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92. 추한 음모
“백인들의 폭동이라고?”
런던을 잠시 방문 중이었던 츠지 마사노부에게 히라키 류조와 나가누마 겐이 어제 자신들이 당한 일을 보고했다.
“영국 하층민들이 유색 인종에게 반감을 가지고 난동을 부린 거라고 합니다.”
“해당 지역에서 폭동이 계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으로 번지는 중입니다.”
나가누마 겐은 붕대를 두른 머리를 매만지며 불만을 터트렸다.
“그 무식한 놈들, 우리가 일본인이라고 해도 전혀 듣질 않았습니다. 깜둥이들과 똑같이 취급하더라니까요.”
“쯧쯧, 이러니까 영국인들은 귀축인 게야.”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를 이룬 일본인을 열등한 인종들과 같은 취급을 하다니!
나가누마 겐뿐만 아니라 츠지도 분통이 터졌던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튼 구단에서도 한동안 외출을 자제하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공격받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거참, 하필 내가 런던에 왔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츠지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새로운 시즌, 영국 풋볼 리그에 합류한 일본인 선수들의 활약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왔건만!
이런 그의 속내를 알았다면 나가누마와 히라키는 폭동이 일어난 것을 감사할지도 모른다.
웨스트햄에서 그들의 입지는 그야말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으니까.
팀 내에서 바비 무어, 제프 허스트라는 애송이들보다 못한 형편이었다.
“잠깐, 이 폭동, 유색 인종들이 표적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번득이는 생각이 떠오른 츠지는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혹시 뒤에서 사주하는 놈들이 누군지 알고 있나?”
“그게, 화이트 디펜스라는 영국의 파시스트 조직이라고 합니다.”
히라키는 통역사가 신문을 보고 알려 준 내용을 떠올리며 말했다.
“화이트 디펜스라……. 어쩌면 잘 이용해 볼 수 있을 것 같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리둥절해하는 히라키에게 츠지가 가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들이 습격을 당했으면 맨체스터에 있는 놈도 폭도들의 표적이 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럼 혹시……?”
츠지의 미소가 음흉하게 번져 갔다.
그가 무엇을 노리고,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를 만큼 두 사람은 아둔하지 않았다.
‘리준욘을 습격하려는 건가?’
‘그래, 이참에 그놈의 다리몽둥이를 작살내면……!’
우려와 기대.
침묵하는 두 사람을 두고 츠지 마사노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엣가시 같은 조센징을 처리하는 일은 서두를수록 좋을 테니까.
***
준영의 주선으로 모즐리 AFC에 들어간 조윤옥.
그는 오전에는 공부와 개인 훈련을, 오후에는 팀 훈련에 열중했다.
감독 에드먼드 짐사는 성실하게 노력하는 윤옥을 대견하게 보았다.
이에 체셔 카운티 리그 3라운드 시합에 선발 출전시켰다.
“괜찮을까요? 그놈은 아직 체력적으로 부족하고 영어도 서툰데.”
“하지만 조는 스피드가 상당히 뛰어나지. 렉섬을 공략하는 데 좋은 무기가 될 거야.”
서툴다지만 시합에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다.
체력적인 문제도 본인이 일단 어떻게든 조율을 잘하려 노력하고 있고.
‘뭐, 그런 점을 떠나서 한 번쯤 기회를 주고 싶단 말이지.’
머나먼 아시아에서 이곳까지 왔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녀석이다.
부족한 점은 어떻게든 대처하려고 애쓰는 데다, 무엇보다 굉장히 예의 발랐다.
존 Y. 리의 뒷배만 믿고 까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연장자에게 공손하고 행동도 성실했다.
누구보다 일찍 훈련장에 와서 라커룸을 정리하고 공이나 훈련 장비들을 챙겨 두었다.
훈련이 끝난 뒤에는 빨래나 청소도 도맡아 했다.
이렇다 보니 깐깐한 고참 선수들도 후배들에게 ‘조를 보고 배워라.’라며 잔소리를 할 정도.
“긴장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플레이만 하면 돼. 알겠나?”
“예, 감독님.”
모즐리의 하얀 유니폼을 걸친 윤옥은 영국에서 자신의 첫 번째 공식전에 출전했다.
