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201화 (201/400)

Round 201. 기묘한 꿈

맨체스터 남동쪽 더비셔의 벅스턴.

25라운드 아스톤 빌라 원정을 마지막으로 12월 일정을 마친 준영은 리즈와 함께 온천 휴양지로 소문난 이곳으로 데이트를 왔다.

“여긴 고대부터 유명했대요. 로마인들은 이곳을 여신이 목욕하고 간 곳이라 여겼고요.”

“굉장히 오래된 마을이구나.”

본격적으로 관광지가 된 것은 18세기부터였다.

당시 데몬셔 공작이었던 윌리엄 캐번디쉬가 이곳에 온천 마을을 세웠고, 빅토리아 시대 때 온천 붐이 일면서 대호황을 누렸다고.

그래서 작은 마을임에도 오페라 하우스도 있고, 놀이 공원에 호텔과 리조트, 크고 작은 숙박 업체들도 많았다.

“두 번의 전쟁 탓에 쇠퇴하긴 했지만, 최근에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대요.”

“경기가 호황이면 관광 붐이 일기 마련이니까.”

빅토리아 시대풍으로 근사하게 지어진 오페라 하우스는 지금은 공연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영화를 상영하는지,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드라큘라……. 사루만 옹이 출연하신 영화가 여긴 이제 개봉하나 보군.”

“그야 지방 소극장이니까요.”

영화 포스터를 보는 리즈는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9월에 준영과 이 영화를 봤을 때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그의 팔에 매달려 있었던 게 생각났기 때문.

준영도 그때 일이 떠올랐던지 짓궂은 장난을 쳤다.

“흐흐흐! 맛있게 생긴 아가씨로군. 어디 피 맛 좀 볼까?”

드라큘라 흉내를 낸 준영이 금방 달려들 것처럼 입을 쩍 벌리자, 리즈는 그를 슬쩍 밀어냈다.

“드라큘라 백작은 그리 무드 없이 덤비지 않았어요.”

“무드라……. 그럼 이렇게 하면 되나?”

자신을 떠미는 리즈의 손을 잡아 슬쩍 품으로 끌어당긴 준영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아까보다 더욱 발그레해진 리즈가 손바닥으로 준영의 가슴을 쳤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알겠습니다, 여왕님. 일단 구경부터 하죠.”

준영은 리즈와 함께 벅스턴의 온천수를 맛본 후, 남쪽에 있는 종유석 동굴을 구경했다.

그런 다음 미리 전화로 예약해 놓았던 팰리스 호텔로 갔다.

이 호텔은 스파 리조트로 유명했다.

그래서 유명한 이들도 많이 다녀갔는지 로비에는 방문자의 사진과 사인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조지 버나드 쇼? 분명히 들어 본 이름인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명 작가잖아요. 여기 메리 픽퍼드의 사인도 있네요.”

“아, 그 사람은 알아. 무성 영화 시대의 유명 배우라고 들었어.”

이렇게 구경하고 있을 때, 호텔 지배인이 다가와 준영에게 정중히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캡틴 리, 사인을 부탁합니다.”

“아까 장부에 했는데요?”

“이건 소장용입니다. 월드컵 챔피언 플레이어를 그냥 보내 드릴 수는 없죠.”

“아하……!”

로비의 호텔 컬렉션이 늘어날 모양이다.

한글과 영문 두 가지로 시원하게 사인을 해 준 준영은 이후 하우스맨의 안내를 받아 예약한 특실로 왔다.

“와, 굉장히 호화롭네요.”

“그러게. 확실히 본전은 뽑고 가야겠어.”

빅토리아풍으로 꾸며진 넓은 방 안을 한 번 둘러보고 있을 때, 여성 안내원이 찾아왔다.

호텔 시설 및 온천 관련 서비스를 알려 주려고 온 사람이었다.

“수영장은 온천수가 채워져 있으니 바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일단 마사지나 피부, 모발 관리 등의 헬스 케어를 권유하고 싶습니다만?”

“네, 그렇게 할게요.”

미모 관리에 관심이 많았던지, 리즈는 냉큼 승낙했다.

그녀와 달리 온천수에 얼른 몸을 담그고 싶었던 준영은 먼저 수영장으로 왔다.

“유나이티드의 존 Y. 리잖아!”

“진짜 운동 잘할 것 같은 몸이네요.”

수영장에 있던 사람들은 준영을 알아보고 연방 눈길을 던졌다.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시선을 받았다.

“저 딱 벌어진 어깨랑 우람한 팔, 탄탄한 가슴에 식스팩… 작품이 따로 없군요.”

