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98화 (198/400)

Round 198. 떡잎부터 다른 레전드

“여기가 올드 트래퍼드인가?”

이명철은 눈앞에 있는 커다란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오늘 그는 이준영의 경기를 보러 왔다.

그동안 준영의 주선으로 나2키 대표 조셉 포스터를 비롯해 여러 영국인 사업가들을 만났다.

단순히 친분을 쌓는 것뿐만 아니라, 투자나 기술 이전과 관련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여러모로 신세를 졌으니 성의를 다해 응원해 줘야 하지 않겠나?”

“맞는 말씀입니다, 회장님.”

표를 끊고 수행원들과 관중석으로 들어가니 그야말로 인산인해.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빽빽하게 자리한 관중들은 함성과 응원가를 부르며 전의를 고양시켜 주고 있었다.

“Go, United!”

“대한 건아 이준영, 파이팅!”

귀를 기울여 보니 낯익은 꽹과리 소리와 함께 한국인들의 응원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커다란 태극기가 휘날리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거참, 이 정도로 열광적일 줄은 예상 못했는데…….”

“이 정도로 관중이 많으면 입장 수입도 대단하겠습니다.”

곁에 있는 수행원의 말에 이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다른 것이 들어왔다.

바로 경기장과 관중석 중간에 있는 A보드 광고판.

보딩톤이라는 맥주를 비롯해 제약사와 은행 등, 여러 업체들의 상품이나 회사 선전 등이 그려져 있었다.

‘저 광고판에 있는 맥주는 관중들이 많이 사던 거였지.’

아무래도 단순히 입장 수익만 내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봐, 김 비서. 우리도 한국에 돌아가면 축구팀 하나 만들까?”

“예? 갑자기 축구팀 창단이라니요?”

영국 축구의 열띤 분위기에 회장이 물들기라도 한 건가.

물론 이명철은 단지 그런 이유로 축구팀을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

회사 홍보나 새로운 상품 광고에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너무 거창하게 하자는 건 아니야. 국내에도 조선 방직 같은 실업팀들이 있잖아. 일단 그 수준에서 시작해 보자는 거지.”

문제는 경기 수.

매년 가을에 전국 축구 선수권 대회가 열리고 단발적인 축구 대회들이 있지만, 영국 풋볼 리그처럼 체계적이진 않았다.

아무리 축구팀을 꾸려도 자주 경기를 하지 못하면 입장 수익은 물론 광고 효과도 떨어질 터.

‘이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군. 실업팀을 운영하는 회사들이나 축구협회 쪽하고 논의를 해 봐야겠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이명철은 관중들의 커다란 환호성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필드를 바라보니 양 팀 선수들이 입장하는 중이었다.

“드디어 시작이로군.”

관중들의 열기에 물들었기 때문일까.

이명철은 자신의 심장도 절로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주먹을 꼭 말아 쥔 그는 필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준영은 포진을 갖추는 상대 팀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아이언스, 혹은 해머스라고 불리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올해 승격한 이 팀은 이미 지난 6라운드에서 맨유와 맞붙어 2 대 3 패배를 안겨 주었다.

‘그날 집중을 못해서 정말 못했지.’

3점이나 실점하기도 했지만, 숱한 공격 기회에서 2골밖에 넣지 못한 것도 패배의 원인.

그날 맨유의 공격력을 틀어막은 선수는 아주 유명한 레전드 플레이어였다.

‘바비 무어, 오늘도 나왔구나.’

60년대 잉글랜드 축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플레이어.

올해 만 17세의 소년.

하지만 데니스 로나 펠레에게서도 느꼈지만, 레전드급 선수는 떡잎부터 달랐다.

6라운드에서 무어는 정말 지치지 않는 체력과 귀신같은 인터셉트 능력으로 맨유의 공격을 봉쇄했다.

그래서 영국 언론에서는 빌리 라이트의 뒤를 이을 천재가 나왔다며 굉장히 열광하는 분위기였다.

‘천재는 천재지. 하지만 오늘은 쓴맛을 보게 될 거다.’

6라운드의 패배를 배로 갚아 주마.

칼을 시퍼렇게 갈아 놓은 준영이나 맨유 선수들이 단단히 벼르고 있을 때,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Go! Go! Go!”

“힘내라, 붉은 악마들!”

홈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맨유가 초반부터 거칠게 웨스트햄을 몰아붙였다.

