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202. 동쪽으로
1959년 1월 3일 오후.
올드 트래퍼드에서는 시즌 26라운드 맨유와 블랙풀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 3라운드 패배를 설욕할 기세로 나온 붉은 악마들.
전반 7분 만에 데니스 바이올렛이 선제골을 터트리며 기선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이어 15분 뒤에는 던컨의 얼리 크로스를 받은 바비 찰튼이 침착하게 수비수 지미 암필드를 제치며 두 번째 골을 넣었다.
전반전 2 대 0.
안심할 만한 점수 차였지만, 준영이나 맨유 선수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 팀에는 어떤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팀에 전의를 불어넣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후반전엔 분명히 그가 나설 테지.’
필드의 영웅 스탠리 매튜스.
준영의 예상대로 그는 후반전이 시작되자 무서운 저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던, 그 아저씨 놓치면 안 돼!”
“걱정 붙들어 매라고!”
던컨은 패스를 받자마자 매섭게 측면으로 달려온 스탠리 매튜스의 앞을 막아섰다.
양발로 공을 툭툭 치며 빈틈을 노리던 매튜스는 힐끔 페널티 박스 중앙을 바라보았다.
‘크로스다!’
던컨이 크로스를 막기 위해 덤벼든 순간, 매튜스는 크로스를 찰 듯하던 발 안쪽으로 공을 뒤쪽으로 보낸 후, 재빨리 돌아서 돌파를 시도했다.
“우와, 방금 뭐지?”
“매튜스가 순식간에 빅 던크를 제쳐 버렸어!”
기자와 관중들이 감탄하는 가운데, 준영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크루이프 턴이잖아!’
네덜란드 축구 레전드 요한 크루이프가 선보인 테크닉.
저거 혹시 매튜스가 독자적으로 터득한 걸까?
아무튼 지금은 그 의문을 풀기보다, 돌파해 오는 매튜스를 막아야 했다.
“더는 못 가십니다!”
“훗, 자네 맘대로 결정할 게 아니지!”
슬쩍 몸을 기울이며 페인팅을 시도하던 매튜스.
몸을 낮춘 상태에서 공을 툭 치며 준영의 옆으로 쏜살같이 스쳐 갔다.
‘이런, 놓쳤다!’
매튜스가 슈팅하는 순간, 빌 포크스가 태클을 날렸다.
그런데 그것도 페인트.
슈팅을 하지 않고 한 차례 접던 매튜스는 태클에 걸려 쓰러졌다.
삐익-!
심판이 주저하지 않고 휘슬을 불었다.
페널티킥을 내준 빌이 머리를 움켜쥐자, 스탠리는 그의 등을 도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뭐 씹은 것처럼 인상을 구기는 준영과 던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하핫, 방심은 금물이야, 젊은 친구들.”
“스탠 아저씨, 요즘 나이 거꾸로 먹고 있는 거죠?”
던컨의 물음에 매튜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준영을 바라보았다.
“요즘 먹고 있는 건 구운 마늘뿐인데? 어떤 친구가 적극 추천해 줘서 말이야.”
“으윽…….”
스탠리 매튜스가 따낸 페널티킥은 블랙풀의 하프백 이안 펜톤이 깔끔하게 성공시켰다.
기뻐하며 블랙풀 진영으로 돌아가는 매튜스를 보며 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 나이에 새로운 테크닉 습득이라니, 확실히 전설은 전설이군. 괜히 발롱도르 초대 수상자가 아니었어.”
“쳇, 발롱도르 그거 바비도 받는 상이잖아.”
지난해 12월 초, 각국의 스포츠 기자들은 1958년 발롱도르 수상자로 맨유의 바비 찰튼을 선정했다.
‘원래 수상자는 프랑스의 레몽 코파일 텐데…….’
하지만 역사는 바뀌었다.
발롱도르 트로피는 유러피언 컵과 월드컵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인 바비 찰튼에게 건네졌다.
예상치 못한 수상에 바비는 무척이나 당황하면서 쑥스러워했다.
“내가 볼 땐 바비보다 존이 받는 게 맞았다고 생각해.”
“뭐, 기자들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지.”
무엇보다 이 시대 발롱도르는 유럽 선수들을 위한 상.
지난 시즌 준영은 홍콩 시민권자로 활동했기에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 본토 시민권을 받았으니 올해는 기대해 봐도 되려나?’
