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99. 기죽지 않은 새싹
“날 많이 연구한 모양이군, 무어 경. 칭찬하는 뜻에서 신기한 걸 보여 주지.”
잽싸게 자세를 바꾼 준영이 슬쩍 몸을 돌리며 발바닥으로 공을 굴렸다.
‘스트레인지 룰렛!’
재빠르게 돌면서 수비수를 제쳐 내는 기술.
이미 워낙에 유명해진 기술이라 바비 무어도 대응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길목을 잡았지만…….
‘뭐야, 왜 갑자기 속도를 줄였지?’
절반 정도 돈 순간, 갑자기 준영의 동작이 느려졌다.
그 바람에 서둘러 대응하려던 무어가 오히려 중심을 잃었다.
‘마르세유 턴으로 가는 척하다가 스쿱 턴!’
몸을 돌리며 바깥쪽 발로 슬쩍 찬 공이 무어의 다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잽싸게 측면으로 돌아 들어가는 준영.
이미 중심이 무너진 무어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아, 안 돼!’
무어가 뚫리는 것을 보고 다른 수비수들이 달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에서 준영은 침착하게 휘어 차서 골대 상단 구석에 공을 박아 넣었다.
「골인! 캡틴 리의 이번 시즌 첫 골! 전반 32분, 유나이티드가 선제골을 터트리며 앞서갑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열변을 토하는 중계 캐스터만큼이나 관중들도 우레 같은 환호성을 터트렸다.
“드디어 터졌구나!”
“기다리고 있었다고!”
코너 플래그 쪽으로 달려간 준영은 보란 듯이 뛰어올랐다가 양팔을 펼쳤다.
그 힘차고 시원한 골 셀레브레이션에 관중들의 함성이 더욱 높아졌다.
물론 당한 입장인 웨스트햄 선수들의 반응은 저기압이었다.
“젠장, 거기서 또 다른 기술을 쓸 줄이야!”
분통한 마음에 주먹으로 잔디를 내리친 무어.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아직 경기 시간은 한참 남았으니까 추격하거나 역전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리라.
뺨을 두들기며 분한 마음을 억누른 미래의 레전드는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
준영의 선제골로 기선 제압에 성공한 맨유는 이후에도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그 공세를 주도한 것은 던컨 에드워즈였다.
“자, 나도 슬슬 나가 볼까?”
던컨은 지난 6라운드에 출전하지 못했다.
훈련 중 충돌로 가벼운 부상을 당해서 버스비 감독이 원정 명단에서 뺐기 때문.
경기 초반에 롱 패스를 쏴 주는 것 외에는 후방 수비에 열중하던 던컨은 과감한 오버래핑으로 웨스트햄을 긴장시켰다.
“젠장, 동양인 다음엔 빅 던크인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을 셈이로구만.”
던컨은 측면으로 수비수들을 끌어내면서 바비 무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패스를 뿌려 댔다.
인터셉트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무어도 던컨의 플레이에는 진땀을 뺐다.
‘원래 역사에선 만나지 못했던 레전드들의 격돌이라…….’
던컨과 역할을 바꿔 후방을 지키고 있던 준영은 두 천재의 대결을 흥미진진한 눈길로 구경했다.
‘무어가 쩔쩔매는군. 천재성에 있어선 던컨이 한 수 위인가?’
거기다 경험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던컨은 이미 프로에서 200경기 가까이 뛴 데다, 국가대표로도 선발되었으니까.
“여, 무어라고 했냐? 실력 좋은데? 나중에 우리 팀에 오지 않을래?”
“터무니없는 소리!”
무어는 단칼에 던컨의 제의를 거절했다.
사실 이미 2월에 맨유의 지미 머피 코치가 영입을 타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발탁한 테드 팬튼 감독이나 말콤 앨리슨을 배신하기 싫었기에 이적을 거부했다.
“쩝, 유럽 챔피언 팀을 마다하다니. 너 나중에 이불킥 할걸?”
“내가 이불을 왜 차? 이상한 소리로 정신 사납게 하지 마!”
“응, 정신 사납게 하려고 한 소리였어.”
능글맞게 웃던 던컨은 한 번 페인트 동작을 넣더니 몸을 슬쩍 돌리며 잽싸게 방향을 전환했다.
‘이, 이건 아까 존 Y. 리가 썼던!’
스쿱 턴.
