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13. 다시 영국으로
드넓고 황량한 벌판.
듬성듬성 자리 잡은 초가집과 수확을 마친 채소밭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교외의 한적한 농촌.
하지만 준영은 이 땅을 금싸라기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잠실이란 곳이야?”
앤지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이래도 미래에는 손꼽히는 부촌이 될 거야. 올림픽 주경기장도 들어설 거고.”
“21세기까지 기다리려면 수십 년은 더 있어야겠네.”
“70년대 중반부터 개발이 시작되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아.”
서울은 계속 커질 것이고, 강남으로의 진출은 필수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준영은 미래의 금싸라기 땅들을 사 두었다.
매입은 미스터리 푸드 한국 지사나 승리제화 법인 명의로 했다.
사들인 땅은 현재 라면 공장이나 서울의 시장에 납품하는 식자재 생산을 위한 농장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억관이 데려온 가난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나 상이용사들이었다.
준영은 일단 그들이 안정된 생활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해 주고, 열심히 일한 성과에 따라 회사 주식이나 토지를 일부 양도해 줄 생각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짜증 나고 듣기 싫은 소리가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라는 말이었지. 내가 바꾼 세계에선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할 거야.”
“그리고 ‘독립 유공자 후손들 부자 만들어 준 사람’이라는 명예를 차지하겠다는 거군요.”
리즈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전드라면 여러모로 이름을 남기는 게 좋잖아?”
“오빠야는 욕심이 참 많은 것 같아. 하지만 그건 좋은 욕심 같아.”
“고맙다, 카린.”
사실 한국 역사에서 암울하고 힘든 시기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지금은 여러 가지 기회가 열려 있는 시기였다.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가들도 다들 이 시기에 두각을 보이며 이후 산업화의 단물을 먹고 성장을 하게 된다.
준영도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땅뿐만 아니라, 미래에 이름을 날리는 대기업들의 주식도 매입해 두었다.
“형부, 혹시 영국에도 사 둘 만한 부동산을 알아?”
앤지의 물음에 준영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알지. 런던의 노팅힐이 장래성이 있는 곳이야.”
“거긴 빈민촌 아냐? 폭동까지 일어난 곳일 텐데?”
“그렇지만 미래엔 아주 매력적인 관광지가 되는 동네야.”
오전에 잠실을 둘러본 준영 일행은 호텔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한국에서의 일정이 다 끝났기에, 오후에는 비행기를 타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
서울 공항.
준영 일행이 타고 온 컨스텔레이션에 화물이 차곡차곡 실렸다.
대부분이 영국의 지인들에게 줄 선물들이었다.
‘홍삼에 대추, 곶감… 화문석에 나전칠기, 노리개와 도자기, 방짜 유기……. 아저씨가 참 세심하게 준비해 주셨군.’
이억관이 챙겨 준 것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이 사적으로 챙겨 준 선물들도 있었다.
화물 목록을 살펴보던 준영에게 기장이 다가와 비행 스케줄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그것을 본 준영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왔던 길로 가지 않는 겁니까?”
“예, 남회 노선이 멀긴 해도 가장 안전하고 익숙한 항로라서 올 때는 그쪽으로 온 겁니다. 하지만 돌아갈 때는 북극 항로로 갈 겁니다.”
이 항로는 유럽에서 그린란드 상공을 지나 알레스카의 앵커리지를 거쳐 도쿄로 연결이 된다고 했다.
“컨스텔레이션의 항속 거리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해요. 앵커리지를 제외하면 마땅히 쉬어 갈 경유지가 없긴 하지만, 남회 노선보다는 빠릅니다.”
“그렇군요. 근데 이거 잘못하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 아닙니까?”
“염려 마십쇼. 저나 부기장 모두 북극 항로 운행 경험이 있으니까요.”
전문가가 그리 말하니 믿고 맡기기로 했다.
출발 준비를 하는 사이, 준영은 배웅을 나온 이들을 찾아갔다.
“지난번에 있었던 일은 그리 걱정하지 마. 논란이 되어 좋을 게 없다고 하니 만송 선생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더군.”
곽영주는 마치 ‘나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으스댔다.
“신세를 졌습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대신 다음에 만송 선생을 만나면 말이 심했다는 식으로 사과는 드려.”
과연 다음에 또 만날 일이 있을지?
