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16. 도깨비 팀
한국에 다녀오고 한동안 여독을 풀었던 준영.
그는 1월 24일 카디프 시티 FC와의 FA컵 4라운드 경기부터 다시 출전했다.
“이겨라, 유나이티드!”
“파랑새(* 카디프 시티의 별명)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
나날이 숫자를 늘려 가는 맨유의 서포터, ‘12번째 선수들’이 응원을 진두지휘하는 가운데, 맨유는 전반 5분 만에 손쉽게 선제골을 터트렸다.
바비 찰튼이 수비수를 유인하며 슬쩍 흘려 준 공을 존 레논이 과감하게 슛, 그물을 흔들었다.
기선 제압에 성공한 맨유는 이후에도 계속 공을 점유하며 경기를 주도해 나갔다.
「맨유의 수비수 조 캐롤런, 침착하게 공을 끊어 냈습니다. 이것을 전진해 가는 캡틴 리에게 패스, 태클이 들어오지만 리는 능숙하게 피해 냅니다.」
가벼운 턴 동작으로 상대 태클을 피해 낸 준영은 알버트 퀵솔의 움직임에 맞춰 스루패스를 찔러 주었다.
슬쩍 돌아 들어가면서 오프사이드를 피해 낸 퀵솔은 측면에서 컷백, 중앙에서 쇄도하던 숀 코너리가 이를 받아 가볍게 골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전반 24분에 터진 이 추가 골로 맨유는 한층 여유롭게 경기를 주도하며 전반전을 끝냈다.
만회 골이 다급했던 카디프는 후반전이 되자 맹공에 나섰다.
카디프의 주포 조셉 본슨은 지난 시즌 아스날에서 뛰었던 데릭 탭스콧과 웨일스 국가대표 공격수 론 휴이트와 패스를 주고받으며 맨유 골문을 노렸다.
하지만 이준영이 조율하는 맨유 수비진은 매우 견고했다.
페널티 박스 안에선 이렇다 할 기회를 잡지 못했고, 외곽에서 쏜 중거리 슛은 죄다 해리 그렉에게 막혔다.
「해리 그렉이 공을 잡아 로니 코프에게 던져 줍니다. 로니는 바비 찰튼에게… 유나이티드가 역습을 빠르게 전개하는데요?」
왠지 세 번째 골이 터질 느낌.
라디오 중계 캐스터가 예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흐트러진 카디프 수비 라인 사이로 바비의 패스가 찔러 들어가는 가운데, 맨유의 측면 공격수 워렌 브래들리가 이를 잡아챘다.
그리고 워렌은 달려 나오는 골키퍼 다리 사이로 슈팅을 때려 골대를 흔들었다.
「골! 3 대 0입니다! 오늘도 붉은 악마는 무자비하게 상대를 때려눕히고 있습니다!」
3골 차까지 벌어지자, 카디프의 맹공도 힘을 잃고 말았다.
결국 시합은 3 대 0으로 종료, 맨유는 2월에 열리는 FA컵 5라운드 진출을 확정 지었다.
기분 좋게 시합을 마친 맨유 선수들은 단골 클럽으로 가서 축배를 들었다.
“오늘은 좀 신기하군.”
“뭐가 신기하다는 거죠, 주장? 설마 2부 리그 중위권 팀에게 질 거라 생각했어요?”
조 캐롤런의 말에 고개를 저은 준영은 오늘 득점을 한 선수들을 가리켰다.
“레논은 축구 하면서 밴드를 하고, 숀 형은 연극을 하지. 여기의 워렌은 파트타임으로 교편을 잡고 있잖아.”
“오, 그러고 보니…….”
작년 11월에 계약한 워렌 브래들리는 상당한 고학력자였다.
그는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더럼 대학교의 햇필드 칼리지를 나왔다.
공부를 하면서 아마추어 축구 클럽에서 활동했는데, 이미 그쪽에서도 소문난 실력자였다.
‘이 꽉 물고 축구만 했으면 어떨까 싶기도 한데…….’
사실 부업을 가진 선수가 드문 것도 아니다.
준영도 사업을 하고 있고, 축구를 하면서 크리켓 선수로 활동하는 이들도 꽤 된다.
하지만 보통 부업을 하는 이유가 생계 때문인데, 오늘 골을 넣은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가수도, 배우도, 교사도 모두 본인들이 좋아서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 점은 사업을 하는 준영도 마찬가지였다.
“아 참, 주장, 지난번 학력 인증 시험은 어떻게 됐어요? 1월 중에 발표가 났을 텐데?”