상대는 렉섬 AFC 리저브 팀.
렉섬 AFC는 디비전3에 속한 팀으로 모즐리 같은 아마추어 팀보다 전력이 월등히 강했다.
작년 체셔 카운티 리그 순위도 모즐리보다 높았다.
‘상대가 강팀이라고 주눅 들면 거기서 이미 1점 잃고 경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윤옥은 준영이 해 준 충고를 떠올렸다.
그리고 시합이 시작되자, 자신의 빠른 발을 십분 이용하며 상대 진영을 열심히 휘저었다.
“동양인 선수?”
“쳇, 대표팀에 쿨리가 있으니까 이런 시골 팀에서도…….”
탐탁잖은 기색을 보이던 렉섬 선수들도 빠르게 측면을 누비고 다니는 윤옥의 플레이에 진땀을 쏟았다.
한 번 툭 치면 튕겨 나갈 것 같은데, 다람쥐처럼 재빨랐으니까.
그뿐만 아니라 패스나 슛도 상당히 날카로웠다.
공격 찬스 때마다 측면을 푹푹 쑤시고 들어오는 게, 마치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뭐 하고 있어! 제대로 막으란 말이야!”
“크로스 올리지 못하게… 젠장, 늦었군!”
렉섬 AFC 리저브 팀 감독이 역정을 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거의 아웃되기 직전에 윤옥이 올려 준 공을 모즐리의 공격수가 헤딩골로 마무리 지었기 때문.
‘해냈다!’
첫 공식전의 첫 번째 공격 포인트.
더욱 자신감이 생긴 윤옥은 이후에도 열심히 측면을 누비고 다녔다.
경기는 모즐리의 선제골이 터지고 난타전으로 이어졌다.
전반에만 2 대 2였던 양 팀은 후반에도 쫓고 쫓는 추격전을 펼쳤다.
후반 중반부터는 체력을 아끼며 패스 연결에 집중하던 윤옥은 후반 40분, 기습적으로 렉섬의 페널티 박스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 원숭이 자식이……!”
덩치 큰 렉섬의 수비수가 앞을 막아섰다.
어깨로 밀치려는 그를 상대로 윤옥은 일전에 준영에게 배운 대로 슬쩍 멈춰 섰다.
그러곤 발바닥으로 재빨리 공을 굴리며 방향을 전환했다.
“어, 어엇!”
당황한 렉섬 수비수는 중심을 잃고 쓰러지다, 윤옥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것을 본 심판은 그대로 휘슬을 불었다.
“페널티킥이다!”
“나이스 플레이!”
윤옥이 따낸 페널티킥은 모즐리의 주전 공격수 켄 브리어리가 깔끔하게 밀어 넣었다.
그것으로 점수는 4 대 3.
이후 모즐리는 실점 없이 경기를 마무리하며 귀중한 승점을 따냈다.
자신의 활약으로 팀이 승리를 거두자, 윤옥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
웃고 있던 그에게 렉섬 선수가 다가와 주먹을 날렸다.
좀 전 페널티킥을 내준 덩치였다.
“너 인마, 미쳤어?”
“어디 감히 필드에서 주먹질을 해!”
모즐리뿐만 아니라 렉섬 선수들도 달려 나와 덩치를 붙잡았다.
신사적으로 절대 해선 안 되는 행위였기 때문.
“어이, 조, 괜찮냐?”
“예, 피했습니다. OK입니다.”
플레잉 코치 에디의 물음에 윤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디는 렉섬 선수들에게 끌려가는 덩치를 보며 혀를 찼다.
“런던에서 깡패들이 날뛴다더니, 필드에서도 저런 놈들이 있을 줄이야.”
런던 노팅힐에서 일어난 폭동 사건은 거의 일주일 가까이 지난 지금도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본토인들의 직장을 빼앗고 영국 사회를 좀먹는 이민자들을 축출하자는 게 폭도들이 내세운 대의.
하지만 에디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게 옛날에 독일의 나치들이 유대인들을 쫓아내자며 날뛰던 것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보수적인 사람들도 이번 폭동에 반대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여론이 좋지 못하니 오래가진 못하겠지만…….’
