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08화 (208/400)

Round 208. 이런 흉계 저런 흉계

“아 참, 제가 영국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거 잘 아시죠? 최근에는 유전 개발 쪽에 투자를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유전? 석유 말인가?”

순간, 세 악당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네. 석유, 검은 황금 말입니다. 이거 어디 가서 함부로 얘기하면 안 됩니다.”

“알았으니까 상세히 이야기해 봐.”

“네. 그러니까 영국 북해 해저에 엄청난 양의 석유가 묻혀 있는데…….”

준영은 이와 연계된 대륙붕 관련 법안이나 거대 석유 기업들이 나선 이야기 등을 늘어놓았다.

굉장히 그럴듯한 이야기에 곽영주는 꽤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준영이 자네의 유전 개발 투자에 참여하면 우리도 득을 볼 수 있다 이건가?”

“물론이죠. 앞으로 2~3년 안에는 성과가 나올 겁니다. 이거 국가적으로도 크게 득이 되는 사업입니다.”

석유를 전량 수입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해 볼 만한 사업이다.

초기에 과감하게 투자하면 훗날 크게 득을 볼 수 있을 테니까.

“혹시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따로 알아보십시오. 이미 네덜란드 연안에서는 석유가 채굴되고 있다고 유럽 언론에도 나왔으니까요.”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고…….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뭔가?”

“제가 경무관님께 하지, 누구한테 얘기하겠습니까. 다른 관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데다, 경무관님은 각하를 지척에서 모시는 실세가 아닙니까.”

실세라는 말에 곽영주는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임화수가 말했다.

“이건 반드시 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 임화수, 일자무식이지만 석유가 국가에 중요한 자원이라는 건 압니다.”

“그래, 매우 중요하지. 그런데 그만한 중요한 사업에 투자할 종잣돈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거야 재무부 장관을 닦달하든, 국내 재벌들을 쥐어 짜내든 하면 될 게 아닙니까.”

중요한 건 일단 공론화하지 않는 것이다.

나라 살림이 빠듯하다 보니, 관료들 중에서도 해외 유전 개발 사업을 회의적으로 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거기다 국가 주도로 투자가 진행되면 떨어지는 떡고물도 적을 터.

‘일단 뭔가 다른 이유를 대고 돈을 모아야겠구만.’

자금 조달은 생각해 보니 임화수의 말대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동안 원조 물자 분배나 적산 불하 등으로 특정 재벌들의 뒤를 봐주고 정치 자금을 모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이번에도 적당히 어르고 달래서 뜯어내면 될 것이다.

‘잘하면 한국의 록펠러가 될 수 있을지도? 그만한 영향력이 있으면 각하의 뒤를 이어 대권에 도전할 수도 있지 않겠어?’

장밋빛 전망을 상상하던 곽영주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준영에게 말했다.

“어흠, 그, 유전 개발은 당장 결정해서 진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하지만 최대한 서둘러 보지.”

“우리 동대문 상인 연합회에서도 알아보고 투자해 보도록 하지.”

곽영주에 이어 임화수까지 콜을 때리자 준영은 반색을 하였다.

‘제대로 낚였군.’

앞으로 놈들이 돈을 모아 오면 자신에게 찾아올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놈들은 유럽 쪽 정보에 어두운 데다, 거대 석유 기업들과 친분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돈은 2~3년 안에 주인 없는 돈이 되겠지. 그땐 이놈들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제멋대로 사람을 이용하려는 놈들의 등골을 뽑아서 골수를 제대로 빨아 주리라.

이런 준영의 흉계(?)를 알 리 없는 악당들은 잔을 높이 들었다.

“자, 우리의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너희의 암울한 미래를 위해 건배.

함께 잔을 든 준영도 엉큼한 미소를 지었다.

***

부산시 남구 대연동.

이곳에는 지난 6.25전쟁에서 전사한 UN군 참전 용사들이 묻혀 있었다.

이승만의 전용기 우남호를 타고 부산으로 온 준영 일행은 이곳에서 루이스 대령의 묘소를 찾고 있었다.

“안내원이 알려 준 대로면 이 근처인데……. 아, 여기가 영국군 참전자 묘역이군.”

쭉 늘어선 묘소들을 살펴보던 준영과 자매들은 마침내 루이스 대령의 묘소에 당도했다.