“아, 그거…….”
준영은 작년 11월 말에 학력 인증 시험을 쳤다.
원래는 첫 시험이니 문제 수준이 대강 어떤지 파악할 목적으로 부담 없이 쳐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허락 없이 리즈와 연애 진도를 나간 바람에 알버트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되었다.
그 때문에 테스트 삼아 치를 생각이었던 시험을 진지하게 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제 더럽게 어렵더만. 난 쫄딱 망한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다행히 합격 커트라인은 넘었어.”
“오, 잘됐네요!”
물어본 레논을 비롯해 동료들이 다들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었다.
“끝난 거 아냐. 이제 시작이라고.”
“어? 그럼……?”
“대입 시험 쳐야 돼. 대학 입학할 정도의 학력은 되어야 남작 어르신의 성에 찰 것 같더라.”
“거참, 연애하기 쉽지 않군요.”
학력 관련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문득 윌리엄 터너의 일이 떠올랐다.
터너는 청계천에서 겪었던 일이 쉬이 지워지지 않았던지, 귀국하고도 한동안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내팽개쳤던 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제 아버지하고 연락했어. 기숙학교로 다시 돌아갈 거라고 이야기했지.’
세상엔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저 동정이 아닌, 제대로 그들을 돕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그래서 2월부터 공장은 그만둘 거라면서, 부하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신부님, 드디어 길을 정하셨군요.’
곧 터너와 이별할 것을 생각하니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가 방황을 끝냈다는 점은 반가웠다.
‘앞으로 내가 아는 대로 신부님이 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되기를 기원할게요.’
1월 마지막 날에 뉴캐슬과 리그 27라운드 경기가 있다.
준영은 그 경기는 반드시 이기기로 마음먹었다.
열성 팬에게 선수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승리.
그러므로 터너에게도 작별 선물로 승리를 보여 주기로 했다.
***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지난 시즌 19위에 턱걸이하면서 간신히 강등을 면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맨유에게 무를 먹여 주고, 2위인 울버햄프턴에게 3 대 1 승리를 따낼 정도로 도깨비 같은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맨유는 전력 분석팀들을 총동원해서 뉴캐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선수들에게 알려 주었다.
준영은 집에 와서도 따로 정리해 둔 정보들을 복습했다.
“수비수 알프 맥마이클은 레프트백으로는 영국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받고 있다고 했지.”
피지컬이 좋고 파워 넘치는 플레이를 하는 딕 키스와 제임스 스쿨라도 인상적.
수비수뿐만 아니라 공격진도 만만찮았다.
1954-55 시즌 뉴캐슬에게 FA컵 우승을 안겨 준 주역 레너드 화이트는 여전히 뛰어난 득점력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웨일스의 골든 보이 아이버 올처치도 요주의 대상.
스웨덴 월드컵에서 매직 마자르를 격침시킨 그는 레너드 화이트에 이어 팀에서 두 번째로 많은 득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해 영입된 외국인 선수가 있다고 했지.”
고스와미 추니.
본명은 슈비말 고스와미로, 콜카타에서 온 인도 선수였다.
그는 아시아 선수가 영국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풋볼 리그에 도전하게 되었다고.
영국에 와서 토트넘이나 몇몇 구단의 테스트를 받다가 지난 12월에 뉴캐슬 구단에 입단하게 되었단다.
‘과정을 보면 일본 녀석들과 비슷해 보이긴 한데, 실력은 있는 놈이란 말이지.’
1월 3일 데뷔전인 에버튼전에서 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후 토트넘과의 경기에서 팀은 패하긴 했지만, 추니 본인은 데뷔 골을 넣었다.
FA컵 첼시전에서도 측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공격수들에게 좋은 패스를 넣어 주었다고 한다.
‘신기하군. 이 시절 아시아에서 풋볼 리그, 그것도 1부에서 활약할 만한 실력자가 있다니!’
그것도 인도 선수란다.
21세기의 인도는 FIFA 랭킹 100위권을 들락날락하는 축구 변방 국가였기에 준영은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 시절 인도 축구는 잘나갔었나?’
아무튼 방심하면 안 된다.
지난번에 무를 캤는데, 이번에 홈에서도 무를 먹거나 패배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빌리 라이트가 이끄는 울버햄프턴이 호시탐탐 1위 자리를 노리고 있으니까.
거기다 터너에게 좋은 작별 선물을 해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승리를 따내야 했다.
***
윌리엄 터너는 여느 때처럼 레플리카를 입고 올드 트래퍼드를 찾았다.
하지만 서포터들은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어이, 터너, 무슨 일 있어?”
