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05.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과연 날 불러 놓고 무슨 말을 할까?’
내심 긴장하고 경계하고 있던 준영에게 이승만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린 시절은 어땠냐는 둥, 축구는 어떻게 배웠냐는 둥, 영국에는 어떻게 가게 되었냐 등등.
이와 비슷한 질문들은 이미 작년에 스탠리 루스나 FA에서 자신의 신상을 털려고 했을 때 받은 바 있었다.
이에 준영은 ‘설정’대로 자신의 과거를 늘어놓았다.
“흠, 고생을 참 많이 했겠구만. 근데 이 군, 자네도 나랑 같은 전주 이씨라던데?”
“예, 광평대군파입니다.”
준영의 대답에 이승만은 뭔가 좀 아쉬운 기색을 보이다 이내 웃음을 지었다.
“뭐, 계파야 어떻든 다 같은 집안이 아닌가. 그러니 앞으로 가까이 잘 지내보는 게 어떤가?”
‘오, 갑자기 훅 들어와서 날리시네.’
여기서 ‘예!’라고 내뱉어 버리면 거리를 두는 게 힘들어질 수 있다.
이에 준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각하, 제가 영국에서 살고 있지만 마음속엔 항상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언제나 가까이 있을 겁니다.”
“허허허, 그래? 허허허!”
이승만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준영이 마음에 둔 대한민국에 자유당 정권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른 채.
“그건 그렇고, 이쪽의 영애는 신문으로 본 적이 있는 것 같군. 분명히 이 군의 피앙세라고 했던가?”
피앙세라는 말에 리즈는 발그레 얼굴을 붉혔다.
약혼까지 한 건 아니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르는 법. 이 머나먼 나라까지 함께 와 주다니 기특한 규수로구만.”
“각하, 리즈나 그녀의 동생들이 저를 따라온 까닭은…….”
준영이 자매들의 방한 이유를 밝히자, 이승만은 이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효녀로구만. 부산으로 갈 때 내 전용기인 우남호를 빌려 줄 테니 그걸 타고 가게나.”
“아닙니다, 각하. 저희도 비행기가 있고…….”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내가 된다지 않는가.”
이승만의 호의에 준영은 난감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친절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호의를 베풀긴 하는데, 뭔가 의도가 있어 보여 찜찜했다.
그렇다고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내가 역사를 몰랐다면 경계심 같은 거 없이 진짜 호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군.’
아마 오성 장군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과 미련을 쉬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준영은 다시 이승만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면담이 끝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지나야 할 듯싶었다.
***
이승만을 만나고 나온 준영은 미리 예약한 조선 호텔에서 이억관과 반가운 해후를 했다.
“와! 아저씨, 이제 누가 봐도 어엿한 사장님인데요?”
“하핫, 자네는 어떻고. 그런 고급 양복 차림을 하니 진짜 재벌집 자제 같구만.”
덕담을 주고받은 둘은 서로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준영은 좀 전에 대통령을 만났던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흠, 지나친 호의가 부담스럽더라 이건가?”
“제가 인기가 많은 건 알겠는데, 도를 넘은 것 같아서요.”
준영은 경무대에 갔을 때 받은 훈장을 꺼내 보였다.
문화 훈장 대통령장이라고 하는데, 국가 발전에 공적을 세운 이에게 수여하는 것이라 했다.
훈장뿐만 아니라 김홍일에게 들은 것처럼 대한민국 국적도 받았다.
“솔직히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뛴 적도 없고, 나라에 뭐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 이런 걸 받는 게 말이 되는지…….”
“한 것이 없는 건 아니지. 자네 덕에 민족의 자긍심이 올라간 건 사실이니까. 그건 중요한 거라고.”
발전을 하려고 해도 자긍심이 없으면 의욕도, 희망도 가질 수 없으니까.
그렇다 보니 이억관도 국가의 치적만 자랑하는 관제 언론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있었다.
“준영이 자네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유명 인사야. 그러니 저들도 있는 것, 없는 것 동원해서 대우하는 거지. 아무것도 없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걸?”
