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03. 오성 장군
“안녕하시오. 영국에서 온 이준영 선수지요?”
차에서 내린 강건한 인상의 노신사가 말을 건네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실례지만 뉘신지?”
“반갑소. 난 중화민국 대사를 맡고 있는 김홍일이라 하오. 이 선수가 한국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참이었소.”
‘아, 이분이 그 유명한…….’
21세기에 있을 때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분명히 왕웅이라는 가명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윤봉길 의사가 쓴 폭탄을 만들어 준 분이라던가.
지난번에 이억관과 연락하면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 국민당군과 한국광복군에 있으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독립투사.
6.25전쟁 때는 북한군의 침공을 적절히 지연하여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전쟁 영웅이라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성 장군께서 직접 제 마중을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대한의 기상을 만방에 떨치고 있는 건아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말이오.”
“공 차는 재주만 있을 뿐인데 그리 대단하게 여겨 주시니 쑥스러울 따름입니다.”
“쑥스러울 게 뭐 있소. 아차, 멀리서 온 손님을 길에 세워 두는 게 예의가 아닌데……. 일단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합시다.”
김홍일은 준영 일행을 미리 준비한 차량들에 태우고 공항에서 가까운 호텔로 이동했다.
그러곤 방을 잡고 잠시 여독을 푼 후, 호텔 레스토랑에서 김홍일과 다시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호의적이다 보니, 금방 편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 9월에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어떤가?”
“평온합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웬만하면 경호원들과 같이 다니고 있죠.”
준영은 뒤쪽에 자리한 로베르트와 터너 등을 가리켰다.
“처음엔 한 명만 고용했었는데 점점 늘었습니다. 사업체가 커지고 손에 든 것들이 늘다 보니, 적당히 위세를 갖추는 게 좋다는 권유를 받아서요.”
“맞는 말이야. 타국에서 지내자면 그런 것도 좀 필요해. 그래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니까.”
로베르트나 다른 경호원들은 고용했지만, 터너는 자발적으로 따라다녔다.
맨유 서포터들에게 경호를 부탁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공장 일이 좀 지겨워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 그리고 같이 온 아가씨들은 누군가? 현지 여성과 사귄다는 기사를 봤는데 혹시……?”
“맞습니다. 제 연인과 그녀의 동생들입니다. 절 후원해 주시는 어르신의 손녀들인데, 이번에 부친의 성묘를 하고 싶어 해서 동행하고 있죠.”
“성묘?”
“부친인 루이스 대령이 영국 공군 장교인데, 한국 전쟁에서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허, 그랬군. 이따가 찾아가서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겠구만.”
대한민국을 구하려다 산화한 전몰 용사의 가족에게 예를 보이는 게 옳을 테니까.
김홍일의 이런 모습에 준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라를 위해 피 흘린 이들을 살펴 주는 게 맞지. 하지만 나라 살림이 워낙에 힘들다 보니 그것도 어려운 형편이야.”
그리 말한 김홍일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작년에 잠시 귀국했을 때 이활 사장을 만난 적이 있지. 매헌의 일가나 다른 독립투사의 식솔들을 살펴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만났는데, 그때 자네 이야기를 들었어.”
“아저씨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하셨나 보네요.”
“그건 금칠이 아니라 금을 덮고 있는 먼지를 닦아 낸 거지. 그렇게 큰돈을 벌어서 남을 위해 쓰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김홍일의 칭찬에 준영은 머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제 돈은 아니라서요.’
김창룡이 부정하게 착취해서 은닉한 재산들을 쓴 것뿐이다.
물론 빼빼Ro 수익의 일부를 난민 구제에 쓰는 것도 맞다.
거기다 그동안 친분을 쌓은 맨체스터의 사업가들, 그리고 처칠이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같은 분들에게도 한국의 전쟁 난민 구호를 부탁한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김홍일이 생각하는 대단한 노력이나 희생을 한 건 아니다.
“제가 한 일들은 장군님이나 억관 아저씨 같은 분들이 하신 희생에 비하면 깨알만큼도 안 됩니다.”