“이제 한동안 경기장 응원은 못할 것 같아서요.”
터너가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해 주자, 나이 많은 아저씨들은 그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잘 생각했어. 더 늦기 전에 공부를 해야지. 안 그러면 저기 잭 녀석처럼 평생 기름밥이나 먹게 될 테니까.”
“뭐? 자네, 지금 자동차 정비공 무시하나?”
아웅다웅하면서도 자신의 미래를 응원해 주는 동지들의 모습에 터너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필드로 선수들이 입장했다.
붉은 저지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검은 줄무늬의 뉴캐슬 유나이티드.
양 팀이 진영을 정하고 포진을 끝내자, 심판이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을 길게 불었다.
“이겨라, 맨체스터!”
“우리는 영국 최강~ 그리고 유럽 최강의 붉은 악마~!”
터너와 서포터들이 소리 높여 응원하는 사이, 맨유는 초반부터 매우 좋은 기회를 잡았다.
알버트 스캔론이 기습적으로 찬 슈팅이 골키퍼의 손에 맞고 골대 위로 넘어간 것.
코너킥 기회가 오자, 준영은 곧장 상대 페널티 박스로 들어갔다.
“때려 박아, 리틀 존!”
“뉴캐슬 꼬마들을 납작하게 눌러 주라고!”
서포터들의 성원을 받은 준영은 던컨이 올린 코너킥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공은 그의 머리에 닿지 못했다.
상대 수비수 딕 키스가 양팔로 준영을 붙잡고 늘어졌기 때문.
“반칙이다!”
“이건 페널티킥감이라고!”
아우성을 치던 맨유 서포터들은 심판이 휘슬을 불며 페널티킥 스폿을 가리키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초반부터 아주 좋은 찬스를 얻게 되었으니까.
“키커는 누가 나오려나?”
“앗, 바비 찰튼이 차려나 봐.”
이번 시즌 맨유의 득점 1위.
바비는 골키퍼를 완전히 속이며 득점을 얻어 냈다.
이로써 맨유는 이른 시간에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
“실망하지 마. 이제 경기 초반일 뿐이야.”
뉴캐슬의 주장 제임스 스쿨라는 시무룩해진 팀원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이에 제일 먼저 호응한 이는 고스와미 추니.
미드필드 지역에서 조지 이스트햄의 패스를 받은 추니는 맨유의 풀백 조 캐롤런을 제치고 박스 안으로 들어왔다.
‘빠르다. 거기다 굉장히 날카로워!’
빌 포크스가 황급히 마크에 나서는 순간, 추니의 발에 있던 공은 중앙에서 쇄도하던 아이버 올처치 쪽으로 흘러갔다.
아이버가 논스톱으로 때린 슈팅은 준영의 발을 맞고 골대 밖으로 흘러 나갔다.
‘휴, 위험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준영은 이후 뉴캐슬의 코너킥 공격에 대비했다.
공이 날아오자 뉴캐슬의 간판 공격수 레너드 화이트가 외곽으로 나가 살짝 짧게 들어온 코너킥을 헤딩으로 돌려놓았다.
그렇게 만든 기회를 중원에 있던 조지 이스트햄이 달려들며 슛!
옆 그물을 세게 때린 슈팅에 관중석에서 우려와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상당히 잘하는군.”
경기를 지켜보던 맷 버스비 감독은 뉴캐슬 선수들의 매서운 반격에 감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의문이 들었다.
‘왜 저 정도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을 보유한 팀이 성적은 저조한 거지?’
절대 중하위권에서 빌빌거릴 스쿼드는 아니다.
도대체 저 팀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
고스와미 추니(1938~2020)는 1950~60년대 인도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레전드 플레이어입니다.
추니라는 이름은 뱅골어로 ‘루비’라는 뜻인데, 그만큼 당시 인도 사람들이 그의 플레이를 얼마나 대단하게 여겼는지 알 만합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 출전하고,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에서 우리나라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따는 데 공헌하며 아시아 최고 선수로 인정받았죠.
이 당시에 실제로 토트넘 핫스퍼의 오퍼를 받았지만, 가족들과 고향에서 지내기를 원해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크게 후회했다고 하는군요. ^^;;
이 시기에 인도 축구가 진짜 잘나가던 시절이라, 로마 올림픽에서도 프랑스가 하마터면 인도에게 발목이 잡혀 조 예선에서 광탈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인도 축구협회는 FIFA와 척을 지면서 1980년대까지 월드컵 예선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바람에 잘나가던 인도 축구도 쇠락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