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18. 승리를 가져오는 자
‘뭔가 눈빛이 달라졌군.’
후반전, 다시 필드로 나온 준영은 뉴캐슬 선수들에게서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다.
저런 모습은 보통 시즌 말미 강등 위기를 겪는 최하위권 팀에서 종종 보이곤 했다.
궁지에 몰려,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이들이 보이는 결사적인 태도.
‘도대체 라커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뭔가 고성이 오가는 건 들었기에 분위기가 굉장히 안 좋았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오히려 분위기가 최악이었기에 이판사판이라며 기세가 반등했을지 모른다.
“상대 기세가 심상치 않아. 공수에서 굉장히 적극적이고 거칠게 나올 수 있으니 다들 주의하도록.”
“Yes, Sir.”
후반전에 임하기 전, 둥글게 어깨동무한 상황에서 준영은 동료들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특히 전반에 두 번의 실수를 했던 조 캐롤런에게는 충고와 함께 조언을 해 주었다.
“조, 급한 상황에서 더 침착해야 해. 섣불리 공을 뺏으려 하기보다 상대를 지연시키고 공격할 찬스를 막는 게 우선이야.”
“명심할게요.”
“그래, 후반전 마무리를 잘 지어 보자.”
마지막에 선전을 다짐하는 구호로 ‘Manchester is Wonderful!’을 외친 선수들은 각자 위치로 흩어졌다.
그리고 심판의 휘슬과 함께 후반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조지 이스트햄이 공을 몰고 갑니다.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맨체스터의 수비진에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한 골이라도 만회해 보고 싶을 텐데요…….」
마크를 붙은 상태에서 패스할 곳을 찾아 안간힘을 쓰는 이스트햄의 모습이 라디오 중계 캐스터에게도 불쌍하게 보인 모양.
자신이 누군가의 동정을 사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조지 이스트햄은 계속해서 빈틈을 노렸다.
그러다 아이버가 슬쩍 맨유 수비 라인 사이에 끼어들자, 그에게로 패스를 건넸다.
하지만 그 공은 아이버가 잡기 전에 빌 포크스가 멀리 걷어 내 버렸다.
‘쳇, 쓸데없을 정도로 치밀하군.’
이스트햄은 내심 분통을 터트렸다.
맨유의 수비는 시즌 초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해졌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선수들의 손발도 잘 맞고, 4-2-4를 비롯해 새로운 전술들도 잘 녹아들었기 때문.
여기에 준영이 전수한 21세기의 수비 노하우나 공격수들의 압박과 견제가 큰 도움이 되었다.
뉴캐슬 선수들은 이런 점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도 당장 자신의 재치와 발재간만으로.
‘제길, 던컨 쪽은 어림도 없군.’
‘중앙 쪽으로 노려 볼까? 아니지, 그쪽은 존 Y. 리가 있으니 왼쪽 측면으로…….’
‘이런, 캐롤런이란 애송이도 전반하곤 딴판이잖아!’
후반전이 열리고 약 10분가량 양 팀의 대치가 이어졌다.
뉴캐슬 측에서 찔러 넣으면 맨유는 걷어 내고, 빈 공간으로 공이 간다 싶으면 어느새 주변에 있던 선수들이 내려와서 채웠다.
그렇게 계속 공방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맨유 수비 라인을 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아이버 올처치에게 공이 전달되었다.
아이버는 발끝으로 그 공을 슬쩍 굴절시켰다.
그러자 살짝 뜬 공이 수비 라인을 넘어 맨유 페널티 박스 안으로 파고든 레너드 화이트의 앞에 떨어졌다!
“이런!”
가까이 있던 빌 포크스가 황급히 막으려 했지만, 레너드의 동작이 더 빨랐다.
그가 때린 발리슛은 그대로 골대 우측 상단에 박혔다.
「골! 뉴캐슬의 만회 골이 나왔습니다! 후반 13분, 아이버가 절묘하게 건네준 패스를 레너드 화이트가 깔끔하게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골.
특히 앞서 아이버의 어시스트도 기가 막혔다.
발끝으로 방향을 돌려놓은 로빙 패스는 그야말로 작품이라 할 만했다.
“역시, 심상찮다 싶더니 저질러 버리는군.”
준영의 표정이 달라졌다.
상대의 만회 골이 꽤 이른 시간에 터졌다.
아직 2골 차이라고 하지만, 이후에 한 골 더 쫓아오기라도 한다면 분위기가 어찌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급하게 공격 전개할 거 없어. 충분히 공을 돌리면서 상대를 끌어내.”
