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10화 (210/400)

Round 210. 역사의 목격자

청계천 판자촌 앞에 짐을 잔뜩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섰다.

뭔가 싶어 모여들었던 주민들은 구호품이라는 걸 알고는 반색을 했다.

“자자, 차례대로 한 묶음씩 가져가세요.”

“하나만 가져가세요. 이웃한테 양보도 하셔야죠.”

라면 공장 직원들과 함께 구호품을 전달하러 왔던 준영은 판자촌을 둘러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에 와서 이리저리 지날 때마다 보긴 했지만, 가까이 와서 둘러보니 터너에게 들은 대로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이런 데서 어떻게 살지? 이 날씨에 얼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구만.’

엉성하기 짝이 없는 판잣집들과 그보다 더욱 열악한 개미굴의 실태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먹을 것을 챙겨 주는 것도 중하지만, 사는 곳부터 정비해 주지 않으면……. 참 나, 이런 건 나라에서 할 일이잖아. 왜 안 하는 거냐고!’

나라 살림이 어렵기에 힘들다고 하지만, 그 전에 생각이나 의욕이 없는 것 같았다.

자기네 권력이나 이권에 골몰하던 곽영주나 자유당 인사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준영은 터너가 구호품을 들고 빈민들에게 이리저리 나눠 주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승리를 하고 있을 때만큼이나 밝았다.

기쁘고 자랑스럽고, 한편으로 뿌듯한 기분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잘 먹어! 힘내, Boy!”

“미국 아저씨, 고마워요.”

“No. 나 England 사람.”

그새 한국말을 한두 마디 익힌 터너는 자신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꼬맹이들과도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준영이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는 바로 얼굴을 붉혔다.

“뭐,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그냥… 내가 아는 분이랑 좀 닮아서.”

혹시 이번 일이 계기가 되어 터너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원래 세상의 신부님은 어떤 계기로 성직자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화성에도 한 번 다녀와야지. 내가 살던 집이 이 시대에도 있으니까.’

얼마 전까지 일심원이라고 불렸다고 하던가?

아무튼 이억관과 오드리 헵번도 다녀간 적이 있다고 들었다.

‘거길 가도 내 기억에 있는 풍경이나 사람들은 하나도 없겠지. 그래도… 보고 싶어.’

최소한 추억을 더듬어 볼 수는 있으리라.

돌아갈 수 없는 21세기의 고향 집을 그렇게나마 느낄 수 있다면 조금은 그리움을 달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저녁에 호텔로 돌아온 준영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왜 이리 늦었나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말도 마. 21세기 때랑 완전 딴판이더라니까.”

침대 위에서 리즈의 무릎을 베고 누웠던 준영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21세기에 있을 때 대표팀 동료가 청계천에서 여친이랑 찍어 보낸 사진과 오늘 같은 장소를 찍은 사진을 번갈아 보여 주었다.

준영의 염장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던 커플이 데이트한 코스에는 현재 누더기 같은 판잣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세상에, 정말 같은 곳이 맞아요?”

“믿어지지 않지? 근데 지금 현실이 이렇더란 말이지.”

분명히 바뀌고 발전해 가겠지만, 당장 형편이 어려운 빈민들을 보자니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다음에 또 거기 구호 활동을 갈 일 있으면 같이 가요. 나도 가서 거들고 싶으니까.”

“알았어. 근데 오늘 동생들이랑 영국 대사 부인의 초대를 받았다고 했지? 가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야?”

“이런저런 덕담이랑 현재 영국은 어떤지 이야기를 했죠. 아 참, 도중에 YMCA 관계자분이 오셔서 한국인 학생들의 장학금 지원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어요.”

그들은 준영이 맨체스터에서 기술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곤 준영이 고국의 학생들을 돕는 일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단다.

“그래서 이미 지원하는 학생들이 있다고 했죠. 그러니까 YMCA 쪽 분이 좀 더 확대할 생각은 없는지 물어봐 달라고 하더군요.”

“확대라……. 뭐, 고려해 볼 만한 일이긴 하지.”

현재 준영은 이억관을 통해 독립유공자의 자녀들을 중심으로 교육 지원을 하고 있었다.

일단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후손들이 출세해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을 뒷받침해 준 이는 이준영.’이라는 자랑스러운 사실을 남겨 놓고 싶기도 했다.

그래야 레전드로 더욱 이름을 남길 수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쓸 만한 인재를 키워 내면 한국에서든 영국에서든 나에게 힘이 될 테니까.’

그 점을 생각하면 장학금 지원을 확대할 필요는 있다.

다만 이런 일에도 절차가, 그리고 무엇보다 믿고 맡길 인재가 절실했다.

“재단을 만들면 그런 쪽으로 잘 심사하고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말이야.”

“21세기에도 잘 알려진 독지가를 찾으면 되지 않아요?”

“이 시대의 독지가? 글쎄, 내가 알 만한 분이…….”

있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사람이!

벌떡 일어난 준영은 리즈에게 감사의 키스를 했다.

“고마워. 리즈 덕에 생각난 분이 있어.”

바로 유한양행의 유일한.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은 분이니 분명히 이런 일에도 손을 잡아 주실 것이다!

***

화신산업의 대표 박흥식은 오늘 곽영주의 연락을 받고 대원각을 찾았다.

간단하게 안부와 근황을 묻던 곽영주는 박흥식에게 오늘 자 신문을 내밀었다.

신문에는 요즘 화제의 대상인 축구 선수 이준영이 유한양행의 유일한 회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둘이 같이 장학 재단을 설립한다고요?”

“그렇소. 이준영이는 벌써 자기 회사 지부를 통해 학생들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재단을 세워 좀 더 체계적으로 해 보겠다고 하더군.”