“여기가 아버지의…….”

자매들은 하늘에 낀 구름만큼이나 어두운 표정으로 부친의 비목을 바라보았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났지만,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그동안 아픔을 마음속에 묻어 두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무덤을 보고 있자니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흑흑… 아빠…….”

“카린, 아버지께 꽃을 드려야지.”

자매들은 미리 준비해 온 꽃다발을 영전에 바쳤다.

준영도 꽃을 바친 후, 따로 한국식으로 술을 한 잔 올리고 절을 올렸다.

“대령님, 저 이준영입니다. 기억하고 계시죠?”

2026년에 살던 자신을 1957년으로 보낸 장본인.

그의 앞에서 준영은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갑자기 기막힌 일을 겪어서 한동안 많이 당황했습니다만, 대령님의 가족들 모두가 보살펴 주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갑자기 과거로 오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그 빈자리는 새로운 만남으로 채워졌고, 자신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마음을 채워 주는 소중한 연인도 생겼다.

이렇게 고마워하는 건 비단 준영만은 아니었다.

“아버지, 준을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 사람 덕분에 저는 무사히 삶을 이어 갈 수 있었어요. 동생들도 새로운 가족을 얻었고요.”

리즈의 말에 앤지와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이 오고 정말 많이 달라졌다.

할아버지도 예전보다 훨씬 의욕에 찬 활동을 보이고 계시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아져 집안 분위기도 훨씬 밝고 활기차게 변했으니까.

“앞으로도 항상 지켜봐 주세요. 아버지가 바라시는 대로 다들 힘차고 행복하게 살아갈 테니까요.”

리즈의 말에 끝나자,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한 먹구름이 걷히며 환한 햇볕이 내리쬔 것.

마치 저세상에 있는 이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기에, 모두의 표정도 햇살만큼이나 밝아졌다.

“감사해요, 아버지.”

“다음에 또 들르겠습니다, 대령님.”

하직 인사를 마지막으로 일행은 성묘를 마쳤다.

먹구름을 지운 햇살은 그들이 가는 길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

준영의 방한은 한국 국민들에게 상당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신문과 방송은 매일 그의 행보와 근황에 대해서 다루었다.

국민들이 정치에서 눈 돌리기를 원하는 정부는 그런 여론에 부채질을 했지만, 역효과가 일어나기도 했다.

어제 있었던 특무대와 연고대 연합팀과의 경기 후에 있었던 일만 해도 그랬다.

“이준영이 관중들을 강제 해산시키려던 깡패들을 손봐 줬다며?”

“동대문 깡패에게 맞고 있는 아이를 구해 줬대.”

“허! 동대문파면 자유당 똘마니들 아닌가? 그런 놈들에게 맞서다니 보통 배포가 아니구만.”

“역시 축구왕쯤 되면 다르구만.”

이준영이 자유당 정권의 선전에 놀아나는 게 아닌가 우려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이들도 이에 대해서는 호평했다.

물론 자유당 입장에선 거슬리는 사건일 뿐이었다.

“이준영이 이놈, 자기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고 깡패들하고 다툰 건지…….”

“자기를 좋아하는 열성 팬들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나 봅니다.”

“아무튼 우리 당의 명예에 똥물이 튀었어요. 무식한 깡패 놈과 선수 놈팡이 때문에……. 에잉!”

이기붕을 비롯해 자유당 수뇌들이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을 때, 법무부 장관 홍진기가 입을 열었다.

“이준영이를 마냥 우대해도 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상이 어떤 놈인지 검증도 안 되었지 않습니까.”

“영국에서 살다 왔는데 사상이 문제 될 게 있겠소?”

“어허, 모르시는 말씀. 영국은 소련과 수교를 맺고 있고, 노동당이라고 좌익 놈들이 판을 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준영도 불순한 사상에 물이 들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게 홍진기의 주장이었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적당히 꼬투리를 잡으면 까불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겁니다. 부려 먹기도 편할 거고요.”

“꼬투리를 잡을 만한 건수가 있소?”

“있습니다.”

홍진기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자유당 수뇌들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수긍을 했다.

‘하긴 저 인간,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작자지.’

‘조봉암도 이적 행위로 처형시켰으니…….’