이런 상황에서 뉴캐슬에 공을 넘겨줘서는 안 된다.
이대로 점유한 상태에서 상대의 리듬이 느슨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준영의 생각이었지만, 뉴캐슬 측은 느슨해질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과감하게 수비 라인에서 뛰어나온 알프 맥마이클은 바비 찰튼에게서 패스를 건네받은 레논을 태클로 쓰러트렸다.
‘파울 아닌가?’
공을 노린 정당한 태클이라고 봤는지, 심판은 경기를 그대로 진행시켰다.
알프가 길게 내찬 롱 패스는 조지 이스트햄에게 연결되었다.
그에 맞춰 측면에 있던 고스와미 추니가 잽싸게 페널티 박스 쪽으로 달려 들어가며 맨유 수비수들의 눈길을 끌었다.
뻐엉-!
이스트햄이 과감하게 중거리 슛을 날렸다.
기습적으로 날아든 슈팅을 해리 그렉이 펀칭으로 쳐 냈지만, 공은 멀리 가지 못했다.
정면에서 딱 기다리고 있던 레너드가 리바운드 볼을 무릎으로 골대로 밀어 넣은 것이다.
“우와아아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관중들은 물론 취재하던 기자들도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전반에 4실점을 하며 끌려가던 팀이 후반 초반에 2골을 몰아치며 1점 차까지 따라잡을 줄이야!
“이대로라면 동점도 가능할지도?”
“어쩌면 역전까지도…….”
기자들은 이변을 기대했다.
그쪽이 주목받기 매우 좋은 뉴스가 될 테니까.
하지만 맨유 선수들이나 준영은 이변의 희생양이 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대단하군. 하지만 너희들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승리는 절대 넘겨주지 않겠다.
그리 다짐한 준영이 전진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와, 이대로 괜찮은가?”
“뉴캐슬 놈들, 순식간에 쫓아오다니…….”
후반전에 뉴캐슬이 일으킨 반격의 폭풍에 맨유의 서포터, 12번째 선수들은 초조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설마 이대로 기분 잡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전직 선수 출신이자 맨유의 전 주장인 로저 바인이 보기에도 지금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다들 불안감에 웅성이고 있을 때, 자신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말아요. 결국엔 우리 팀이 이길 테니까.”
이렇게 장담한 이는 윌리엄 터너.
그는 미드필드 지역에서 공을 몰고 오는 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팀에는 승리를 가져오는 자가 있잖아요.”
터너와 서포터들이 기대감을 품고 지켜보는 가운데, 준영은 뉴캐슬 진영을 둘러보았다.
뉴캐슬은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도 사뭇 달라져 있었다.
전반에는 제멋대로였던 간격이 후반에는 제대로 정비되어 있었다.
‘그대로 뚫고 가는 건 힘들겠어.’
그대로 중거리 슛을 때릴까 싶었지만, 거리를 두고 견제하는 뉴캐슬의 미드필더들 때문에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자칫 육탄 방어에 막혀 공을 빼앗기게 되면 곧장 반격을 허용하고 말 테니까.
‘조바심 낼 필요 없어. 아직 리드를 잡고 있는 건 우리니까.’
급한 건 오히려 저쪽.
준영은 후방에 남아 있던 수비수들과 공을 돌리며 뉴캐슬 선수들을 끌어냈다.
“뭐 하고 있냐, 존 Y. 리! 얼른 들어와 보라고!”
“와서 발재간 좀 부려 보시지!”
뉴캐슬의 시시한 도발을 흘려버린 준영은 바비 찰튼 쪽으로 재빨리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알버트 스캔론과 위치를 바꾸며 패스를 넘겨받았다.
그렇게 그들의 움직임을 뉴캐슬 쪽에서 대응해 가는 과정에서 수비 라인 간격이 벌어졌다.
그 틈을 노리고 준영이 냉큼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막아!”
“딕, 너도 마크를 거들어!”
준영에게 패스가 건네지는 순간, 딕 키스와 뉴캐슬의 주장 제임스 스쿨라가 곧장 달려들었다.
“어디 설쳐 봐라, 원숭이! 발목을 날려 주마!”
준영은 스쿨라의 도발에 발뒤꿈치로 공을 안쪽으로 찔러 넣었다.
이 절묘한 힐 패스는 데니스 바이올렛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
“이런, 안 돼!”
뉴캐슬 수비수들이 황급히 돌아서 봤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을 저지할 수 없었다.
