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04화 (204/400)

Round 204. 축구왕 방한

“휴… 자네 말대로 현실이 심상찮은 게 사실이지. 그래서 어쩔 텐가? 이대로 나라를 등질 텐가?”

김홍일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라를 등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자유당 정권과 선을 긋고 싶을 뿐이죠.”

“그럼 나라를 등지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잖나.”

“장군님, 지금은 조선 시대가 아닙니다. 정권이 바뀐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그렇긴 한데… 거참, 각하 다음에 누군가 집권한다는 게 감히 상상이 안 되는군. 나도 머리가 꽤 굳은 모양이야.”

김홍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준영은 그런 그를 보며 다시금 이억관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전쟁 중에 미군과의 마찰로 예편당하셨으면서도, 이후에 대만에서 수년간 외교관 노릇을 하면서도 조금의 불만도 없으신 모양이더라고.’

정말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신 모양이다.

거기다 뜻하지 않은 예편을 당했다고 하지만, 자신의 전공을 치하해 주었다는 이승만을 등질 수도 없었을 터.

한편으로 준영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유당 놈들, 오성 장군이 유력 대권 후보가 될 것 같으니까 군에서 밀어내고 외교관으로 내보낸 거 아냐?’

독립운동 경력에 한국 전쟁 초기에 지연전으로 반격의 기회를 마련한 영웅.

이 정도 경력이 되는 분이 퇴역 후에 정계로 나오면 거의 차기 대권 후보급이 아닐까?

어쩌면 이승만, 혹은 ‘이 박사 다음이 나.’라고 여기는 작자들의 입장에선 꽤 거슬려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니 핑계 좋게 중국통이랍시고 외국으로 내몬 게 아니겠는가.

“이 군, 자네는 현 정권과 선을 긋고 싶다고 했지? 그렇게 해서 자네가 하고자 하는 건 뭔가?”

“그야 축구를 하는 겁니다.”

준영이 망설임 없이 말하자 김홍일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뿐인가?”

“사업이나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제 본업은 축구 선수라서요. 권력자들의 참견이나 간섭 없이 마음껏 공을 차면서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다.”

“거참… 소박한 소망이군.”

너털웃음을 짓던 김홍일에게 준영이 물었다.

“장군님께선 소박한 소망이 없었습니까?”

그 말에 김홍일은 육군종합학교 교장으로 전보될 때, 그리고 중장으로 예편된 때를 떠올렸다.

당시는 전쟁이 한창인 시기.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반격을 통해 북진 통일도 노려 볼 수도 있던 때였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쓸쓸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군인으로 내 소망은 더 이상 이룰 수 없어. 지금은 후배들이 잘 해내길 바라야지.”

“잘 해낼 수 있는 상황이면 좋겠습니다만…….”

준영은 ‘불행한 군인’이 나올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김홍일은 그 말뜻을 금방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정말 이준영의 말대로 자유당이 무너지고 이후에 누군가 집권한다면, 혼란은 줄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자넨 제법 안목이 좋군. 진짜 축구 선수가 맞나?”

“축구도 안목이 좋아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전에 위험을 제거하고 적의 빈틈을 찾아 공격할 수 있죠.”

“허허, 듣고 보니 그렇구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축구왕이라 불리는 청년.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자네의 소박한 소망을 이루도록 도와주지. 그러니 자네도 선의를 베풀어 줬으면 해.”

“선의라 하시면……?”

“그리 거창한 건 아니야. 자네나 이활 사장이 하던 것처럼 나라를 위해 애쓴 이들과 그 가족을 계속 도우면 되는 거지.”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오성 장군은 무엇을, 어떻게 할 생각인 걸까?

자세한 건 알 수 없었지만, 준영은 김홍일을 믿어 보기로 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면 무언가 다른 안목과 작전을 갖고 있을지 모르니까.

***

타이페이에서 1박을 한 준영 일행은 다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갈 준비를 했다.

“한국 정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도착 시간에 맞춰 서울 공항의 활주로를 비워 주겠다고 합니다.”

출발 직전 기장이 와서 전한 말에 준영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서울요? 인천, 아니 김포 국제공항이 아니고?”