곽영주와 인사를 마친 준영은 대한축구협회장 김윤기와 김화집, 그리고 최정민 등 배웅 나온 축구인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아우님, 김용식 선생님 잘 좀 부탁할게.”
“예, 너무 걱정 마십쇼.”
김용식은 이번에 준영을 따라서 영국에 지도자 연수를 다녀오기로 했다.
준영에게 들은 것으론 성이 차지 않았던지, 선진 축구를 직접 접해 보고 어떤 식으로 선수를 가르치고 육성하는지 보고자 했던 것.
‘내가 알려 준 것과 차이가 있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려나?’
8인제 축구나 21세기식의 체력 훈련 방식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모즐리 AFC에서 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이쪽에서는 한국 혹은 동양에서 생겨난 훈련 방식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까짓것 나중에 물으면 내가 고안했다고 하지, 뭐. 젊은 놈이 생각해 낸 방법이라고 하면 탐탁잖아 할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 되잖아.’
축구인들과 인사를 마친 준영은 마지막으로 이억관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청계천 이재민들 문제는 너무 걱정하지 마. 유일한 회장님이나 이명철 회장도 도와준다고 약속했으니까.”
“죄송해요. 아저씨껜 매번 일거리를 드리기만 하니…….”
“됐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잖아. 준영이 자네는 계속 축구나 열심히 하라고. 자네한테 기대하고 희망을 품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아저씨도 항상 건강하게 지내세요.”
두 사람은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약하며 굳게 악수를 나눈 후 헤어졌다.
“잘 가요, 이준영 선수!”
“다음에 또 오십쇼!”
“항상 응원할게요!”
일반 시민들도 서울 공항 활주로까지 찾아와 준영을 배웅했다.
곽영주가 어느 정도 동원하기는 했지만, 실제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경찰과 군인들이 통제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발걸음을 멈춘 준영은 그들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자신을 진심으로 환영해 주고 성원해 주는 저들 앞에는 이제 크나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폭정에 대항하고 산업화의 역군으로 피땀을 흘릴 저들에게 작게나마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나는 저들이 쌓은 터전에서 자랐다. 저들이 흘린 피땀 덕분에 21세기의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었지.’
어느 제3세계 국가의 아이들처럼 공장에서 축구공을 꿰매지 않아도 되었다.
질병과 기아로 고통을 받거나, 흙바닥에서 맨발로 공을 차는 일도 없었다.
그랬기에 준영은 저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저들에게 더 큰 희망을 주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터전을 만들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다 같이 힘냅시다, 여러분! 다음에 또 봐요!”
힘차게 외치며 손을 흔들어 준 준영은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제 다시 자신의 전장으로, 필드로 돌아가기 위해서.
***
1959년 1월 15일.
잉글랜드 중서부 우스터에 자리한 세인트 조지 레인 경기장에서는 1958-59 시즌 FA컵 3라운드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홈팀인 우스터 시티 FC의 상대는 2부 리그의 강호 리버풀 FC.
새하얗게 눈이 내린 경기장에 모여든 15,000여 명의 팬들은 쉬지 않고 양 팀 선수들을 응원했다.
“달려! 끝까지 뛰라고!”
“포기하지 마. 이길 수 있어!”
우스터 시티의 홈인 만큼, 그들을 응원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런 성원에 힘입어 우스터는 전반 8분, 18세의 소년 공격수 토미 스쿠스가 터트린 골로 앞서 나갔다.
하지만 이 경기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우! 우우-!”
리버풀의 흑인 소년 공격수가 공을 잡자, 관중석에서 거센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것은 인종 차별적인 조롱이 아니었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제길, 저 흑인 애송이를 또 놓쳤어!”
“정신 차려, 윌콕스!”
홈팬들은 윌콕스를 비롯한 수비수들을 질책했지만, 그들이라고 딱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거칠게 차징도 하고 태클도 날려 봤지만, 문제의 흑인 애송이는 마치 자신들을 가지고 놀듯이 제쳐 버렸다.
그러고는 달려 나온 골키퍼까지 농락하며 골대에 공을 밀어 넣었다.
선제골이 터진 지 겨우 2분 만에 나온 동점 골.
우스터 시티 선수들은 충격보다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낙담 어린 수긍을 보였다.