바이올렛은 골키퍼와의 일대일 상황을 깔끔하게 결정지었다.
골키퍼의 가랑이 사이로 빠진 공은 골라인을 넘어 그대로 그물을 흔들었다.
맨유의 다섯 번째 골이 터진 순간, 우레 같은 함성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그렇지! 역시 뉴캐슬은 우리 상대가 안 돼!”
“크크, 아까 역전당한다고 호들갑 떨 땐 언제고?”
점수가 다시 2점 차로 벌어지자, 뉴캐슬 선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야말로 찬물을 덮어쓴 기분.
하지만 멍때리고 있던 것도 잠깐이었다.
‘어차피 승패는 상관없어.’
‘감독님 말대로 우리 스스로를 위해 뛰어야 해!’
하는 데까지 해 보자.
이런 마음에 뉴캐슬 선수들은 이후 최선을 다해 공격 기회를 만들고 맨유의 공세를 저지했다.
그 과정에서 골은 터지지 않았지만, 아쉬운 기회도 있었고 박수받을 정도로 멋진 상황도 펼쳐졌다.
결국 최종 스코어는 5 대 3.
끝까지 경기를 지켜보았던 찰스 미튼 감독은 맷 버스비에게 다가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감독님. 후배들이 정말 잘하더군요.”
“자네 팀 선수들도 대단했어. 추격당할 땐 섬뜩할 정도였지.”
“혹시 탐이 나는 녀석이 있으면 데려가세요. 본인들이 원한다면 탈주시키고 싶으니까요. 물론 합법적으로.”
미튼의 말에 버스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한때 비행으로 쫓겨나 버린 문제아.
앞으로도 힘든 일이 많겠지만, 미튼이 꿋꿋이 이겨 낼 수 있기를 기원했다.
***
이른 아침.
숙소에서 나온 차태성은 현재 자신이 사는 코스토핀 부근의 공원에 가서 훈련을 했다.
가볍게 뛰어 몸을 달군 다음, 축구왕 이준영이 가르쳐 준 몇 가지 기술들을 연습했다.
그렇게 훈련을 끝내고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곧장 일터로 향했다.
거리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은 일터로 가는 태성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현재 에딘버러에 동양인은 드물었으니까.
‘거참, 진짜 동물원 원숭이 보듯이 바라보는군. 런던이면 좀 달랐으려나?’
세계 무대에 도전해 보겠다고 무작정 영국에 왔던 차태성.
여러 번 비행기를 갈아타면서 도착한 곳은 원래 목적지인 런던이 아닌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였다.
여비가 부족해서 일단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중에 가장 싼 것을 잡아탔다가 엉뚱한 곳에 내리게 되었던 것.
물론 기차를 타면 런던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마 없었기에, 일단 에딘버러라는 도시에서 자리를 잡기로 했다.
‘뭐, 여기도 축구팀이 있으니까 굳이 런던까지 갈 필요가 없을지도?’
이 동네 사람들에게 들으니 하이버니언, 그리고 미들로시언의 심장이란 이상한 이름의 팀들이 있었다.
거기다 영국인들이 이곳 에딘버러에 와서 뛰어난 선수들을 잘 영입해 간다니, 여기서 열심히 하면 풋볼 리그에서 뛸 기회가 생길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급한 건 입단이 아니라 생계지만.’
다행히 직장은 구했다.
하숙집 주인의 남편이 에딘버러 동물원에서 사육사로 일하고 있는데, 일거리를 찾는 태성을 조수로 받아 주었던 것.
동물들 먹이만 챙겨 주면 되겠구나 싶었던 태성은 엄청난 일거리에 치를 떨었다.
매일 우리를 청소하고 동물들의 분변을 치워야 하는데,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
특히 코끼리는 진짜 무지막지하게 싸 놓곤 했다.
‘오늘은 부디 치울 것이 적기를!’
그리 기원하며 동물원에 들어간 태성.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소장과 사육사들이 다들 긴장해 있었고, 경찰이 와서 조사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사고라도 터진 듯했다.
***
본문에 언급된 하이버니언 FC는 스코틀랜드 리그의 터줏대감인 레인저스 FC, 셀틱 FC에 이어 우승을 많이 한 팀입니다.
하이버니언의 에딘버러 더비 상대가 하트 오브 미들로시언 FC라는 팀인데, 1950년대가 전성기였던 팀이었죠.
근데 정작 에딘버러에서는 럭비가 인기가 많아, 글래스고의 레인저스나 셀틱에 비해 성원을 받지 못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