바비 무어뿐만 아니라 준영도 놀랐다. 또 기술 하나를 도둑맞았으니까.
무어를 제쳐 낸 던컨은 곧장 슈팅을 날렸다.
쫙 뻗어 나간 슈팅은 포스트바를 맞고 튕겨 나왔다.
“이런 씨…….”
입에서 식빵(?)을 끄집어내던 던컨은 알버트 스캔론이 튀어나온 공을 밀어 넣자 도로 냉큼 삼켰다.
스코어 2 대 0.
승부의 추가 맨유 쪽으로 기울어지는 만큼, 무어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같은 기술에 또 당하다니!’
속이 상해서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지만, 무어는 꾹 눌러 참았다.
관중석 어딘가에서 앨리슨이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못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무어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
전반전을 2 대 0으로 마친 맨유는 후반전에도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알버트 스캔론의 중거리 슛을 시작으로, 콜린 웹스터의 패스를 받은 데니스 바이올렛의 하프 발리슛, 숀 코너리의 헤딩슛이 연달아 웨스트햄의 골대를 노렸다.
좌우, 중앙 가릴 것 없이 날아드는 슈팅에 웨스트햄 수비수들은 진땀을 뻘뻘 쏟았다.
“웨스트햄은 거의 중앙선을 못 넘고 있군.”
“유나이티드가 공을 더 많이 잡고 있어. 하지만 그런 것치고 슈팅은 적은 편이군.”
기자들이 본 대로 맨유는 볼 점유율이 높았지만, 실제 슈팅으로 만들어지는 공격은 많지 않았다.
웨스트햄 문전을 노리는 패스들의 대부분이 바비 무어에게 끊겼으므로.
“와, 저 애송이 녀석, 기를 쓰고 쫓아다니네.”
“인터셉트 능력 하나는 정말 타고난 녀석 같아.”
무어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웨스트햄은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롱 패스를 통한 역습은 준영에게 끊기고, 중앙에서의 패스 시도도 바비 찰튼과 로니 코프의 대응 때문에 차단.
오히려 시원찮은 공격은 측면에 빈 공간만 내주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던컨이 인정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던컨이 오른쪽 측면 깊숙이 들어갑니다. 노엘 켄트웰이 막습니다만, 던컨이 따돌리고 크로스! 아, 골입니다! 골! 유나이티드 세 번째 골!」
흥분한 나머지 중계 캐스터는 자세한 골 상황을 설명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본인도 그것을 뒤늦게 알았던지, 맨유 선수들이 골 셀레브레이션을 하는 사이 설명을 보탰다.
「던컨의 긴 크로스를 반대편의 알버트 스캔론이 몸을 날리며 재차 올려 준 것을 중앙에서 숀 코너리가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골이군요.」
숀이 쇄도할 때 바비 무어도 바싹 붙어 경합했지만, 헤딩슛을 막아 내지 못했다.
골문으로 달려드는 상대를 저지하는 게 쉽지 않은 데다, 숀의 피지컬도 만만찮았기 때문.
“하… 최악의 날이구나.”
무어의 입에 실소가 걸렸다.
눈앞에서 3골 모두 막아 내지 못했다.
화가 나다 못해 이젠 허탈한 기분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게 유럽을 제패한 붉은 악마들의 진짜 실력인가?’
승리에 대한 확신은 이미 희미해져 버렸다.
그렇지만 무어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골, 일단 한 골이라도 넣어야 해!’
결과야 어떻든 웨스트햄이 약하지 않다는 걸 저 붉은 악마들에게 똑똑히 알려 주고 싶었다.
***
무어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빅터 키블을 비롯해 앤드류 말콤, 마이클 그라이스, 더글러스 와그까지 죄다 맨유 수비진을 넘지 못했기 때문.
답답한 마음에 무어 본인이 공을 몰고 상대 페널티 박스까지 돌진해 봤다.
“그 정도 드리블로는 어림도 없어.”
“큭!”
슈팅도 하기 전에 이준영의 차징에 밀려 공을 빼앗겨 버렸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준영의 발에서 떠난 공이 바비 찰튼을 거쳐 던컨에게로 이어졌다.
경기 내내 공수를 뛰어다니면서도 지치지 않았던 던컨은 웨스트햄 수비수들을 툭툭 밀어 버리고는 골대에 공을 꽂아 넣었다.
결국 최종 스코어는 4 대 0.