디 스테파노도, 훗날의 에우제비오도 모두 유럽 국적을 얻고 발롱도르를 받았으니까.
“자자, 리 경, 정신 차리고 경기에 집중합시다. 한 골 더 먹으면 승리 보너스가 날아가고 말 것이오.”
던컨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준영은 맞장구를 쳤다.
“그래야겠구려, 에드워즈 경. 그대의 부인이 바가지를 긁게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우리 몰리는 바가지 안 긁어!”
시시덕거리던 둘은 킥오프가 되자 표정을 싹 바꾸고는 경기에 집중했다.
미드필드 지역에서 몇 차례 공방이 펼쳐진 후, 공을 잡은 맨유 선수들이 블랙풀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던컨이 측면으로 오버래핑하며 블랙풀 수비의 시선을 끄는 사이, 프레디 굿윈에게 패스를 넘겨받은 준영은 중앙으로 공을 몰고 갔다.
그 앞을 스탠리 매튜스가 떡하니 가로막았다.
“수비도 하십니까?”
“자네 팀 공격수들은 곧잘 하던걸?”
발 빠르고 노련한 매튜스는 준영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공격수 출신이라 그런지, 상대가 어떤 식으로 노리고 드는지 간파하는 듯했다.
‘아재요, 진화 좀 자제요.’
고개를 내젓던 준영은 좌측면으로 재빨리 오버래핑을 시도하는 이안 그리브스를 보았다.
그에게 패스하는 척 공을 뒤로 빼낸 후 잽싸게 돌면서 매튜스를 제쳐 냈다.
‘그건 아까 내가 썼던……!’
즉석에서 기술을 베껴 낼 줄이야!
진실을 모르는 매튜스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뻐엉-!
제치기 무섭게 터진 무회전의 중거리 슛.
갑자기 방향을 바꾸며 뚝 떨어진 슈팅은 블랙풀 골대를 흔들었다.
「골! 골입니다! 스탠리 매튜스의 코앞에서 터진 캡틴 리의 강력한 중거리 슛! 유나이티드, 블랙풀의 추격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흥분한 중계 캐스터만큼이나 들뜬 관중들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Lee, Lee~ Captain Lee!”
“Oh, Captain! Our Captain! Pride of United~”
붉은 레플리카를 입은 서포터들의 흥겨운 구호.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구호를 듣고 있던 매튜스는 가늘게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유나이티드의, 존 Y. 리의 시대인가.”
한때 자신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풋볼 리그에 떠오른 새로운 별들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매튜스는 거슬리거나 섭섭한 마음은 없었다.
새로운 강적과 스타플레이어들의 활약은 항상 흥분을 불러일으켰으니까.
버스비의 아이들과 저 동양의 거인은 특히 그랬다.
자신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어 주고 있었다.
“좋아. 그래, 어디 끝까지 해보자고.”
끝날 때까진 포기할 수 없다.
축구화 끈을 고쳐 맨 매튜스는 다시 기운차게 달려 나갔다.
***
26라운드 경기를 3 대 1 승리로 마친 준영은 곧장 맨체스터 공항으로 이동했다.
저녁에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로 했기 때문.
“저거야?”
던컨을 비롯해 배웅을 나온 팀원들은 프로펠러 엔진이 4개 달린 커다란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응, 미국 록히드에서 만든 컨스텔레이션이라는 여객기야.”
“그러니까 저게 네 것이라고?”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준영이 사업을 해서 굉장한 부자가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비행기를 살 정도일 줄이야!
“내 것이라기보다 회사 거지.”
“그 회사가 네 거잖아.”
“아냐. 투자를 해서 지분을 가졌을 뿐이지. 저건 엄밀히 따지면 렌트한 거라고.”
그동안 미스터리 푸드뿐만 아니라 의류나 광고 회사, 알루미늄 캔 관련 특허 수입도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
여기에 김창룡이 해외로 빼돌린 자산은 덤.
이 자금으로 준영은 토목이나 유전 개발뿐만 아니라 유통과 항공 운송에도 투자했다.
“우리 회사가 요새 프랑스에서 식자재 수입을 하거든. 만든 걸 유럽 쪽으로 되팔기도 하고.”
“그래, 그렇다고 들었어.”
“식품이나 식자재라는 게 신선도가 중요하잖아. 그렇다 보니 대량으로 항공 운송 계약을 맺는 김에 투자도 하게 된 거지.”
