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15화 (215/400)

Round 215. 명예의 전당을 향하여

조윤옥이 이적할 팀은 올덤 애슬레틱 AFC로 결정되었다.

현재 올덤은 공격수들이 부상으로 이탈했거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닌 상황이었다.

덕분에 성적도 썩 좋지 않았다.

구단 임원들과 코칭스태프 모두 보강을 원하고 있었고, 윤옥의 기량에도 많은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팀들보다 먼저 윤옥에게 연락을 취하며 적극적으로 영입 의사를 보였다.

“근데 그 기대감의 지분에 내가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 같아.”

“그렇겠죠. 제가 감독이라도 월드 클래스 선수가 직접 지도하는 제자에 관심이 갈 겁니다.”

프레드로 저택을 찾아온 조셉 포스터는 준영의 이야기를 듣고 동감했다.

당사자보다 그 뒤에 있는 후견인이나 배경을 보고 선택하는 일이 사업에서도 흔하게 있으니까.

“그래도 중요한 건 본인의 기량이죠. 조가 기대감을 충족시킬 만한 실력을 발휘한다면 새로운 팀에서 자리 잡는 데 문제없을 겁니다.”

“맞는 말이야. 다만 축구 외적으로 흔들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준영은 작년 9월의 소동을 떠올렸다.

다행히 현재는 레이시스트들의 활동이 주춤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그 소동과 노팅힐 폭동이 차별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키웠다.

그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이번 겨울에도 풋볼 리그에 새로 외국인 선수들이 제법 많이 늘었다.

준영과 같은 아시아 출신, 인도나 홍콩, 자유중국 국적의 선수를 영입한 팀도 있었고, 카리브나 아프리카에서 선수를 데려온 팀들도 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건 역시 리버풀 FC.

지난 월드컵 신인상을 받은 펠레의 경이적인 활약은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었다.

“데니도 지난 10월에 그 녀석에게 크게 한 방 먹었지.”

“허더스필드 타운의 데니스 로 말이죠?”

“응, 2월에 리버풀과의 리턴 매치 때는 갚아 주겠다며 벼르고 있더라고.”

그래서 최근에 준영을 찾아와서 지도를 받고 있었다.

조윤옥과는 안면을 트고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지만, 알렉스 퍼거슨과는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댔다.

“근데 데니 군 정도 실력이면 유나이티드에서 통하지 않습니까? 다른 데서 채 가기 전에 데려오는 게 좋을 텐데요.”

“그게, 우리 팀에 공격수가 아쉬운 건 아니라서. 무엇보다 허더스필드 구단이 욕심이 많아. 데니의 이적료를 꽤 높게 부를 모양이더군.”

“역시 돈이 문제군요.”

잠시 홍삼차로 입을 축인 조셉은 자신이 오늘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상품 생산과 판매는 순조로워요. 다만 최근에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죠.”

무슨 고민거리일까?

혹시 실제 역사에서 나2키의 창업자들과 상표 특허 문제로 맞붙기라도 한 걸까?

“얼마 전 런던에 가서 메리 퀀트라는 디자이너를 만났어요. 꽤 실력 있는 사람이라 새로운 스포츠 웨어나 패션 의류의 디자인을 맡겼는데…….”

“왜? 영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드는 건 아닌데, 좀 선을 넘었다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러면서 조셉은 가방에서 메리 퀀트가 그린 의상 일러스트를 꺼내 보여 주었다.

그 일러스트를 본 준영은 굉장히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

“미니스커트로군.”

“미니… 스커트? 뭐, 그렇게 부르면 딱 맞을 겁니다. 치마 길이가 너무 짧으니까요.”

준영이 보기에 그리 짧은 건 아니었다. 스커트 길이가 무릎에서 약간 위쪽에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이 시대 사람들에겐 매우 파격적인 길이임엔 분명했다.

“과연 이런 치마를 입을 여성들이 있을까 싶어요. 아니, 사회적으로 용인할지…….”

“여자 테니스 선수나 농구 선수들 유니폼도 이만큼 짧잖아.”

“그거야 코트에서만 입는 거잖아요. 길거리에서도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여성들은 없어요.”

조셉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준영은 자신도 틀리지는 않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미니스커트는 다가올 60년대 히트 상품으로 자신도 낙점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실제 역사가 증명했다.

“파격적이지만, 분명히 히트 칠 거라고 생각해.”

“예? 어째서요?”

“여성의 해방과 자유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높아질 테니까.”