최전방의 콜린 웹스터와 숀 코너리, 그리고 데니스 바이올렛과 바비 찰튼은 전방에서부터 강한 견제에 나섰다.

그렇다 보니 웨스트햄은 쉬 전진하지 못한 채 공을 돌리기만 했다.

「웨스트햄, 어쩔 줄을 모르고 우물쭈물. 노엘 캔트웰이 6번 바비 무어에게 패스를 건네줍니다. 바비 무어, 과감하게 전진을 시도합니다.」

쉬지 않고 입을 놀리던 라디오 중계 캐스터는 이후 눈이 휘둥그레질 광경을 보았다.

무어가 발을 뻗는 콜린 웹스터를 제치고, 이어서 앞을 막는 바비 찰튼까지 뿌리쳤기 때문.

“저 자식이……!”

바비 찰튼이 발끈하며 무어를 쫓아갔다.

이름이 같은 두 선수는 중앙선 부근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다투었다.

결국 견디다 못했던지 무어는 같은 편 미드필더 존 스미스에게 패스를 넘겨주었다.

관중석에서 우두커니 구경하던 나가누마 겐과 히라키 류조는 무어의 플레이에 혀를 내둘렀다.

“무어 녀석, 정말 대단한걸!”

“그러게요. 바비 찰튼은 수비력도 수준급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죠.”

수준급도 어디 보통 수준급인가.

저승사자 군단의 디 스테파노를 마크하고 악마의 드리블러라는 브라질의 공격수 가린샤의 발을 묶지 않았던가.

‘감독이 왜 나는 거들떠보지 않는지 알겠군.’

히라키 류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17세의 저 소년 수비수는 모든 면에서 자신을 앞섰다.

피지컬이나 체력, 테크닉, 그리고 재능까지 모두.

‘저러니까 날 후원하는 기업에서 출전시켜 주면 돈을 준다고 해도 마다하고 저 녀석을 기용하는 거지.’

히라키는 그 서글픈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나이야 어떻든 무어는 자신보다 뛰어난 선수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경기에 뛰진 못하더라도 그의 플레이를 보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실력이 더 나아질 테니까.

‘그렇게 배운 걸 나중에 내 후배나 제자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언젠가는…….’

먼 미래를 기약하던 히라키는 관중들의 환호성에 고개를 쭉 빼고 필드를 바라보았다.

맨유의 동양 특급, 리준욘이 웨스트햄 공격수 빅터 키블에게서 공을 따내 전진해 나오고 있었다.

‘아, 진짜 눈여겨봐야 할 녀석을 잠시 잊고 있었군.’

거침없이 돌진하는 거인의 플레이를 히라키는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눈알을 굴렸다.

***

“젠장, 저 괴물 자식!”

준영을 보는 웨스트햄 선수들은 치를 떨었다.

몸싸움에 탁월한 빅터 키블을 아주 간단하게 밀쳐 내고 공을 가로챈다 싶더니 순식간에 중앙선을 넘어왔다.

‘절대 한 명으론 상대가 안 돼.’

‘두 명, 아니 세 명이 동시에 둘러싸면……!’

이 동양의 괴물이 6라운드 때 부진하긴 했지만,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언제 깨어나서 물어뜯을지 모르니까.

‘바비 무어는……? 오, 후방에서 주시하는 중인가?’

세 방향에서 준영을 견제하던 웨스트햄 선수들은 그가 자신들이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기회다!’

곧바로 들어간 태클.

하지만 드래그 백으로 피해 버린 준영은 연이어 달려드는 2명도 레인보우 플릭으로 제쳐 냈다.

그러고는 잽싸게 문전으로 침투하는 바비 찰튼에게로 패스를 찔러 주었다.

그리고 바비 찰튼은 방향만 살짝 돌려놓는 슛으로 골대 그물을 흔들었다.

“들어갔다- 아!”

“역시나… 앗, 뭐지?”

선제골의 기쁨은 선심의 오프사이드 판정에 싸늘하게 식었다.

준영은 바비 무어 쪽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저 녀석, 오프사이트 트랩을 쓰다니.”

지난 시즌 자신과 맨유팀이 곧잘 써먹었던 오프사이드 트랩.

그것을 바비 무어가 아주 깔끔하게 사용했다.

스위퍼처럼 웨스트햄 수비 제일 뒤쪽에 있다가 준영의 패스가 날아오기 직전, 잽싸게 전진해 올라갔던 것.

“영악한 꼬마로군.”

“크게 될 놈이죠.”