“그래도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는 건 탐탁잖군요.”
“이용당한다라……. 이미 지금까지 있었던 것만 해도 저들에게 쓸 만한 건수가 되었을 거야.”
자유당에 대한 민심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최근에 경기가 나빠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자유당 정권 입장에선 어떻게든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가 아닌 다른 쪽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때 준영이 방한한다는 정보가 그들의 귀에 들어갔다.
“국민들이 좋아하는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의 금의환향. 여론을 돌리는 데 이보다 좋은 건수는 없지.”
그 때문인지 곽영주에게서 친선 시합 참가를 요청받기도 했다.
말이 요청이지, 사실상 일방적인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이 엄동설한에 축구 경기라니.
그래서 준영은 핑계를 대고 날강두(?)를 시전해 볼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용히 입국할 걸 그랬습니다.”
“그렇게는 안 될걸? 밀입국이라도 하는 거면 몰라도.”
그러면서 이억관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상황에선 피하기는 힘들지. 그렇다면 차라리 즐기는 건 어떤가?”
“즐긴다라……. 과연, 구른 만큼 뜯어내야 마땅하겠죠.”
준영은 엉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용당할 상황이면 차라리 역으로 이용해 보자!
그게 날강두 시전보다 훨씬 나을 것 같았다.
***
서울 운동장, 21세기에는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미 지난해 말에 예고된 육군 특무대와 연고대 연합팀의 친선 시합을 보기 위함이다.
아니, 그 경기에 초청 출전하는 축구왕 이준영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줄 서, 줄!”
“거기 새치기하는 놈 누구야?”
인산인해라는 단어가 실감이 날 상황에서 경찰들은 통제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동대문에 거점을 둔 건달들까지 나섰다.
준영은 이런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열을 하는 데 열중했다.
‘어이구… 예상은 했다만, 잔디 한 포기 없는 맨땅이라니.’
모래가 휑하니 날리는 필드를 보며 준영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친선 경기라는 점이다.
무리하게 태클 같은 거 안 하고 신기한 개인기를 보여 주면 관중들은 좋아하리라.
“한국에서 축구 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겠군.”
준영은 자신에게 말을 건넨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 경기 연고대 연합팀 감독을 맡았다는 홍덕영.
매직 마자르의 맹공에 용감하게 맞선 대한민국 대표팀 초대 골키퍼였다.
“처음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네요. 다들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나도 많이 기대하고 있어.”
홍덕영은 흐뭇한 표정으로 준영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나갔던 월드컵.
감독인 김용식 선생은 그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한 골만이라도 넣자. 그래야 전쟁 때문에 고통받은 국민들의 속이 조금이라도 시원해질 테니까.’
홍덕영도 그 말에 공감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세계의 벽은 높았다.
한국은 단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참혹하게 대회를 마감했다.
그랬는데, 그 아쉬움을 이준영이 풀어 주었다.
비록 사정이 있어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뛰었다곤 하지만, 첫 골뿐만 아니라 대한의 기상을 떨치며 축구 종가에 최초의 우승컵을 안겨 주었다.
할 수 있다. 한국인도 해낼 수 있다.
홍덕영은 그 가능성을 보여 준 준영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성품도 바른 친구로군. 세계적인 선수라면 콧대가 높을 만한데…….’
준영은 먼저 특무대와 연고대 선수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며 살갑게 굴었다.
그런 모습에 선수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뭐라고요? 내가 한국말을 못할 줄 알았다고?”
“그야 어릴 때부터 외국에 살았다니까…….”
준영은 대화를 나누며 선수들과 안면을 텄다.
현재 대한민국 대표팀 주전 골키퍼인 함흥철을 비롯해 주장 문정식, 이수남, 차태성, 박경호 등등.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최정민 선수시라고요? 아시아의 황금발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축구왕을 만난 내가 더 영광이지.”
악수를 나누던 준영과 최정민은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뭐, 서로 낯간지러운 별명은 부르지 말자고.”
“알겠습니다, 형님.”
“형님?”
“형님뻘이라 불렀는데, 안 될까요?”
