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97. 거인과 거인의 만남
예상대로 저택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준영은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거기엔 낯선 한국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준영 선수, 아니 본사 대표님이시죠? 저는 전중윤이라고 합니다.”
“아, 한국 지부 부사장을 맡은 분이군요. 이활 사장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중윤은 이활, 아니 이억관이 상공회의소를 들락거리다 만난 인재였다.
그는 보험 회사 부사장을 지낼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억관의 라면 사업 이야기를 듣고 뭔가에 꽂혔는지, 원래 회사를 박차고 나와서 미스터리 푸드 한국 지부에 들어왔다고.
“라면 판매 초기에 부사장님이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아이디어랄 게 뭐 있습니까. 그냥 간단하게 시식회를 연 것뿐인데요.”
그 간단한 시식회 덕분에 라면이라는 생소한 국수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더 얼큰하고 매웠으면 좋겠다는 소비자들의 니즈까지 체크해서 반영할 수 있었다고.
“같이 오신 분들도 지부 관계자들입니까?”
“아뇨. 저분들은 협력 업체 대표님과 수행원들입니다.”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40대 후반의 사업가는 전중윤의 소개를 받아 준영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준영입니다. 멀리 한국에서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제1제당 대표 이명철이라 합니다.”
‘엥!’
준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사람은 21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3성의 창업자였으니까.
그 사람이 자신을 찾아오다니!
“음, 왜 그리 놀라시는지?”
“그게… 한국에서 사업가로 유명하신 분을 이렇게 뵐 줄은 생각하지 못해서요.”
준영의 말에 이명철과 그의 수행원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내가 유명해 봤자 이준영 대표만 하겠습니까. 한국에선 이준영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인데.”
덕담을 나누는 사이 응접실로 홍차가 들어왔다.
소파로 자리를 옮긴 준영과 이명철은 다과를 들면서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앞서 전 부사장에게 들었겠지만, 우리 제1제당은 미스터리 푸드의 협력 업체로 밀가루를 납품하고 있지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관계를 이어 가고 싶습니다.”
“예, 저도 그러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말을 짧게 하십쇼. 아버님뻘 되는 분께서 존대해 주시니 영 불편해서…….”
“알겠습니다. 아니, 알았소. 불편하다니 그리하리다.”
이 기회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굴지의 기업과 친밀한 사이가 되어 보자!
이렇게 내심 미소를 짓고 있는 준영에게 이명철이 말했다.
“이 대표는 식품 사업 말고 의류 쪽으로도 투자를 하고 있다고 들었소만?”
“예, 의형제인 조셉과 함께 나2키라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승리제화라는 법인명으로 생산 공장을 지었죠.”
“그래, 우리같이 노동력이 자원인 나라에서 할 만한 사업이지.”
“혹시 투자하고 싶으신 겁니까?”
“음, 투자도 하고 협력도 하고 싶소. 우리 계열사에 제1모직이라고 의류 업체가 있으니까.”
이명철이 듣기로 나2키라는 회사는 영국에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다 인건비가 값싼 한국에 공장을 지어 홍콩과 중화민국, 필리핀으로 수출을 시작했다.
앞으로 아시아 시장으로 판로를 계속 넓혀 갈 테니, 원단과 소재 공급을 맡을 수 있다면 상당한 수익이 될 것이다.
“조셉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보시죠. 여기서 나2키 본사가 있는 볼턴까지 멀지 않습니다.”
“주선해 준다니 고맙소.”
만족한 미소를 짓는 이명철.
그를 보며 미래 3성 그룹의 핵심 산업을 떠올린 준영은 호기심에 물음을 건넸다.
“이 회장님께선 혹시 반도체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반도체? 트랜지스터 같은 소재 말이오?”
“예, 요즘 라디오나 TV 등에 쓰이는 진공관이 트랜지스터로 대체되고 있으니까요.”
