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95화 (195/400)

Round 195. 응분의 대가

“로베르트 씨의 말이 맞군. 저격하기 딱 좋은 위치라더니.”

저격수를 쏜 건 MI6 요원 번즈였다.

최근에 MI6는 준영이 자주 다니는 주변 지역의 보안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전직 자유 폴란드군 공수부대 출신인 로베르트의 조언을 받아 경기장 주변에 위험이 될 만한 곳을 사전에 체크했다.

혹시나 했던 대비였는데, 제대로 걸려들었다.

“으으으, 넌 뭐야! 왜 저 조센징을 감싸는 거지?”

“그야 존 Y. 리는 안개 속의 항로를 빠져나가게 해 주는 나침반 같은 존재니까.”

“뭐? 나침반? 무슨 뜻이지?”

이해하지 못하는 저격수의 물음에 번즈는 가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그걸 알 필요는 없지. 이제부터 묻는 건 우리고 대답하는 건 너다. 네 입장을 똑똑히 알아 두는 게 좋을 거다.”

번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MI6 요원들이 들어와서 저격수를 끌고 갔다.

번즈도 방을 나가면서 부하에게 물었다.

“미스터 리는?”

“부상자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혹시 다친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더군요.”

“하긴 무리도 아니지.”

아무리 사전에 경고를 받았다 한들, 눈앞에서 총성이 울리고 피가 튀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번즈가 듣기로, 준영은 전쟁이라고는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어릴 때 겪은 열차 사고로 대형 참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아 참, 파시스트 놈들이 꾸미던 방화와 폭동 문제는 어떻게 되었나?”

“유대인 거리나 차이나타운 등에 경찰이 경계와 순찰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화이트 디펜스 당원들이나 와일드 테리어의 잔당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번즈는 일이 깔끔히 끝날 때까지 경계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문제는 패전한 놈들이 감히 파시스트들을 부추겨 우리 땅에서 사고를 치려 했다는 점이지.’

오스왈드 모슬리도 응징해야 하지만, 놈을 부추긴 전직 일본군 장교 놈은 더욱 용서가 안 되었다.

더구나 조사해 보니 이놈은 전범 재판도 피했던 악질.

더 가관인 건 그런 악질 전범이 지금은 일본 하원의원까지 하고 있단 사실이었다.

“어디 있는지 파악했지? 당장 잡아 와.”

“알겠습니다.”

미래로 나갈 길을 잡아 주는 귀중한 나침반을 건드리려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줄 것이다.

그놈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놈들까지 모두.

***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온 준영은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뒀다.

동맥을 다쳐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묻지 못했는데, 빚만 지워 주고 가 버리다니…….”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눈물이라도 나올 텐데.

비에 홀딱 맞은 것처럼 서글픈 이 기분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아무리 유명 선수라지만 자기 목숨을 걸 필요까지 있었던 건가?’

침울한 준영의 모습에 병원까지 따라온 기자들도 쉬이 말을 붙이지 못했다.

얼마 후, 병원으로 경찰과 사망한 은인의 주변인들이 도착했다.

그들에게서 준영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돌아가신 분의 성함이 김인수 씨라고요?”

“네, 인천에서 저랑 같이 온 형님인데 월슬리에 있는 광산에서 일하고 있었죠.”

“가족은 있습니까?”

“예, 본국에 남겨 두고 왔습니다. 어느 정도 기반을 잡으면 데려올 거라 하셨는데…….”

지인에게 들어 보니 순박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광산에서 일할 때도 항상 주변 사람들을 챙겨 줬었다고.

“축구를 참 좋아하셨죠. 형편이 어려워 선수는 못 되었다고 하더군요.”

“혹시 돌아가신 분 집 주소 알고 계십니까?”

“예, 압니다.”

유골도 보내 주고, 남겨진 가족들에게 보상도 해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가장을 잃은 가족들의 슬픔이 지워지진 않겠지만, 사람으로 도리는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리 선수, 범인이 선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경찰의 말에 준영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누가요? 총 든 놈이요? 아님 칼 든 놈입니까?”

“칼을 휘둘렀던 한국인입니다. 괴한들에게 동생이 납치당해 협박을 당한 거라고 합니다.”