숀의 감탄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쓴맛을 보여 주겠다고 했는데, 자칫하면 자신이 쓴맛을 느끼게 될 판이었다.

‘좀 더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 월드컵에서 펠레를 대했을 때처럼 하지 않으면!’

상대는 떡잎부터 다른 레전드.

미래의 스타플레이어와 겨루는 건 즐겁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성장시킬 먹이가 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

6라운드 데뷔전에 이은 세 번째 선발.

바비 무어는 경기 초반부터 강하게 나오는 맨유의 공세를 막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존 Y. 리, 바비 찰튼, 던컨 에드워즈 등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는 패스를 잘 찔러 주는 선수들이 많았고, 체격이나 테크닉에 있어서도 웨스트햄보다 월등했다.

거기다 명성과 달리 멍하고 굼떠 보이던 존 Y. 리는 오늘은 완전 딴판이었다.

‘전진해 올 때마다 커다란 도끼날이 날아드는 기분이야.’

그렇다 보니 그가 전진해 오거나 패스를 넣을 때마다 기분이 섬찟섬찟했다.

‘하지만 질 수 없지! 앨리슨 선배를 위해서라도!’

말콤 앨리슨.

1951년부터 작년까지 웨스트햄의 주장이었던 수비수.

그는 무어를 눈여겨보고 웨스트햄에 발탁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는 축구 전술과 테크닉들을 알려 주곤 했다.

무어도 그런 앨리슨이 좋았다.

항상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며 그에게 축구를 배웠다.

언젠가 앨리슨과 함께 나란히 프로 무대에서 뛸 날을 꿈꾸면서.

하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앨리슨은 결핵에 걸렸고, 폐를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선수 생활은 이제 끝났다며 낙담하던 앨리슨.

홈구장 한편에 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며 무어도 숨죽여 울었다.

그날 바비 무어는 다짐했다.

자신의 은인이자 스승인 앨리슨이 못 뛴 만큼 자신이 뛰겠노라고.

「바비 무어, 또다시 유나이티드의 침투 패스를 끊어 냅니다. 흘러나온 볼, 로니 코프가 잡아서 뒤쪽의 존 Y. 리에게 연결합니다.」

중계 캐스터는 준영이 곧장 웨스트햄 문전으로 치고 들어가는 광경을 보았다.

그러자 바비 무어가 전진해 나와서 덤벼들었다.

그 과감한 커트에 준영은 하마터면 공을 흘릴 뻔했다.

‘큭, 진짜 잡아먹을 기세로군.’

‘당신이 어떻게 플레이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어.’

그걸 알려 준 사람은 말콤 앨리슨.

은퇴한 후에도 무어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잉글랜드 최고의 수비수로 존 Y. 리를 꼽았다.

‘그 동양인은 키만 큰 게 아니야. 상하체 밸런스가 모두 뛰어나지. 거기다 수비 전술이나 기타 플레이 방식이 굉장히 선진적이야.’

그러면서 앨리슨은 자신이 맨유 경기를 보면서 파악한 존 Y. 리의 테크닉이나 전술을 알려 주었다.

본인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무어와 논의하면서 답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바비 무어의 기량은 무럭무럭 성장했다.

“따로 웨이트 트레이닝이라도 했나?”

“엘리슨 선배가 말했지. 당신하고 맞붙으려면 상체 단련도 해야 한다고.”

몸싸움에서도 쉬이 밀리지 않는 바비 무어의 기세에 준영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실제 역사보다 더 강해진 건 아닐까?

하지만 난감함보다는 강한 흥미가 느껴졌다.

마치 보물 지도를 보고 찾아간 곳에서 예상보다 큰 보석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

1. 왼쪽이 젊은 시절의 바비 무어, 오른쪽이 그의 멘토였던 말콤 앨리슨입니다.

바비 무어야 웸블리 경기장에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사람이니 말할 필요도 없는 레전드이고, 말콤 앨리슨의 경우도 감독으로 맨체스터 시티와 크리스탈 팰리스 등을 지휘하며 꽤 명성을 날렸습니다.

앨리슨이 맨시티 감독이던 시절에는 맨유를 많이 괴롭혔다고 합니다. 본인도 그걸 상당히 즐겼다고 하네요. ^^;

2, 실제 이병철 회장은 1962년에 실업팀 제일모직 축구단을 창설했습니다.

이 팀에서 뛰었던 김호 감독이 훗날 수원 삼성의 감독이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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