“다리 근육 좀 봐. 지구도 통째로 걷어찰 수 있을 것 같아.”

“어쩜, 정말이지 크고 늠름하네요.”

배 나온 남편이나 비리비리한 애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꽤 노골적인 시선과 추파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풀에 몸을 담갔다.

“캬, 좋다!”

할배들이나 할 만한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만큼 온천수는 반 시즌 동안 지친 몸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풀어 주고 있었다.

“승점에 여유가 있으니 좋구나. 이런 여가도 즐기고.”

시즌 초에 팀 성적이 잠시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이후 순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수비도 단단해지고, 공격에서도 순간 압박과 던컨의 오버래핑 등 여러 옵션들이 자리를 잘 잡았으니까.

덕분에 2위인 울버햄프턴과 두 경기 정도 승점을 벌려 놨다.

‘다음 달 3일 블랙풀과의 경기만 잘하면 안심하고 한국에 다녀올 수 있겠지.’

이미 방한에 대해서는 코칭스태프나 구단과도 이야기를 끝내 놓았다.

블랙풀전 외에 1월의 경기라곤 10일 FA컵 노리치 시티 FC 경기와 31일 시즌 27라운드 뉴캐슬전뿐.

‘31일 전에는 복귀할 예정이고, FA컵 경기는 내가 빠져도 문제가 되진 않겠지.’

동료들의 실력은 믿을 만한 데다, 시즌 중 새로 영입한 선수들도 있으니까.

준영이 배영을 하며 지친 근육을 풀고 있을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수온은 어때요? 너무 뜨겁지 않아요?”

준영은 대답 없이 리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말이 없죠?”

“아, 우리 여왕님이었구나. 난 고대에 나타났다는 여신님인 줄 알았지.”

“아이, 준도 참…….”

호텔 헬스 케어가 확실히 뛰어나긴 한 모양이다. 좀 전에 봤을 때보다 리즈의 미모가 더 빛나고 있었으니까.

“너무 뚫어지게 보지 말아요. 부끄러우니까.”

“싫어. 안 보면 아까울 것 같으니까.”

촌티 나는 50년대 수영복도 리즈가 입으니 느낌이 또 달랐다.

테니스로 단련된 몸매는 준영의 21세기 트레이닝에 힘입어 한 차원 더 아름답게 다듬어졌다.

‘이 정도면 지난번에 봤던 개빠 할망구보다 훨씬 낫군.’

우리 여왕님이 최고시다.

준영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풀 안으로 들어온 리즈가 말했다.

“1월에 한국에 가는 거 말인데요.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안 될 건 없지만, 방학 끝나면 바로 시험이라고 하지 않았어?”

맨체스터 대학의 겨울 방학은 1월 14일에 종료.

새 학기를 시작하자마자 시험이다 보니 방학이라고 마냥 놀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즈는 한국에 꼭 찾아가고 싶었다.

“부산이란 곳에 UN군 묘지가 있다고 들었어요. 아버지도 거기 잠들어 계실 테니까…….”

“그렇다면 가야지.”

이역만리로 떠나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마음에 묻어 둔 그리움과 슬픔을 조금이라도 풀고 싶을 것이다.

“고마워요.”

“고맙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리즈의 마음을 미리 헤아리지 못했으니까.”

준영은 자신의 품에 안기는 연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자신을 외롭지 않게 해 주었던 소중한 사람.

이번에도 그녀 덕분에 1월의 머나먼 여정이 따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

2026년 북미 월드컵.

9만의 관중들이 들어찬 LA 로드볼 스타디움에 대한민국과 이탈리아가 8강 진출을 두고 맞붙고 있었다.

전반전 이탈리아의 맹공을 0 대 0으로 간신히 넘긴 한국은 후반전이 되자 노장 센터백 권경언을 빼고 이준영을 투입했다.

“준영아, 피나몬티 녀석을 잘 막아야 한다.”

“맡겨 두십쇼!”

이탈리아의 원톱 피나몬티는 세리에 A에서 알아주는 피지컬 깡패.

그는 전반전에 숱하게 한국 문전을 두들겨 댔고, 그 과정에서 권경언은 부상을 입고 교체되고 말았다.

“피나몬티인지 시나몬티인지 접근하면 박살을 내 주지.”

장담한 대로, 준영은 피나몬티 쪽으로 전달되는 패스는 죄다 걷어 냈다.

문전으로 날아드는 공중볼도 먼저 뛰어올라 걷어 냈다.

챔스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격침시켰던 실력이 그대로 나왔던 것.