준영의 말에 이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기회가 되면 라디오 같은 전자 산업에 도전해 볼까 생각하고 있소. 통신과 방송이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으니까,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닐 거요.”
“맞습니다. 대중은 항상 더 많은 정보와 교류를 원하고 있으니까요.”
TV와 라디오, 전화 등 앞으로 발전할 전자 산업들은 정보 통신과 관련된 것들이다.
리즈가 관심을 두고 있는 컴퓨터 산업 역시 마찬가지.
70년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3성전자는 80년대 D램 개발을 시작으로 21세기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한다.
‘내 스마트폰도 저쪽 제품이니까.’
내심 히죽이던 준영이 이명철에게 말했다.
“저희 본사 공장이 있는 트래퍼드 파크에는 가전제품이나 전자 기기 생산 업체들도 많습니다.”
“오, 그럼…….”
“여기까지 오셨으니 견학도 하고 친분도 맺어 두는 건 어떻습니까?”
“가능하겠소?”
“물론이죠.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좀 유명 인사라서요.”
준영은 스타플레이어 겸 잘나가는 사업가로 맨체스터 사교계에 잘 알려져 있다.
알버트의 주선으로 사교계에 들락거린 것도 석유 시추와 관련한 토목업자들이나 투자가들과 안면을 트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늘 그쪽 사람들하고만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다.
잘나가는 유명 사업가와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먼저 찾아오곤 했던 것.
그래서 준영은 트래퍼드 파크의 여러 산업체 관계자들과도 두루두루 알고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관심과 투자를 자기 회사뿐만 아니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에도 끌어왔다.
“저희 공장 파산 나면 당장 트래퍼드 파크 노동자들이 점심을 굶는다고 할 정도죠. 하하하!”
이명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한국 경제인들이 잘 알고 지내는 외국인 사업가는 대개 일본인들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과거사 때문에 양국 관계가 좋지 않으니 교류가 원활하지 못한 게 현실.
이런 상황에서 이준영은 산업 혁명의 선도 국가 영국에서 활동하며 이쪽 사업가들과 친분을 맺었다니 놀랄 수밖에.
‘내가 이준영에 대해 잘못 생각했군. 그저 돈이 많거나 운이 좋은 사람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어.’
이 청년은 10년, 20년은 멀리 보고 있었고, 발도 꽤 넓었다.
그러니 식품이나 의류 같은 기본적인 1차 산업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터.
자신에게 반도체나 정보 이야기를 꺼내며 영국 쪽 업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걸 보면 앞으로 더 큰 산업도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런 안목을 가진 친구와는 오래 알고 지내는 게 좋겠지.’
영국에 오길 잘했다!
현재 자사 핵심 산업과 관련해서 투자와 협력을 공고히 할 생각으로 왔는데, 그보다 큰 대어를 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낚지 않더라도 낚는 기술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좋은 기회가 될 터!
“앞으로 잘 부탁하오.”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죠.”
서로 손을 내민 두 사람.
미래를 생각하며 굳게 악수를 나누는 그들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걸렸다.
***
이명철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집주인인 알버트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준영은 곧바로 그에게 이명철을 소개했다.
“자넬 만나려고 한국에서 온 손님이란 말이지?”
“예, 어르신.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미래에 세계적인 대기업을 세운 창업자다.
준영이 이렇게 귀띔해 주자, 알버트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그것은 이명철 역시 마찬가지.
준영의 후견인이나 마찬가지인 이 노인이 영국 보수당에서 하원의원을 지낸 인물이라고 하니까.
악수와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그들을 두고, 준영은 전중윤 부사장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한국 지부의 운영과 관련된 얘기들이었다.
“사장님이 궁금하게 여기시는 게 있습니다. 대체 잠실 땅은 왜 사라고 하신 겁니까?”
전중윤도 가 봤지만, 거긴 고구마나 무밖에 못 심는 모래밭이었다.
그런데 준영은 반드시 그곳을 매입하라고 지시했다.