“예. 군용 공항이지만, 대통령이 특별히 허가해 주는 거랍니다.”

준영이 의아했던 건 군용 공항에 허가가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서울에 공항이 있었나?’

아무튼 그쪽으로 준비해 준다니 그리로 가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게 쑹산 공항을 떠나고 3시간 후, 준영 일행이 탄 비행기는 한국 영공으로 진입했다.

“한국 공군 전투기들이 나타났습니다. 서울 공항까지 호위해 주겠답니다.”

승무원의 말에 창밖을 내다보니 태극 마크가 선명한 전투기 3대가 여객기 좌우 선두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혹시 북한 전투기가 공격할까 봐 그런가?’

옛날에 미군 정찰기가 격추되거나 여객기가 납북된 적이 있다고 하니까.

거기다 자칫 길을 잃고 북한으로 갈 수도 있으니 호위를 겸해서 안내를 해 주는 건지도 모른다.

“준은 정말 유명 인사군요!”

“전투기까지 와서 호위해 줄 정도인 줄은 몰랐어.”

리즈와 앤지가 감탄한 시선으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자매들뿐만 아니라 동행한 영국인 기술자들도 마찬가지.

멋쩍은 웃음으로 답례한 준영은 내심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호위해 주는 건 고맙지만, 너무 거창한 게 아닌지?

“와, 땅이 빨개.”

“그러게. 나무가 별로 없는 것 같네.”

카린과 앤지의 말에 준영은 지상을 바라다보았다.

겨울이라 잎이 떨어져서 그런 거라 쳐도 민둥산이 꽤 많았다.

그 아래로 초가집 마을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푸르른 숲과 도시들이 즐비하던 21세기 한국의 수도권 풍경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새삼 할아버지 세대들의 노고가 어땠는지 알 것 같군.’

잠시 후 비행기는 한강 중앙의 섬에 있는 공군 비행장에 내렸다.

서울 공항이 어딘가 했던 준영은 여의도였다는 걸 알고 실소를 지었다.

“다들 내리기 전에 외투를 단단히 챙겨 입어. 1월의 한국은 무척 추우니까.”

“얼마나 추운데?”

앤지의 물음에 준영은 조금 과장해서 말했다.

“시베리아만큼 추워. 참고로 여름은 동남아 뺨칠 정도로 덥고.”

“거짓말…….”

준영이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앤지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몸을 움츠렸다.

정말 시베리아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영국의 겨울보다는 훨씬 춥고 건조했다.

“어서 오시오, 이준영 선수. 경무대 경무관인 곽영주라 하오. 존경하는 각하를 대신해서 귀하를 마중 나왔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만난 젊은 관료가 악수를 건네 왔다.

“아, 예… 반갑습니다, 경무관님.”

“음, 표정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 있었소?”

“그게, 좀 피곤해서요.”

“하긴 그럴 만도 하겠군. 지구 반대편에서 왔으니. 하하핫!”

곽영주와 악수를 하는 사이, 군악대가 우렁차게 연주를 시작했다.

뒤이어 색동 한복을 입은 아이들이 화환을 건네고, 한쪽에 늘어선 환영 인파는 태극기와 ‘경축, 축구왕 이준영 귀국.’ 현수막을 흔들며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사진기를 든 기자들이 연방 플래시를 터트리고, 촬영팀은 무비 카메라를 들고 따라왔다.

나중에 신문은 물론이고, 대한 늬우스에도 나올 기세였다.

‘완전 국빈 대접이군.’

준영은 부담감이 순식간에 100배로 증가함을 느꼈다.

도대체 일개 축구 선수에게 왜 이리 과분한 접대를 하는가?

도대체 나중에 얼마나 뜯어낼 생각인 건지?

“하하,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라고. 대한의 기상을 만방에 떨친 건아에게 마땅한 대접이니까.”

“저기, 이활 사장님은 어디 계신지?”

“아, 이 선수의 지인? 나중에 만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각하부터 뵈러 가는 게 예의지.”

언제 친해졌다고 슬쩍 말을 짧게 하는 곽영주는 준영의 등을 툭 쳤다.

그가 아무리 친근감을 보여도 준영은 호감이 들지 않았다.