준영에게 이 같은 이야기를 들은 유일한은 재단 설립과 운영에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했단다.

재단 이름은 두 사람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와서 ‘한영 재단’이라고 할 거라고.

“박 회장, 이 기사를 보고 느껴지는 게 뭐 없소?”

“네, 참으로 기특하다 싶습니다.”

“그뿐이오?”

실망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는 곽영주의 반응에 박흥식은 이놈이 왜 이러나 싶어 생각에 잠겼다.

단지 신문 기사만 보여 줄 것 같으면 이렇게 따로 부르지도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사회 공헌 사업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박흥식도 재단을 운영하며 대학생들에게 장학금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곽영주 이놈은 자신이 했던 공헌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래,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박 회장이 도움을 주었으면 하오.”

“도움이라 하시면……?”

“내가 이번에 공익을 위해서 재단 설립을 해 보려는데, 지원을 해 줬으면 하오.”

짧게 말해서 돈 내놔.

이미 연락을 받았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던 박흥식은 깊은 빡침을 감춘 채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공익을 위한 일이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 대신 뒤는 확실히 봐주겠소.”

“그렇다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합작과 기술 도입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 주십시오.”

이번에 제1제당 이명철이 영국에서 기자재와 기술자들을 데려와 라디오를 비롯한 가전제품 사업에 뛰어든단 얘기를 들었다.

박흥식은 여기에 뒤처질 생각이 없었다.

가전제품 시장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성장 추세에 있으니까.

“알았소. 상공부 쪽에 이야기해서 도와줄 테니 박 회장도 확실히 지원하시오.”

그렇게 협약을 마친 후, 박흥식은 떠났다.

곽영주는 수첩을 꺼내 거기 적어 놓았던 기업과 대표들의 이름에서 화신산업에 대해서 ‘○’으로 체크해 두었다.

“이제 남은 건 호양산업의 이정림이랑 낙희공업사 구인회, 금성방직 김성곤…….”

그는 다음 호구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한국의 록펠러라고 불리게 될 미래의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그 상상이 이뤄지지 않을 꿈이란 건 알지도 못한 채.

***

모처럼 맑고 따스해진 날.

리즈와 그녀의 동생들은 준영의 안내를 받아 한국의 옛 궁궐을 구경하고 있었다.

영국 대사관과도 가까운 곳이라 멀리서 바라보긴 했지만, 안에서 보는 느낌은 확실히 달랐다.

“한국의 궁궐은 이렇군요. 전부 나무로… 아, 돌로 지은 건물도 있네요.”

“석조전이라는 건물이야. 20세기 초에 지어진 거지.”

리즈가 준영에게서 덕수궁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는 사이, 앤지는 준영에게 받은 8밀리미터 무비 카메라를 들고 덕수궁 곳곳을 촬영했다.

“왠지 쓸쓸한 느낌이 들어.”

“임금님이 살지 않으니까 그럴 거야.”

카린의 말에 앤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한국은 공화국이랬지. 왕실이나 왕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존 오빠한테 물어봐, 언니. 오빠야는 왕족이니까 알고 있을 거야.”

“왕족이라고 해 봐야 500년 전에 분가한 가문 출신이잖아.”

그래도 알고 있을지 모르기에, 앤지는 준영에게 물음을 건네러 다가갔다.

그때 카린은 근처 나무에서 기어 내려온 다람쥐를 보았다.

줄무늬가 앙증맞은 다람쥐의 모습에 카린은 금세 두 눈을 반짝였다.

“와, 귀여워!”

다람쥐가 도망치자, 카린은 곧장 그 뒤를 쫓아갔다.

“카린, 조심해. 함부로 뛰다가 넘어져.”

큰언니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다람쥐를 쫓아가던 카린.

호기심 많은 아이를 피해 도망치던 다람쥐는 마침 전각 주변을 거닐던 노파 일행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달려오던 속도를 줄이지 못했던 카린은 그대로 한복 입은 노파와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아야야……!”

“이런, 얘야. 괜찮으냐?”

노파의 물음에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까졌기 때문이다.

“이런, 아프겠구나. 성 상궁, 손수건 좀 다오.”

“예, 마마.”

중년의 상궁에게 손수건을 건네받은 노파는 카린의 손을 싸매 주었다.

상황을 보고 뒤늦게 달려온 준영 일행은 노파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동생이 폐를 끼쳤습니다.”

“괜찮네. 폐라고 할 것도 없었으니.”

노파를 본 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나이대 한국인들과 다르게 영어에 꽤 능숙한 데다, 상당한 품위까지 느껴졌으니까.

마치 작년에 버킹엄 궁에서 만났던 여왕과 느낌이 비슷했다.

“흠, 이제 보니 신문에서 본 젊은이로군. 영국에서 공 차기를 잘해서 유명해졌다던가?”

“맞습니다. 이준영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노부인께서는 뉘신지……?”

궁금한 마음에 건넨 물음에 노파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젊은이 같은 사람은 알아 둘 필요가 없는 늙은이라네.”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해지잖아요!’

노파는 자신의 일행을 데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그녀를 모시던 상궁 하나가 안타까운 마음에 대신 소개를 했다.

“저분은 붕어하신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폐하의 황후마마이십니다.”

‘순종의 황후?’

한때 이 궁궐의 안주인,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국모였던 사람.

쓰라린 역사의 목격자가 조용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입니다.

경술국치가 일어날 때 친일파 대신들이 한일 합방 조약문에 옥새를 찍으려고 하자 옥새를 치맛자락에 숨기고 내주지 않았다고 하죠. 결국 숙부인 윤덕영에게 빼앗기고 말았지만……;;;

그래도 가시는 날까지 이 땅의 마지막 황후로 품위를 보이셨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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