납치한 동생의 손가락을 잘라 보낼 정도로 괴한들은 상당히 악랄했다고.

시간도 촉박하고 경찰에 신고했다간 동생이 더한 해코지를 당할까 싶어, 어쩔 수 없이 암습에 나섰다는 게 범인의 주장이었다.

“하… 괴한들의 정체는 모르고요?”

“일단 화이트 디펜스나 와일드 테리어와 연관이 있는지 조사 중입니다.”

한국인을 이용해 암살을 시도하다니.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참으로 악랄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반드시 잡아다 뿌리를 뽑아야 한다.

앞으로 또 같은 일이, 아니 이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일단 MI6에서 나섰으니 어떤 놈들 소행인지는 밝혀낼 수 있겠지.’

안달하지 말고 기다려 보자.

그리 마음먹은 준영에게 로베르트가 다가와서 말했다.

“미스터 리, 병원 관계자가 말하는데 프레드로 저택에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집에서도 소식을 들었나 보군요.”

“라디오 뉴스에서 급보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리즈는 바로 맨유 구단에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물었고, 현재 준영이 어느 병원에 있는지도 알아냈다고.

“많이 놀라 있을 텐데, 안심하라고 연락을 해 주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하긴 우리 여왕님을 걱정시켜서는 곤란하죠.”

고개를 끄덕인 준영은 병원의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리즈를 안심시켜 주고 싶지만, 그 역시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으므로.

***

“어제 맨체스터에서 난리가 났다며?”

“말도 마라. 올드 트래퍼드에서 말이지…….”

리버풀 북쪽 부틀항.

선원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그곳에 수도사 차림을 한 남자가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그의 정체는 츠지 마사노부.

현재 신문과 방송을 떠들썩하게 만든 존 Y. 리 습격 사건을 배후에서 꾸민 주범이다.

“휴, 이번 일은 너무 욕심을 부렸어.”

처음에는 영국 파시스트들을 부추겨 리준욘의 선수 인생을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놈이 예상보다 파시스트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는 것을 알고 숨통을 끊는 걸로 계획을 바꾸었다.

‘어차피 덮어쓰는 건 영국 파시스트들일 테니까 말이야.’

어디까지나 놈들을 이용할 생각이었던 츠지.

그는 흑룡회 조직원들을 이용해 맨체스터에 있는 조센징 노동자를 협박해 암살을 지시하는 한편, 전직 저격수를 일본에서 불러오기도 했다.

이 정도로 이중 삼중 준비해 두었으니, 리준욘의 목숨도 끝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놈은 살아남았다.

영국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서면서 맨체스터 시내에 있던 파시스트 세력이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츠지나 흑룡회 조직원들을 섬뜩하게 만든 건 저격수의 행방불명.

자칫하면 꼬리가 밟히게 생길 판이라 그들은 바로 흩어져 줄행랑을 쳤다.

츠지도 수도사로 변장해 일단 아일랜드로 갔다가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근데 저격수를 잡아간 건 정말 MI6인가? 리준욘이 MI6의 정보원이라는 하루히코 대사의 말이 사실이었던 건가?’

주영 대사인 니시 하루히코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농담인 줄 알았다.

일개 축구 선수 나부랭이가 영국 정보부 소속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지난번에 리준욘을 설득하러 간 박춘금 일행이 사살당한 일에 대해서 변명할 목적으로 꾸며 낸 얘기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진짜라면 정말 벌집을 쑤신 셈인데…….’

역시 서둘러 영국을 뜨기로 한 건 잘한 듯싶었다.

슬쩍 시계를 보고 있던 츠지에게 인상이 험해 보이는 털보 사내가 다가왔다.

혹시 아일랜드 밀항을 주선한 조직에서 보낸 자가 아닌가 싶었지만…….

“여기 계셨군요, 베드로 수사님. 한참 찾아다녔습니다.”

“실례지만,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하군요. 저는 베드로가 아닙니다만.”

접선할 때 썼던 이름은 시몬이지 베드로는 아니었다.

“허허허, 무슨 농담을 하시는지? 베드로 수사님이 맞잖습니까.”