답답했던지 피나몬티는 거칠게 몸싸움을 걸기도 했고, 그래도 안 되니 손으로 떠밀면서 시비를 걸었다.

“Minchione!”

“뭐, 인마? 죽을래? Chiudi il becco!”

이탈리아의 후반 공격이 지지부진한 틈을 타서 한국 대표팀은 볼 점유율을 높이며 상대 문전을 두들겼다.

하지만 이탈리아 특유의 카테나치오를 부수기란 쉽지 않았다.

애써 수비를 제치고 날린 슛도 골키퍼 돈나룸마의 선방에 막히기 일쑤였다.

“젠장, 피자 새끼들, 왜 이리 질기죠?”

“그야 절대 질 수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현재 경기가 열리는 로드볼 스타디움은 1994년 로베르토 바조가 승부차기 슛을 날리면서 우승컵을 놓친 쓰라린 장소.

거기다 이탈리아는 2002년에 토너먼트에서 한국에 역전패한 바 있었다.

져서는 안 되는 장소에서, 패배를 갚아 줘야 할 상대를 만난 것이다.

“흥, 너희들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지.”

후반 말미, 준영은 감독에게서 전방으로 올라가라는 사인을 받았다.

이에 냉큼 이탈리아 문전으로 접근한 준영.

그때 측면에 있던 손웅민이 크로스를 넣었다.

거의 슈팅급으로 빠르고 강하게 날아온 크로스.

이탈리아 수비수 바스토니가 뛰어올랐다.

하지만 문전으로 쇄도해 온 이준영이 그보다 높은 곳에서 공에 머리를 맞혔다.

방향이 꺾인 공은 돈나룸마의 손을 스치며 그물을 세차게 흔들었다.

“들어갔다아아아-!”

“한국 골! 대한민국 선제골!”

초조하게 지켜보던 대표팀 서포터 붉은 악마와 LA 교민들은 신이 나서 펄펄 뛰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경기를 보고 있던 대한민국 축구팬들도 마찬가지.

Again 2002.

모두가 기대하는 상황을 현실로 만들어 낸 젊은 선수의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환희와 감격.

생애 최고의 순간, 준영은 가장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저편 관중석에 우뚝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중년의 남자.

특이하게도 주변 사람들과 다르게 공군 제복을 입고 있었다.

‘루이스 대령?’

프레드로 남작의 아들이자, 리즈의 아버지.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준영아!”

기뻐하며 달려오던 선배 손웅민과 대표팀 동료들의 놀란 음성.

뒤이어 주변에서 비명과 당황한 외침이 들려왔다.

“꺄아아악!”

“뭐야, 저 선수, 왜 저래?”

어리둥절했던 준영은 자신의 몸을 보곤 깜짝 놀랐다.

마치 모래처럼 부스러지고 있는 손.

이미 두 다리는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목소리도 도중에 지워져 버렸다.

그리고 눈앞이 흐려지면서 이내 무서운 어둠이 짙게 깔렸다.

***

“헉!”

눈을 번쩍 뜬 준영.

그의 시야에 어스름한 호텔 방의 풍경이 비췄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서 단잠에 빠져 있는 귀여운 연인의 모습도.

‘꿈이었구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과거,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21세기 영광의 순간.

지난 기억을 꿈으로 보는 일은 종종 있었다.

미래에 있는 친구들과 보육원 동생들을 보기도 했고, 인터넷으로 미뤄 둔 드라마와 영화를 보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왜 자신의 21세기 꿈에 루이스 대령이 나타난단 말인가.

‘설마 자기 딸 건드렸다고 악몽을 꾸게 한 건가?’

그랬다면 벌써 진작 나타나 응징을 하지 않았을까.

리즈와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한 게 석 달이 다 되었는데 말이다.

거기다 꿈에서 본 루이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뭔가를 경고해 주는 걸지도…….’

무엇을 경고하는 걸까?

또 암살 테러 같은 것이 일어나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무슨 사고가 벌어지는 걸까.

‘21세기의 꿈을 꾼 걸 생각하면 그와 관련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준영은 혹시나 위험이 될 만한 것은 모두 체크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야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

***

벅스턴의 온천수는 꽤 유명해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도 애용했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도 이 지역을 들러 요양 치료를 했다고 합니다.

1, 2차 세계 대전 때는 연합군 병사들 병원과 재활 시설이 있었다고 하고요.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는 헬스 케어 쪽으로 유명해져서 사우스햄튼, 노팅엄 포레스트, 맨체스터 시티 등의 팀들이 이곳에서 훈련 후 휴양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뭐, 지금도 관광지로 유명한 모양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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