리 팀에 불러서 써먹을 만한 선수는 없다 이거군.”
“그래, 수비수는 특히 그렇지.”
던컨이 한국 선수에 대해 관심을 보인 데는 준영도 있지만, 현재 팀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측면 수비 쪽의 보강.
오른쪽 측면은 던컨이 좋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었지만, 왼쪽에는 마땅히 믿고 맡길 고정 멤버가 없었다.
그래서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는 다른 포지션에 있는 선수들을 그 자리에 테스트하고 있었다.
심지어 준영도 연습 경기에서 왼쪽 풀백으로 뛰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땅히 맡길 만한 선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존이 제일 나았지.”
“하지만 존을 그 자리에 쓰긴 아까워요. 중앙에서 딱 자리 잡고 조율해 주는 게 제일 낫다고요.”
던컨의 반박에 숀은 새로운 후보를 가리켰다.
“바비를 땜빵으로 쓰는 건 어떨까? 저 녀석, 체력도 좋고 수비도 잘하잖아.”
“글쎄요. 한창 공격력에 물이 오른 녀석을 수비로 돌리기는 좀…….”
둘의 논쟁을 들은 준영은 21세기에도 뛰어난 기량을 가진 풀백 플레이어가 귀했던 게 생각났다.
앞으로 축구 전술은 측면 활용이 점점 더 늘어난다.
그만큼 우수한 풀백 확보는 팀 전력 향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봐, 존. 어디 쓸 만한 왼쪽 풀백이 없을까?”
“글쎄, 브라질에서 니우통 산투스라도 영입해 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힘들겠지.”
니우통 본인은 물론, 그의 소속 팀인 보타포구 FR이 이적을 승낙할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조 암스트롱을 비롯한 현재 맨유 스카우터들은 남미 쪽과의 인맥이 거의 전무한 상태다.
“브라질은 너무 멀어. 기왕이면 가까운 동네면 좋겠는데…….”
“가까운 동네?”
던컨의 말에 준영은 한동안 잊고 있던 한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확실히 그 녀석이라면 적격일 거야.’
“왜 그래, 존? 생각난 사람이 있어?”
던컨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더스필드 타운의 레이 윌슨.”
굉장한 체력과 뛰어난 수비력을 가진 선수로, 21세기에 갖다 놔도 풀백으로 뛰어난 활약을 할 만한 인재.
준영이 허더스필드를 나올 즈음에 그 역시 에버튼에서 오퍼를 받았지만, 이적이 성사되진 않았던지 여전히 허더스필드 타운에 남아 있었다.
“레이 윌슨이라……. 그러고 보니 3년 전에 맞붙어 본 적이 있어. 태클이 꽤 날카로웠지.”
“그래, 실력은 있다고. 일단 감독님께 추천을 해 봐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난 준영은 곧장 버스비에게 다가갔다.
선수 영입을 결정하는 건 감독의 몫이니, 먼저 그의 마음을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
해 질 무렵.
맷 버스비는 구단 사무실에서 수석 스카우터 조 암스트롱과 만나 새로 영입할 선수들에 대해 논의했다.
우승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불붙는 3월에는 트레이드가 금지되기 때문에 2월에 다 끝내 놓아야 했다.
“리틀 존이 레이 윌슨을 추천하더라고?”
“예. 조도 알고 있겠지만 그 친구, 꽤 쓸 만한 건 사실이에요.”
레이 윌슨에 대해서는 버스비도 알고 있었다.
기량도 좋고 장래성이 뛰어난 선수라 이미 한 번 찔러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빌 섕클리가 반대하고, 허더스필드 구단에서도 터무니없는 이적료를 요구하는 바람에 영입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섕클리도 리버풀로 가고 없지. 쓸어 오는 김에 레이 윌슨뿐만 아니라 데니스 로 그 꼬맹이도 데리고 와야겠어.”
“그럼 이적료가 만만찮을 텐데요?”
“적당한 이적료에 우리 후보 선수들하고 맞트레이드하면 되지 않겠나. 아니면 일단 임대로 영입하거나.”
협상은 자신에게 맡기라는 듯 조 암스트롱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자금도 그리 부족하진 않다.
준영이 투자자나 후원 기업들을 꽤 많이 끌어모아 준 덕분이다.
“그건 그렇고, 지미 암필드나 조지 코헨 영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근 경기들에서 버스비는 측면 쪽에서 불안한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그래서 기존 스쿼드에서 풀백으로 쓸 만한 선수가 있는지 살펴보는 한편, 외부에서 새로운 선수 영입도 모색하고 있었다.
“암필드는 안 될 것 같아. 블랙풀 구단에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차라리 스탠리 매튜스를 내주면 몰라도 암필드는 절대 못 주겠대.”
“하긴 젊은 만큼 장래성이 있는 선수니까요. 풀럼의 조지 코헨은 어떻습니까?”
“블랙풀만큼 완고하진 않아. 다만 올 시즌이 끝난 뒤에 협상을 하고 싶어 하더군.”
“그렇습니까. 그럼 일단 레이 윌슨부터 데려와야겠군요.”
논의를 끝내고 조 암스트롱이 나가자, 버스비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리그와 FA컵, 유러피언 컵 일정을 살펴본 그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어. 현재 문제만 보완하면 잉글랜드 최초의 트레블(Treble) 달성도 가능해!”
아직 넘어야 할 난관이 있지만,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꿈으로 여기던 일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버스비는 부지런히 다음 경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1. 참전 영웅(熊) 보이텍은 자유 폴란드군 제2군단 포병 사단에서 복무했다가 말년에 에딘버러 동물원에서 지냈습니다.
그에 대한 얘기는 2차 세계 대전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합니다.
2. 지미 암필드와 조지 코헨은 1960년대 잉글랜드 국가대표를 지낸 풀백들입니다.
당시 암필드는 ‘유럽 최우수 라이트백’으로 선정되었고, 코헨은 조지 베스트에게서 ‘진짜 상대하기 힘든 수비수’로 꼽혔습니다.
둘 다 한 팀에 뼈를 묻을 정도로 소속 팀에 대한 애정도 굉장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