사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리버풀의 공격을 선도하고 있는 이 흑인 소년은 지난 월드컵 최우수 신인상을 받은 천재였으니까.
“잘했다, 펠레!”
“역시 넌 최강이야!”
알란 아코트를 비롯해 리버풀 선수들이 골을 넣은 펠레를 부둥켜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 시즌, 아니 리버풀 역대 최고의 영입.
그렇게 평가받을 정도로 펠레는 입단 후 무시무시한 활약을 펼쳐 보였다.
마치 출근 도장을 찍기라도 하듯, 매 경기마다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한 것!
흑인 선수라고 탐탁지 않아 하던 무리조차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플레이에 열광하고 있었다.
“이따가 역전 골도 부탁한다.”
“훗, 맡겨만 둬요. 5분 안에 뒤집어 놓을 테니까.”
장담한 대로 펠레는 5분 후, 측면에서 존 휠러가 올려 준 크로스를 멋진 바이시클 킥으로 골대에 박아 넣었다.
경악한 우스터 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리버풀의 감독 빌 섕클리는 어린애처럼 방방 뛰었다.
“캬아∼ 기가 막힌다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이구만!”
“가, 감독님, 기분은 알지만 진정하시죠.”
코치인 밥 페이즐리가 만류하지 않았다면 섕클리는 그대로 필드로 뛰어가 펠레의 뺨에 뽀뽀를 했을지 모른다.
“하아… 저 바이시클 킥을 보자니 존 생각이 나는군.”
“유나이티드의 캡틴 리요?”
“그래, 자네도 알다시피 대단한 녀석이지.”
불의의 사고로 파멸에 가까운 형편에 놓인 팀을 유러피언 컵 정상에 올려놓은 녀석.
잉글랜드 대표가 되어 축구 종가가 원했던 우승컵을 안겨 준 놈.
이제 그를 ‘캡틴 리’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아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캡틴(Captain)이라는 단어엔 ‘최고’라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
즉, 다들 그를 잉글랜드, 아니 유럽 최고 플레이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 친구 얘기는 펠레 앞에서 하지 마세요. 펠레 저 녀석, 캡틴 리나 바비 찰튼 이름이 나오면 아주 눈에 쌍심지를 켜더라고요.”
“그놈들 때문에 쥘리메컵을 들지 못해서 말인가?”
“네, 우리 팀에 온 것도 절반 이상은 복수심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펠레는 FA컵 경기에는 유달리 공을 들였다.
10일에는 노리치까지 가서 노리치 시티 FC와 맨유의 경기를 관람할 정도였다.
적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 경기, 존 Y. 리가 출전하진 않았을 텐데?”
“예, 하지만 바비 찰튼은 뛰었고, 던컨 에드워즈가 하프백으로 나와서 공수에서 종횡무진 활약을 했죠.”
1골 2어시스트로 승리를 견인한 던컨의 플레이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던지, 펠레는 그가 누군지 따로 물어볼 정도였다.
“이대로 우리와 유나이티드가 순항한다면 언제쯤 격돌할 것 같은가?”
“아마 6라운드, 8강전쯤에서 만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럼 대략 2월 말 아니면 3월 초겠군.”
섕클리는 그날이 기대되었다.
그리고 그 격돌을 누구보다 기대하는 있는 펠레.
그는 다시 골을 넣으며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하지만 여전히 굶주려 있는 젊은 축구 황제는 멈출 줄을 몰랐다.
***
실제 1958-59 시즌 FA컵 3라운드에서는 리버풀과 맨유 둘 다 탈락했습니다. 우스터 시티가 리버풀을 2-1로 이겼고, 노리치 시티는 맨유를 3-0으로 격파했죠.
우스터 시티는 현재 잉글랜드 9부 리그에 있고 당시에도 하위 리그 팀이었기에 리버풀은 이 패배를 역대급 흑역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리버풀을 꺾은 우스터 시티는 모든 힘을 다 썼는지, 4라운드에서 셰필드 유나이티드에게 완패하고 말았죠.
맨유를 이겼던 노리치 시티는 이후 계속 승승장구하면서 4강까지 올라갔습니다.
이때 좋은 성적이 추진력이 되었던지 3부 리그에 머물던 이 팀은 2부로 승격한 후, 1972-73 시즌에 마침내 1부 리그로 올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