준영의 넉살에 최정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거 없지. 나보다 축구 잘하는 동생 있으면 자랑거리가 될 텐데. 하하핫!”
시원한 인상만큼이나 최정민은 호탕했다.
실력뿐만 아니라 성품도 황금 수준으로 보였다.
이렇게 안면을 트고 몸을 데운 후, 라커룸으로 돌아갔던 선수들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다시 필드로 나왔다.
“누가 이준영이지?”
“거 보면 모르나? 저기 제일 키 큰 선수가 이준영이지!”
“와, 진짜 크네.”
육상 트랙까지 꽉 채운 관중들은 이준영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런 관중들에게 준영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귀빈석에 있는 높으신 분들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음 대선 때 이준영이를 부르면 어떻겠습니까?”
“하긴 국민들이 저리 좋아하니 효과도 좋겠지요.”
자유당의 고관들이 김칫국을 거하게 들이켜고 있을 때, 경기가 시작되었다.
전반에 특무대, 후반에는 연고대 연합팀에서 뛰기로 한 준영은 하프백 포지션으로 출전했다.
“어디 세계 수준의 수비가 어떤지 보자고!”
연세대 간판선수인 차태성은 동료에게 공을 받아 특무대 진영을 돌파해 들어갔다.
그는 일부러 준영 쪽으로 공을 몰고 갔다.
자신과 같은 나이에 세계 정상의 선수가 된 준영에게 호기심과 호승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으니까.
‘꽤 빠르군. 하지만 단순해.’
차태성은 스피드를 이용해서 치고 달릴 속셈이었지만, 준영도 스피드는 자신이 있었다.
바로 길목을 잡고 차태성을 밀어낸 준영은 전방에 있는 최정민 쪽으로 길게 패스를 건넸다.
빠르게 하늘을 가로지른 볼이 정확하게 최정민의 앞쪽에 떨어지자 관중석에서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와, 무슨 패스가……!”
“기가 막힌다는 게 이런 거구만!”
준영이 건네준 패스를 받은 최정민은 수비수 한 명을 제치고 그대로 슈팅, 첫 골을 만들어 냈다.
“역시 황금발 최정민이군!”
“이준영의 패스도 좋았지.”
“저 둘이 대표팀에서 같이 뛴다면…….”
“어? 이준영은 영국 대표팀 선수 아닌가?”
“상관없어! 한국 국적도 받았으니 얼마든지 뛸 수 있을걸.”
관중들이 기대를 부풀리고 있는 사이, 차태성은 아까 패스를 건네준 동료와 다투고 있었다.
“너 바보냐? 피해 가도 시원찮을 판에 이준영한테 덤벼들어?”
“시끄러. 하여간 고대 놈들은 도전 정신이 없다니까.”
“도전해도 우린 그딴 식으론 안 해!”
연고대 선수들끼리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며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신촌 독수리와 안암 호랑이를 한 팀으로 엮다니, 대체 누구 발상이야?’
21세기에도 라이벌 의식이 남다른 두 대학교 선수들은 경기 중에 틈만 나면 티격태격 언성을 높였다.
금방이라도 팀워크가 박살 나 버릴 것 같았지만, 의외로 첫 골을 내준 뒤에는 꿋꿋하게 잘 버티며 공격도 곧잘 전개해 나갔다.
‘다들 과감하고 저돌적이군. 아무래도 저쪽은 단순한 친선 경기로 생각하지 않나 본데.’
듣자니 육군 특무대는 현재 한국에서 국대급 선수들이 모인 최강팀.
그런 상황에서 세계 수준의 선수까지 끼었다.
그러니 선수들도 그냥 접대성 플레이만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수 가르쳐 주는 게 예의겠지?’
그리 판단한 준영은 패스를 받아 과감하게 전진해 들어갔다.
***
고려대와 연세대 두 학교의 라이벌 의식은 연고전이란 더비로 이어졌습니다.
본래의 목적은 건전한 경쟁을 통한 친선 도모였습니다만… 초창기 의도보다 상당히 과열된 상태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