“허헛, 이 친구, 겸손하긴. 자넨 현지에서도 봉사 활동을 많이 한다며? 공만 잘 찬다고 영국 여왕이 대영제국 훈장을 하사한 건 아니라고 보네만?”
“예? 대영제국 훈장은 못 받았는데요?”
“못 받았다고? 그럼 오보란 말인가?”
“그럴 겁니다. 제가 받은 건 로열 빅토리아 훈장뿐이니까요.”
지난해 말, 대영제국 훈장 수여자로 의회에 승인이 난 사람은 감독인 월터 윈터보텀과 톰 피니, 빌리 라이트뿐.
우승도 거뒀지만, 그 전에 오랫동안 잉글랜드 대표팀에 헌신한 점을 높이 산 거라고 했다.
“그 점에서 반짝 활약을 한 저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거죠.”
“거참, 우승컵을 안겨 줬는데도 그런 대우를 한단 말인가. 째째하구만.”
일부 잉글랜드 축구팬들이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지금 김홍일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의회가 내세운 ‘오랜 헌신’이라는 명분도 틀린 것은 아니기에 큰 논쟁 없이 넘어가고 말았다.
“그에 대한 아쉬움은 조국에서 조금은 덜어 줄 수 있을 것 같군. 안 그래도 각하께서 자네에게 문화 훈장을 수여하실 참이라고 했으니까.”
김홍일의 그 말에 준영은 깜짝 놀랐다.
***
“대통령께서 말입니까…….”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적도 주실 거야.”
들어 보니 명예 국민도 아니고, 진짜 국적을 부여해 준단다.
작년에 심사를 통해 이중 국적을 허용하는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현재 안창호 선생 일가를 비롯한 해외의 독립투사 가족들이 심사를 받는 중이라고 했다.
“저도 그럼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자네에 대한 심사는 이미 끝났어. 무엇보다 각하께서 강하게 원하시니까.”
‘헐…….’
과연 단순한 호의일까?
준영은 자신이 아는 이승만이나 자유당 정권의 행태를 볼 때 결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미 지난번에 찾아왔던 김창룡을 봐도 알 수 있다.
편의를 봐주는 척하면서 밀수에 이용해 먹으려 들지 않았던가.
“왜? 뭔가 불만이라도 있나?”
“아무리 그래도 절차를 무시하는 행태가 마음에 안 듭니다.”
“다 나라를 위한 일 아닌가. 자네에게도 득이 되는 일이고.”
과연 득이 될까.
상황을 보니 한국 국적 대충 던져 주고 국가대표로 차출해서 부려 먹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독재자들이 스포츠를 잘 이용했으니까.’
과거의 히틀러, 무솔리니가 그랬고, 현재 스페인의 프랑코 정부도 진행 중이다.
그 때문에 지난여름 전지훈련에서 스페인은 제외했다고 버스비 감독이 말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 박스컵을 만든 박 씨나 프로 축구를 출범시킨 전 씨나…….’
2명의 군부 독재자도 개인적으로 축구를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자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후자는 우민화 목적으로 이용해 먹었다.
과정이 그러했기에 한국 축구는 건강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저 스팀팩만 맞고 국가대표팀 전력만 성장했고, 대중적인 관심도 그쪽으로 쏠렸다.
현재 자유당 정권도 별 차이는 없어 보였다.
아무리 반일 감정이 남다른 시대라고는 하나, 이기지 못하면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게 될 말인가.
“아무래도 자네는 영 마음에 안 드나 보군.”
자신의 굳은 표정을 본 김홍일.
준영은 잠시 망설였다.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그러자니 속이 답답했다.
‘무엇보다 이러다가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들먹이는 분들에게 질질 끌려가고 말걸.’
이에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준영이 양해를 구했다.
“사람을 좀 물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준영의 제안에 김홍일은 서기관이나 호위 등 동행해 온 대사관 직원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도 눈치를 챘다.
아무도 없어야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이 진심을 털어놓을 거란 사실을.
대사관 직원들이 모두 나가고, 준영의 경호원들도 자리를 떴다.
그리고 찬물 한 컵을 쭉 들이켠 준영은 진심을 털어놓았다.