팀의 참패에 바비 무어는 필드에 주저앉은 상태로 일어나지 못했다.
“울지 마. 넌 충분히 잘했어.”
준영이 다가와서 한 말에 무어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안 울었거든요.”
“그러냐?”
준영은 손을 내밀어 무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그와 유니폼을 교환했다.
“오늘 이 참패, 반드시 갚아 줄 겁니다.”
“그런 소리 하던 녀석들은 많던데 말이야.”
무어가 발끈하려 들자, 준영은 씩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대부분 기억나지 않지만, 네 이름은 확실히 머릿속에 새겨 둘게. 그러니까 힘내시길, 바비 무어 경.”
보리는 싹이 짓밟혀도, 눈 속에 파묻혀서도 다시 일어선다.
과거 보리 싹과 같던 시절이 있었던 준영은 강인한 눈빛을 가진 바비 무어 역시 꿋꿋이 일어나 우뚝 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근데 혹시 우리 팀에 올 생각은 없냐?”
“…전혀 없거든요.”
“그러지 말고. 보너스 넉넉하게 받을 수 있고, 유러피언 컵에도 나갈 수 있다니까?”
“안 간다니까요!”
기죽지 않은 새싹은 날카롭게 가시를 드러냈다.
피식 웃음을 지은 준영은 미래 잉글랜드 축구의 거목이 될 소년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
도쿄의 기방.
코다마 요시오는 이곳에서 몰래 흑룡회 쪽 간부와 만나고 있었다.
“츠지 의원의 행방을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단 말입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간부의 말에 따르면 수도사로 변장해서 아일랜드로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뒤로 깜깜무소식이라고.
“듣자니 코다마 회장은 CIA와 연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쪽 정보력을 이용해서 행방을 알아내 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건 좀…….”
현재 동아시아에서 CIA는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동태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극우 야쿠자 두목이지만, 반공 성향을 가진 코다마는 그들과 협력 관계로 지내는 중이었다.
아무리 협력 관계라 하지만, 과연 츠지의 행방을 알아봐 주겠는가?
대공 방첩 업무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니 무시하거나 건성으로 일관할 게 틀림없다.
“아무래도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변을 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듣자니 츠지 의원의 계획이 그들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거였다고 하던데…….”
“그쪽에서 의도를 알고 보복을 했을 수 있다는 거군요. 아, 혹시 영국 정보부에서 나선 것은 아닐지?”
리준욘이 MI6의 정보원이란 이야기가 있었다.
축구 선수이지만, 유고나 소련 등의 공산 국가에도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정보원에게 손댔다고 조직에서 나설 정도로 과한 대응을 한단 말입니까?”
“우리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인물인지도 모르지요.”
둘이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벌컥 열고 피투성이가 된 부하가 들어왔다.
“무, 무슨 일이냐?”
“기습입니다! 어서 피하시길!”
난데없이 기습이라니?
대체 어떤 놈들이 공격해 왔단 말인가?
하지만 머뭇거리고 있을 틈은 없었다.
몰려드는 발소리와 고함이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코다마와 흑룡회 간부는 서둘러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뒷문도 적에게 가로막혀 있었다.
“너는… 마치이?”
“오랜만입니다, 코다마 회장.”
토우세이카이라는 조직의 두목 마치이 히사유키.
본명이 정건영이라는 조센징이지만, 그래도 아시아주의를 신봉하는 우익 인사라 말은 통하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공격해 왔단 말인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알아?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코다마의 호통에 마치이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미안하게 됐수. 근데 이를 어쩌나? 거절하기 힘들 만큼 많은 돈을 받았는걸.”
돈도 돈이지만, 코다마를 제거하면 도쿄를 통째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더 끌렸다.
그래서 의뢰자의 요청대로 오늘 습격에 나서게 된 것이다.
“누구냐? 누가 너에게…….”
“그건 저승에 가서 알아보셔.”
마치이가 손을 들어 올리기 무섭게 칼을 든 조직원들이 코다마와 흑룡회 간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민당을 탄생시킨 암흑가의 실력자 코다마 요시오.
산전수전 다 겪은 그였지만, 날벼락 같은 위기를 뿌리칠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
사진에 나온 이 머머리 아저씨가 정건영입니다.
그냥 이권을 밝히던 야쿠자 두목인데,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 당시 한국 대표팀이 일본에 체재하는 동안 숙박비와 교통비를 지원해 준 적이 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