그런 작자니까 선수 하나 꼬투리 잡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모두들 기대감을 품고 다음에 벌어질 일을 지켜보기로 했다.

***

루이스 대령의 성묘를 다녀온 다음 날.

준영은 약속대로 특무대와 연고대 선수들을 지도해 줬다.

드래그 백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개인기와 공수에 있어 어떠한 움직임을 펼치는 게 좋은지, 최신의 전술은 어떠한지 등등.

“공수에 있어 한 박자, 아니 반 박자 더 빠르게 판단하고 대응해야 해요. 앞으로 축구는 템포가 점점 더 빨라질 거니까.”

“그럼 순발력과 체력이 중요하겠구만. 판단력도 좋아야 할 테고.”

젊은 선수들과 더불어 특별 지도를 받고 있던 김용식 선생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더 빨라져야 하고 더 강한 체력을 갖춰야 합니다. 더 영리하게 판단을 해야 하고요.”

“허허, 그게 세계적인 추세라면 젊은 친구들은 아주 힘든 훈련을 해야겠구먼.”

김용식 선생의 말에 젊은 선수들은 우거지상을 지었다.

김용식 옹이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걸 보면 앞으로 다른 지도자들도 스피드와 체력이 답이라며 무지막지하게 훈련을 시킬 게 뻔할 테니까.

“분명 처음엔 힘들어요. 하지만 계속 훈련하다 보면 향상될 수 있고, 보다 빠른 경기 템포에도 익숙해질 겁니다.”

그러면서 준영은 선수들에게 체력 향상에 도움이 될 훈련법들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한나절 동안의 특별 지도가 끝나자, 훈련장 밖에서 취재를 왔던 기자들이 몰려왔다.

“이준영 선수, 한국 선수들의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봅니까?”

“내년 아시안컵이나 로마 올림픽 진출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혹시 영국에서 통할 만하다고 눈여겨본 선수가 있는지?”

여러 가지 축구 관련 질문이 쏟아졌다.

이에 대해서 준영은 최대한 적절한, 그리고 희망적인 답변을 하려 애썼다.

솔직히 유럽이나 남미 국가들에 비하면 한국 축구는 뒤떨어져 있는 게 현실.

그래도 가능성을 심어 주지 못하면 발전할 여력도 없을 것이다.

“이준영 선수, 김창룡 장군이 영국에 찾아갔을 때 무례한 언행을 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갑자기 김창룡이 왜 나와.

준영은 방금 질문을 날린 기자를 바라보았다.

다른 기자들과 달리 꽤 교활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김창룡 장군의 부관들이요. 술자리에서 상당히 막말을 했다고 하던데요?”

김창룡의 부관들은 한국에 돌아와서는 김창룡이 준영에게 밀수 중계를 요청한 사실은 쏙 빼놓고, 술집에서 크게 다툰 사실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준영이 곤경에 처하거나 명성에 흠집이 나는 일은 없었다.

김창룡에 대한 민심이 워낙에 좋지 않은 데다, 이후 밀수에 끼어든 정황이 영국 경찰을 통해 알려졌으므로.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죠. 그리고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이는 것처럼, 돼지 귀에는 돼지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헛소문이라 이겁니까? 그런데 그 밖에 다른 소문도 있습니다만?”

아예 대놓고 공격하기로 작정했다는 듯, 기자는 보다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유러피언 컵 예선 때 체코슬로바키아에 간 적이 있었죠? 그때 북괴 고위층과 만났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 말을 들은 준영은 깨달았다.

이놈은 평범한 기자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자신을 음해해서 득을 보려는 놈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김용식(1910~1985) 옹은 우리나라 축구의 기틀을 잡은 분입니다.

현재 축구에서도 화석급으로 치는 42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셨고, 한국 최초로 국제 심판 자격을 획득하셨죠.

당시에 선수들이 흔히 하던 술, 담배도 멀리할 정도로 오직 축구에만 전념하셨습니다.

지도자로서 후진 양성에 힘쓰셨고, 영어에도 능통하셔서 FIFA 총회에서 한국 수석대표로 축구 외교에도 크게 힘쓰신 분입니다.

현재의 한국 축구가 있도록 토양을 마련하신 분인데 점점 잊혀 가는 듯하여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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