***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장군님.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요.”
“뭐라고? 각하께서 자네를 지옥으로 끌고 가기라도 한단 말인가!”
“각하일 수도 있고, 그 주변에서 꿀을 빠는 놈들일 수도 있죠.”
김홍일의 얼굴이 금세 노기로 붉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장군께선 자유당 정부가 얼마나 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자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별거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전 그리 대단한 희생정신은 없어서 말이지요. 무엇보다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할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쿵!
갑자기 굉음이라도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준영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조국의 독립과 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해 헌신한 백전노장이 무시무시한 분노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큭, 눈앞에 염라대왕이 있는 것 같군.’
아니, 이 사람은 염라대왕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를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하면 앞으로 한국과는 영영 인연을 끊고 지내야 하리라.
그러기는 싫었던 준영은 차분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장군님, 저는 대한민국이 잘못되는 건 원치 않습니다. 외부에서 뭐라든지 앞으로 눈부시게 발전할 나라라고 확신하고 있고요.”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한 건가?”
“장군님도 작년에 귀국하셨으면 보고 들은 것이 있으실 겁니다. 자유당 정권의 정치 부정과 야당 탄압, 무엇보다 심각한 건 경제 불황이죠.”
“그거야…….”
전후로 발전한 제분, 제당, 면방직 산업이 미국의 원조가 끊기며 휘청이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삼백(三白) 산업이 잘나가는 중에 득을 본 건 소수의 재벌들뿐.
농촌은 여전히 피폐하고, 물가는 치솟아 오르고, 도시에는 실업자들이 들끓었다.
앞으로 더 심해지면 심해지지, 덜해지지는 않을 거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었다.
“절대 오래 못 갑니다. 선거, 아니 뭐가 됐든 큰일이 벌어지면 국민들이 폭발하고 말겠죠.”
“시민 혁명이라도 일어난다는 건가? 그렇게 해서 올바른 정부가 세워지면 좋은 일 아닌가?”
“물론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죠. 프랑스 대혁명이 벌어지고 다들 행복해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준영의 지적에 김홍일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혁명 이후 혼란.
그 혼란의 수습을 빙자하여 거병하는 군부 세력.
굳이 프랑스뿐만 아니라, 과거 한국사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조선 건국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원나라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을 청산하며 개혁을 시도하던 공민왕은 잇따른 외침과 내부 변란에 무너지고, 그 틈을 타서 동북면의 군벌 이성계가 등장했다.
그리고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혼란한 고려를 무너트리고 왕위에 올랐다.
‘확실히 위험해. 지난번에 만난 안춘생도 군부가 심상치 않다고 이야기했었고…….’
현재 군의 부정부패는 심각했다.
북괴의 위협과 도발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김창룡처럼 군수물자를 횡령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
그렇다 보니 일반 사병들은 헐벗고 굶주렸고, 겨울만 되면 사단마다 동사자가 허다하게 나왔다.
장교들 역시 쥐꼬리만 한 봉급으론 부족해서 보급받는 건빵을 팔아 생계를 꾸릴 정도로 열악한 형편이었다.
‘확실히 누군가 불이라도 붙이면 펑 하고 터질 만한 상황이지.’
그동안 외교관 신분이라서 모르고 있던, 아니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현실.
그 현실을 눈앞에 있는 청년이 신랄하게 일깨워 주었다.
***
본문에도 언급했지만, 김홍일 장군은 지연전에 일가견이 있으셨습니다.
본디 중국 국민당군은 1차 세계 대전의 독일군을 벤치마킹해서 지형을 이용한 지연전과 방어전에 익숙하다 보니, 김홍일 장군께서도 당연히 그 교리를 배우신 거죠.
하지만 이에 큰 손실을 당하며 중국 내륙으로 끌어 들어간 일본군은 중국군은 항상 도망친다며 빈정거렸고, 공세를 우선하던 미군 역시 불만이 많았죠.
이 점은 한국 전쟁 때도 마찬가지라 미군 측과 갈등이 심했고, 결국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되기 전 육사 교장으로 전보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