‘이 녀석은 나쁜 놈이니까.’

어릴 때 보육원 선생님들이 케이블 TV에서 즐겨 보던 고전 드라마에 나온 악당.

늙은 대통령에 기대어 호가호위하면서 온갖 부정과 악행을 일삼다 결국 사형당하는 녀석이다.

자신의 운명을 상상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구는 그를 보자니, 준영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의 의미를 모르는 곽영주는 그저 히죽거릴 따름이었다.

***

“이준영이다! 축구왕 이준영이 온다!”

“어디 나도 한번…….”

“거, 밀지 마쇼!”

준영이 탄 차량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 시내로 들어섰다.

이미 시민들은 소식을 접하고 거리로 나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가로수나 전봇대 위로 올라가거나, 건물 지붕이나 옥상에서 바라보기도 했다.

‘엄청난 환영 인파로군.’

나라에서 동원했다고 보기에는 사람들의 표정에 호감과 호기심이 무척 강해 보였다.

그래서 준영이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자, 환호성을 질러 댔다.

“다들 절 굉장히 좋아하는군요.”

“당연하지. 자넨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아닌가. 한국 사람이 세계 최고 반열에 오른 것을 두고 다들 얼마나 뿌듯해하는지 모를 거야.”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곽영주의 말이 그저 과장은 아니었다.

월드컵과 유러피언 컵을 동시에 들어 본 선수가 몇이나 될까?

그것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을 쓰러트리며 정상에 오르지 않았던가.

‘그래, 나는 이미 전설이지.’

브라질의 펠레, 독일의 프란츠 베켄바워,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 등등.

시대를 넘어 해당 국가를 대표하는 레전드 플레이어들이다.

어쩌면 자신도 그런 ‘대표 선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냐. 그러기엔 부족한 점이 있어.’

바로 헌신.

왜 빌리 라이트가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겠는가.

A매치 100경기를 치르며 삼사자 군단의 고난과 영광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 비하면 자신이 그런 자격이 있는가?

지금 한국인들이 보이는 순수한 호감과 호기심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 기대가 무너진다면 그들은 냉큼 새로운 기대주에게로 관심을 돌릴 게 틀림없다.

‘팬심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국가를 대표하는 레전드 플레이어.

확실히 새로운 목표로 삼아 볼 만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대 독재 정권의 도구가 되어 헌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레전드의 격에 맞지 않는 행동일 테니까.

‘그나저나 서울은… 진짜 내가 아는 서울이 아니구나.’

남산 타워도 없고, 여기저기 즐비한 고층 빌딩들도 없다.

21세기에는 해체되어 사라진 조선총독부, 현재는 중앙청이라 불리는 건물이 여전히 떡하니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다 왔어. 여기가 경무대야.”

생각에 잠긴 사이, 일행이 탄 차는 경무대 앞에 도착했다.

준영과 함께 온 자매들은 처음 보는 외국 지도자의 관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기가 한국 대통령의 관저인가요?”

“우리 집보다 작아 보여.”

“카린, 그런 말은 실례야.”

준영 일행은 곽영주와 함께 경무대 영빈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준영은 늙은 대통령과 한복을 입은 벽안의 영부인을 볼 수 있었다.

“어서 오게. 내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네.”

“이준영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준영은 신기했다.

교과서의 흑백 사진으로 보던 사람과 악수를 나누고 있으니까.

‘겉보기엔 동네 할아버지 같은데…….’

하지만 왜소하고 푸근한 인상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상대는 망국과 식민 지배, 해방과 전쟁이라는 아수라장을 겪으며 권좌를 차지한 인물이니까.

***

뭔가 시골 장터스러운 느낌인데, 1955년의 서울 공항, 여의도 공항 풍경이라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6년에 만들어졌고, 1922년에는 안창남 선생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이곳에 착륙하기도 했죠.

한국 전쟁 당시 미군 위문 공연을 왔던 마릴린 먼로도 들렀다고 하고요.

1958년에 김포 공항이 만들어진 뒤로는 공군에서 사용하다 1971년에 성남으로 이전된 후, 광장으로 남아 있다가 공원으로 조성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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