“잠실요? 터가 좋아서요.”
‘터가 좋다고? 홍수 때 뻔질나게 범람하는 곳인데?’
예전엔 나루터를 중심으로 시장이 번성했다곤 하지만, 1925년 대홍수로 한강 줄기가 바뀌며 나루터도, 시장도 모두 죽었다.
아무래도 어릴 때 한국에서 떠났다는 준영이 잘 모르고 그런 듯싶었다.
“아, 그리고 지난번에 부탁하신 서적들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요? 어디 한번 보여 주세요.”
일전에 톨킨 교수가 요청한 서적.
세종대왕이나 한국 역사와 관련한 책들로 나무 상자 하나를 채워서 가지고 왔다.
“서양 선교사들이 번역한 책들도 있지만, 원서를 베낀 사본이 더 많습니다.”
‘톨킨 쌤이 한문을 알려나?’
살짝 우려되긴 했지만, 그 걱정은 금세 떨쳐 냈다.
명색이 옥스퍼드인데, 동양사 전공자나 한문 전문가가 없겠는가.
“이 책은 꽤 새것이군요.”
“훈민정음 영인본입니다. 2년 전에 간송 선생께서 보관하고 있던 해례본을 사진으로 찍어서 만든 사본이죠.”
‘해례본이라…….’
간송 전형필이 소유한 안동본 말고도 상주본이 따로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준영은 미래에 이상한 작자에게 넘어가기 전에 찾아서 소장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 유물을 가지고 있으면 돈도 돈이지만, 명예를 더욱 빛낼 수 있을 테니까.
“다음에 전화할 때 사장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드려야겠군요. 좀 억지 부탁이었는데, 이렇게 챙겨 주시다니…….”
“그것도 그렇지만, 한국에 한번 오실 계획은 없습니까? 사장님이 대표님을 꽤 보고 싶어 하셔서요.”
“글쎄요. 당장은 힘들 것 같네요.”
21세기처럼 직항이 있는 것도 아닌 데다, 리그 일정도 빡빡하다.
그런 상황에서 가까운 나라도 아니고 한국에 다녀오기는 힘들었다.
그렇다 보니 내년에 시즌을 마친 뒤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일단 수첩에 적힌 일정을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아, 내년 1월에는 경기들이 별로 없어서 여유가 있네요. 그때 방한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때 오신다고 사장님께 전하겠습니다.”
즉석에서 1월 방한 계획을 잡은 준영.
가서 이억관이 잘 지내고 있는지 만나 보고, 고향에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뭐, 21세기의 고향과는 전혀 다르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보고 싶었다.
어쩌면 어릴 때 아버지께 이야기로만 들었던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
아버지 이억관을 따라 한국에 온 필립은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차이나타운에서 살다 보니 한국어가 몹시 서툴렀기 때문.
그래서 모친이 외국인 학교나 화교 학교로 전학을 보내자고 권유했지만, 이억관은 고개를 저었다.
‘조국에 돌아왔으니 조국의 교육을 받는 게 마땅하지 않겠소.’
결국 필립은 충정로에 있는 국민학교에 계속 다니게 되었다.
다행히 담임선생님이 잘 챙겨 줬고, 말수가 늘면서 동급생들과도 곧잘 친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2학기를 시작하고 얼마 후, 반에 새로 전학생이 왔다.
“화성에서 온 이강윤이라고 해. 잘 부탁한다.”
“캬캬캬, 화성에서 왔대!”
“너 외계인이냐?”
빡빡머리 전학생의 소개에 다들 낄낄거리는 와중에도 필립은 우두커니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학생이라 착각할 정도의 큰 키에 시원한 용모.
어딘가 상당히 낯이 익었다.
‘준영이 형이랑 닮았어.’
혹시 준영과 먼 친척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오늘 출연한 분은 너무 유명하신 분이라서 사명이나 명칭을 좀 바꾸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