2차 대전으로 젊은 남자들이 많이 죽고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가부장적인 문화가 대두되었다.

‘버릇없는 여자는 맞아야 해. 물론 남자들 패듯이 때리면 안 되지만.’

이렇게 21세기에 했다면 곧장 비난받을 만한 발언들이 공공연히 나오는 판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언제까지 억눌려 있을 리 만무했다.

전쟁의 기억이 희미한 1940년대 출생 여성들은 더더욱 그랬다.

여성 인권 향상을 부르짖는 외침은 19세기부터 꾸준히 있었다.

두 차례 전쟁으로 주춤하긴 했지만, 오히려 전쟁을 계기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부쩍 늘어났다.

“조셉, 너 코코 샤넬 알지?”

“네, 메종 샤넬의 설립자인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 아닙니까.”

“그래, 그 여자가 1차 대전 이후에 디자인한 옷을 생각해 봐.”

모자의 챙은 작아졌고, 소매는 짧아지거나 없어졌으며, 치마 길이도 이전에 비해 줄었다.

거기다 코르셋을 비롯해 이전에는 여성들을 거추장스럽게 했던 것들도 사라졌다.

“그게 바깥 활동을 하거나 공장에서 일하는 데 편하려고 그렇게 바뀐 거야. 여자들은 그 스타일을 해방의 상징으로 여기고 입고 다닌 거고.”

“그와 같은 변혁이 또 온다는 겁니까? 짧은 치마가 가부장 문화를 타도하는 상징이 되고요?”

“장담하는데, 20년 안에 길거리에 배꼽 내놓고 다니는 여자들이 나올 거다. 비키니 같은 게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조셉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다른 안목을 가진 준영의 말이니 믿어야겠지만, 설마 그 정도로 자유분방해지는 건 쉬 상상하기 힘들었다.

“조셉, 사회적인 용인이나 파란은 걱정하지 마. 훌라후프도 시끄러웠지만 잘 팔렸잖아.”

“물론 그랬지만……. 운동 기구와 의상의 경우를 같이 봐도 괜찮은 걸까요?”

“옷이나 기구나 어차피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이잖아. 시끄러우면 오히려 좋지. 그만큼 주목을 받을 수 있으니까.”

확실히 노이즈 마케팅의 위력은 뛰어나다.

조셉도 결국 준영의 말에 수긍했지만, 당장 미니스커트 같은 상품을 내놓을 배짱은 아직 없었다.

“일단 준비는 해 놓겠습니다.”

“그래, 혹시 견본 만들면 보내 줘. 우리 여왕님께 선물하게.”

“리즈 양이 맘에 들어 할까요?”

“내가 좋아하면 받아 줄 거야.”

남들 앞에서는 몰라도 둘만 있을 때라면 리즈도 미래의 의상을 입어 주지 않을까.

‘기왕이면 오피스 룩으로 만들어 달랠까? 아무래도 슬릿이 있는 편이 더…….’

엉큼하게 기대감을 부풀리는 준영.

그는 조셉이 떨떠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

모즐리 서쪽에는 드넓은 목초지들이 펼쳐져 있었다.

띄엄띄엄 목장들이 자리한 이곳에는 석 달 전에 준영이 매입한 2층 집이 있었다.

작년에 파산한 어떤 사업가가 내놓은 별장.

중세식의 고풍스러운 모양새와 다르게 내부 설비는 현대식으로 수리되었고, 기본적인 가구와 집기도 모두 갖추어져 당장 살아도 문제가 없었다.

“이거 이제 어쩌죠?”

리즈가 난감한 표정으로 집을 바라보았다.

이 집은 준영이 저택에서 쫓겨날 것을 대비해서 샀다.

당시에 할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도를 나가 버렸기에, 리즈도 따로 몰래 짐을 싸 둘 정도로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며칠 불편한 심기를 보였을 뿐, 준영에게 나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쩌긴, 원래 별장이었잖아. 그럼 별장처럼 쓰면 되는 거야.”

모즐리에서 걸어도 2~3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다.

그러니 관리에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둘만의 공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해.”

“하긴, 저택은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준영이 슬쩍 끌어안자, 리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시선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연달아 입을 맞추며 서로의 숨결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달콤하게 분위기가 달아오르려는 순간, 갑자기 자전거를 탄 집배원이 별장 앞에 나타났다.

“존 Y. 리 씨 맞죠?”

“예, 그런데요.”

준영과 리즈는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집배원을 째려보았다.