제발 더러운 불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 붙지는 말기를.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나치들과의 전쟁으로 날려 버렸던 에디는 나치 같은 놈들이 설치는 꼴을 결코 보고 싶지 않았다.
***
밤이 되어 준영이 돌아오자, 윤옥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허, 대활약을 해서 이겼단 말이지?”
“그렇습니다만… 어째 형님은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아, 좀 피곤해서 그래. 거기다 경기도 졌고.”
윤옥이 경기하고 있을 즈음, 준영은 블랙풀 원정 경기에 출전했다.
영국 축구 영웅 스탠리 매튜스와 다시 경기를 하게 되어 기뻤지만, 이번엔 결과가 좋지 못했다.
2 대 1로 역전패를 당한 것이다.
“그 스탠리 매튜스란 사람이 그리 잘하나요?”
“그래, 40살 넘은 아저씨라는 생각이 절대 안 들 정도로.”
전반 9분 만에 데니스 바이올렛이 선제골을 넣었을 때만 해도 오늘도 낙승이겠다 싶었다.
그런데 경기 중에 비가 마구 쏟아졌고, 그 바람에 필드는 논두렁으로 변했다.
군데군데 물웅덩이에 발이 푹푹 빠지는 수렁까지 생겼던 것.
“영국에 와서 논두렁 축구를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오늘은 진짜 좀 심하더라. 비는 마구 쏟아지지, 발은 푹푹 빠지지, 공은 안 굴러가지.”
골대로 들어가던 공이 골라인 바로 앞에 멈춰 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상황이 극악인데도 불구하고 스탠리 매튜스는 마치 날아다니는 것처럼 필드를 쏘다녔다.
“수중전 경험이 많은 아저씨였나 보군요.”
“그것도 그렇지만… 빗속에서 풀타임을 뛰는 걸 보곤 놀랐다니까.”
화석급의 만 43살 아저씨가 자기보다 어린 선수들보다 쌩쌩하게 필드를 누비며 동점 골, 역전 골의 어시스트를 만들다니!
레전드라도 이 사람은 정말 격이 다르구나 싶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스탠리 매튜스의 플레이를 봐. 너랑 비슷한 포지션에서 뛰는 사람이니 배울 게 많을 거야.”
준영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노크와 함께 경호원 로베르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로베르트 씨?”
“방금 회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런던에 있는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 창고에 방화 시도가 있었답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범인은 잡았답니까?”
로베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준영에게 윤옥이 말을 건넸다.
“형님, 그거 지금 런던에서 벌어지는 폭동과 관련 있는 겁니까?”
“그렇겠지. 창고가 있는 화이트 시티는 폭동이 일어난 노팅힐과 지척이니까.”
안 그래도 노팅힐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창고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레이시스트들의 폭동이라면, 동양인 사장의 회사 건물을 그냥 두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진짜 노팅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준영이 아는 노팅힐은 유명 여배우가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배경 지역이라는 것, 그리고 런던의 부유한 시민들에게 각광받는 거주지이자, 세계적인 축제가 벌어지는 명소라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1950년대 기준으로 노팅힐은 런던 외곽의 낙후 지역에 불과했다.
그곳에 카리브나 인도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까닭도 집세가 저렴했기 때문이라고.
‘아무튼 별다른 피해가 없어서 다행이야. 비용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경비를 더 강화해야겠어.’
런던은 수도인 만큼 인구도 많다.
그만큼 거대한 수요를 가진 시장을 제대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거점을 잘 지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준영은 바로 거실로 내려와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회사 쪽에서 의문점이 있어 걸었나 싶어 받았더니, 다른 사람이 건 전화였다.
(안녕하십니까. 간만에 연락드리는군요, 미스터 리.)
“번즈 씨로군요. 잘 지냈습니까?”
(저야 예전과 다를 게 없죠. 그보다 급히 알려 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MI6의 요원인 번즈가 급히 알려 줄 만한 일이라니.
심상찮은 느낌에 준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
노팅힐은 1960~70년대를 거치며 재개발이 되어 현재의 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유명한 노팅힐 카니발도 1958년 폭동 이후, 인종 화합과 문화 교류를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