“글쎄, 아니라니까…….”

손을 내젓던 츠지는 이내 흠칫했다.

친근한 척 말을 건네던 털보가 어느 틈엔지 권총을 뽑아 들고 있었으므로.

“요한 신부님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른 같이 가시지요.”

“시, 싫다면? 주님의 곁으로 보내 줄 거요?”

“주님이 수사님을 딱히 반길 것 같진 않군요. 좋은 말 할 때 빨리 가시죠. 무릎에 시원하게 구멍이 뚫리기 싫으면 말입니다.”

싸늘한 권유에 츠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털보의 안내(?)를 받아 부틀항 뒷골목 으슥한 곳으로 오자, 차가 한 대 기다리고 있었다.

차 주변에는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키가 큰 한 명은 꽤 낯이 익었다.

“제가 요한 신부입니다. 안 그래도 한참 기다리고 있었지요.”

‘리준욘!’

경악하는 츠지의 눈앞으로 준영의 큼지막한 주먹이 날아왔다.

“캑!”

순식간에 콧대와 앞니가 부러지는 진귀한 경험을 한 츠지의 몸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순식간에 의식이 아스라해진 츠지는 천사를 보았다.

마치 자신을 저승으로 인도할 것처럼 다가오던 천사는 냅다 양동이의 물을 끼얹었다.

“흐어억!”

“쉽게 죽으면 곤란하지.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는 가볍지 않으니까.”

바닷물 한 양동이를 쏟아부었던 준영은 츠지를 일으켜 세워 MI6 요원들에게 넘겼다.

츠지는 자신에게 수갑을 채우는 번즈에게 말했다.

“난 대일본국 중의원이다. 이런 대우는 온당하지…….”

“일본은 하원의원이 남의 나라에서 암살을 지휘하고 다니나 보군요.”

번즈의 빈정거림에 츠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외교적인 논란에 대해선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이제 당신은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이 될 테니까.”

앞으로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츠지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자칭 작전의 신.

하지만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안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

포르투갈의 포르투.

FC 포르투는 이 도시를 대표하는 축구팀이었다.

홈구장인 에스타디오 다스 안타스에서 FC 포르투의 자체 연습 경기가 치러지고 있었다.

청백 양 팀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선수는 17세의 소년 스트라이커.

그는 바로 브라질에서 온 펠레였다.

복수심에 무작정 가출을 하긴 했지만, 펠레도 아무런 생각 없이 대서양을 건너오진 않았다.

‘분명히 제일 큰 문제는 언어 소통일 테지. 그러니 일단 말이 통하는 포르투갈에 자리를 잡는 게 유리할 거야.’

FC 포르투는 벤피카와 더불어 포르투갈 최고의 클럽이었다.

1956-57 시즌에는 포르투갈 리그 우승팀의 자격으로 유러피언 컵에 나가기도 했다.

즉, 포르투에 입단해서 우승을 도우면 유러피언 컵에 나갈 수 있고, 거기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존 Y. 리, 바비 찰튼 그 두 악마들에게도 복수할 기회가 올 터!

“이드송!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연습 경기가 끝난 후, 감독 벨라 구트만이 부르자 펠레는 냉큼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네 실력은 잘 봤다. 과연 월드컵 최우수 신인이라 할 만하더군.”

“그럼 이제 정식으로 입단시켜 주는 겁니까?”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있으니 입단은 금방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구트만 감독은 계속 지켜보기만 할 뿐 답을 주지 않았다.

이제 그 답을 들을 때가 왔다.

***

벨라 구트만(1899~1981)은 헝가리 출신의 감독입니다.

이탈리아 AC밀란 감독을 맡아 그레놀리 삼총사를 지휘하기도 하고, 브라질에서는 상파울루 FC 감독을 맡아 4-2-4 포메이션을 대중화시키기도 했죠.

이후 FC 포르투 감독을 거쳐 벤피카 감독을 지냈는데, 벤피카 구단에서 자신의 급여 인상 요청을 거절하자 이에 분노하여 벤피카가 100년간 유럽 챔피언이 될 수 없을 거라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 저주 탓에 벤피카는 아직도 유럽 챔피언이 못 되고 있다고 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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