눈치 없는 집배원은 가방을 뒤지다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거 프레드로 저택으로 발송해 달라고 했을 텐데…….”

“수령 확인 사인이 필요해서요. 저택 고용인이 여기 계실 거라고 하더군요.”

나도 귀찮게 여기까지 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의 집배원은 준영의 서명을 받자마자 냉큼 떠났다.

“그건 뭐예요?”

“아, 맨체스터의 공인중개사에게 의뢰한 게 있었어.”

봉투를 찢은 준영은 안에 든 서류를 살펴보다 별장 서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목장을 가리켰다.

“저기 주인이 목장 운영을 관둔 지 몇 년이 되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목장과 주변 토지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지.”

“목장은 왜요? 혹시 식품 회사에 필요한 식재를 생산해서 조달하려고요?”

미스터리 푸드는 요즘 정말 잘나가고 있었다.

라면과 빼빼Ro뿐만 아니라, 드레싱 소스와 마요네즈 등 여러 가지 식료품들도 소비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작년 말에는 두부 통조림도 출시했는데, 채식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스팸에 질린 일반인들도 그 부드럽고 담백한 식감을 좋아했다.

아무튼 이렇다 보니 상품 생산을 위한 식재 확보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목장 하나 매입한다고 식품 생산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아. 저긴 클럽 하우스로 쓸 거야.”

“클럽 하우스? 사교 목적의 시설을 지으려는 거예요?”

보통 클럽 하우스는 골프나 승마 등을 즐기는 이들이 모여서 운동도 하고 휴식과 식사, 담소를 즐기는 곳이다.

그래서 리즈도 준영이 사업적인 의도에서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냐. 내가 지으려는 클럽 하우스는 맨체스터 구단 선수들이 사용할 거야. 보다 전문적인 숙소 및 훈련장이라고 할까.”

기존에 맨유의 숙소나 훈련장이 있긴 하지만, 시설이 썩 좋은 편은 못 되었다.

거기다 그 주변은 시끄러운 데다 유흥 업체들이 많았다.

이에 준영은 훈련과 재활에 전념할 수 있는 클럽 하우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21세기 수준의 첨단 시설은 기대할 수 없지만, 이 시대 기준에서 가능한 시설은 모두 갖춰 놓을 생각이었다.

이미 하드먼 회장이나 맷 버스비 감독과도 논의를 했고, 흔쾌히 허락을 얻어 냈다.

“그동안 비용이나 부지 선정 문제로 미루고 있었는데, 이제 진행해 보려고.”

“후배 선수들이 무척 좋아하겠네요.”

“글쎄, 놀지도 못하게 수용소에 가둬 둔다고 원망할지도 모르지.”

어쨌든 완공되면 자신의 이름이 남게 될 것이다.

단순히 우승컵을 안겨 준 에이스일 뿐만 아니라, 제대로 축구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준 선각자로.

‘레전드라도 품격이 다른 레전드가 되는 거야.’

이미 충분히 이름을 남길 만한 활약을 했지만, 준영은 거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준영은 자신의 이름을 굵고 뚜렷하게 남겨 놓고 싶었다.

‘축구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거론되는 사람이 되는 거야. 기왕이면 한국과 영국 두 나라 축구의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는 인물로!’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

꾸준히 활약하며 지금처럼 차근차근 업적을 쌓아 가면 명예의 전당에 골인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미니스커트가 일상에 나타난 건 1964년부터였습니다.

메리 퀀트 이전,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에도 앙드레 꾸레주나 존 베이츠 같은 디자이너들이 치마가 짧은 디자인을 선보인 적이 있었죠.

메리 퀀트가 시초로 여겨진 건, 단지 디자인으로 그친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입고 다니며 착용을 권유했기 때문입니다.

활동하기 훨씬 편하고, 시시콜콜한 규범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이죠.

실제로 미니스커트가 인기를 얻을 즈음에는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이전보다 부쩍 늘어난 시점이기도 했죠.

하지만 당시 기성세대들은 혼비백산했고, 가톨릭과 이슬람에서는 사이좋게 이에 대한 비판을 퍼부었지요.

우리나라도 규제를 했지만, 실제 법적으로 금지한 나라들도 꽤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19세기의 억압에서 탈피하는 스타일을 선보인 코코 샤넬도 미니스커트가 역겹다고 비판을 했다는 겁니다.

한때 혁신을 선보인 사람도 나이가 들면 꼰대가 된다는 걸 보여 주는 사례일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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