“근데 네 일행이 타기엔 너무 큰 비행기를 빌린 거 아닌가?”
해리 그렉의 물음에 준영은 고개를 돌렸다.
“우리 일행 말고도 동행할 사람들이 있어요. 거기다 한국 지부나 동업자분에게 전할 기자재도 있고요.”
“겸사겸사란 거구만.”
이제 이해가 되었던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조심해서 잘 다녀와.”
“연락도 꼬박꼬박 하고.”
“주장, 돌아올 때 선물 부탁해요!”
다들 준영이 고향에 잘 다녀오기를 기원했다.
그런 팀원들과 악수를 나눈 준영은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버트와 자매들에게로 다가갔다.
“우리 애들을 잘 돌봐 주게.”
“네, 걱정 마십쇼.”
알버트의 당부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가기 전에 물어야겠다는 생각에 그에게 말을 건넸다.
“정말 안 가실 겁니까?”
“몇 번이고 말하지 않았나. 나는 가지 않을 걸세.”
노구의 몸으로 장거리 비행이 힘들기도 하지만, 알버트가 동행을 거절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르신 입장에선 자식의 무덤을 보는 게 너무 괴로운 일일 테니까.’
준영도 억지로 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손을 흔드는 알버트를 뒤로하고 자매들과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
준영 일행이 탄 컨스텔레이션은 동쪽으로 날아갔다.
늦은 밤 비행기는 로마에 착륙했고, 준영 일행은 그곳의 호텔에서 1박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이란의 테헤란을 향해 다시 날아갔다.
가아아앙-
‘시끄러운 엔진 소리도 그럭저럭 적응이 되는군.’
적응이 안 되는 건 따분함이었다.
최대 110명이 탈 수 있는 비행기에는 준영 일행과 승무원들, 그리고 이명철 회장이 부탁한 전자 부품 관련 고문과 기술자들이 타고 있었다.
기술자들이 포커로 시간을 죽이는 사이, 리즈와 그녀의 동생들은 방학 과제에 열중했다.
한국에 들렀다 돌아갈 때면 개학이라 게으름을 피울 틈이 없었지만…….
“으앙, 심심해!”
막내 카린이 공부만 하기 따분했던지 독서 중이던 준영을 졸라 댔다.
“오빠야, 뭐 재밌는 거 없어?”
“재밌는 거라……. 그럼 젠가나 할까?”
“응, 그거 할래!”
쌓아 올린 나무토막을 밑에서 하나씩 빼서 쌓아 올리면 되는 간단한 게임.
저택에 있을 때 카린도 몇 번 해 본 적이 있었다.
다만 간단한 게임이다 보니 금세 흥미가 식어 버렸다.
“오빠야, 다른 거 없어? 재미난 얘기 같은 것도 괜찮은데.”
“음, 그럼 해리 포터 얘기를 해 줄게.”
“해리 포터?”
“그러니까 어둠의 마왕의 손에서 살아남은 소년인데…….”
준영이 옛날이야기를 하듯 해리포터 시리즈를 이야기하는 사이에도 비행기는 계속 날아갔다.
테헤란에서 연료를 보급한 후, 다시 콜카타로 날아갔다.
그리고 방콕을 거쳐 대만의 타이페이 쑹산 공항에 도착했다.
“빌어먹을 냉전!”
비행기에서 내린 준영은 내심 분통을 터트렸다.
소련과 중공 영공을 통과하지 못해서 남회 노선을 따라가다 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오래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름 각오를 하고 오긴 했지만 겪어 보니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거의 다 왔네요. 대만에서 한국까진 금방이지 않아요?”
“금방이라고 해도 3시간은 더 걸리지.”
“지금까지 걸린 시간에 비하면 짧잖아요.”
리즈의 말대로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여독이 있다 보니 바로 날아가긴 힘들었고, 일행은 타이페이의 호텔에서 하룻밤 쉬다 가기로 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나와 호텔로 가는 준영 일행의 앞으로 차가 한 대 멈춰 섰다.
***
이 비행기가 록히드 컨스텔레이션입니다. 1950년대 제트 여객기가 나타날 즈음에도 여객기 시장에서 주력 기종이었죠.
당시 비행기가 지금만큼 빠르지도 않은데, 냉전 때문에 우회해서 갈 수밖에 없어 여행이 참 난감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