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91. 불길한 불씨
첼시는 전반전이 끝날 무렵에 코너킥을 얻어 냈다.
그리고 잠시 후, 맨유 문전으로 낮고 날카롭게 들어온 공을 두고 한바탕 혼전 상황이 일어났다.
“잡아, 얼른!”
“드리블하다간 뺏겨. 빨리 걷어 내!”
공이 있는 곳으로 양 팀 선수들이 우당탕 몰려들어 다툼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첼시의 지미 그리브스가 침착하게 공을 골대로 밀어 넣었다.
첼시 입장에선 추격의 발판을 마련해 준 귀중한 골.
물론 맨유 팬들에겐 아쉬운 실점이었다.
“에잉, 무실점 경기가 될 줄 알았더니!”
“첼시는 만만한 팀이 아니라고. 더구나 저 지미 그리브스라는 놈, 보통 애송이가 아니야.”
1957년 여름에 첼시 1군에 올라온 지미 그리브스는 지난 시즌 22골을 넣었다.
갓 데뷔한 17살 소년이 정말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 주었던 것.
“우리 팀 막내도 저 녀석만큼 하면 좋을 텐데.”
준영이 지미 그리브스를 바라보며 한 말에 알렉스 퍼거슨은 입을 쭉 내밀었다.
“쳇, 왜 그래요? 나 오늘 한 골 넣었다고요.”
“럭키 골이잖아, 인마.”
“골은 골이죠! 두고 봐요. 올 시즌 저 녀석보다 더 많이 넣을 테니까!”
과연 가능할까.
준영이 알기로 선수로서의 명성은 지미 그리브스 쪽이 더 나았다.
‘그래도 모르지. 역사는 바뀌고 있으니까.’
그 역사를 바꾼 사람이 바로 자신.
준영은 미래의 명감독이 펼칠 활약을 기대해 보기로 했다.
***
전반을 3 대 1로 마친 맨유는 후반전에도 경기를 주도해 나갔다.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한 사람은 바로 던컨 에드워즈.
오늘 경기에 측면 풀백으로 출전한 던컨은 뛰어난 수비로 첼시의 측면 침투를 막았고, 적극적인 오버래핑으로 공격을 지원했다.
지켜보던 준영도 그의 플레이에 연방 감탄을 터트렸다.
‘완전 21세기 풀백인데?’
던컨은 어떤 포지션이든 다 소화 가능한 플레이어였지만, 풀백으로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뛰어난 피지컬에 강인한 체력, 탄탄한 수비 능력과 빠른 스피드, 정교한 패스력.
그뿐만 아니라 공수 전환에 척척 잘 대응할 정도로 전술 이해 능력이 좋고, 판단력도 우수했다.
거기다 빌드업 능력도 굉장한 수준.
공격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전진해서 패스를 해 주고, 상대 역습을 그 자리에서 끊었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슈팅도 망설이지 않았다.
뻐엉- 까아앙!
데니스 바이올렛이 백 패스로 흘려준 공을 받은 던컨의 다이렉트 슛.
무회전으로 날아간 슈팅은 골포스트를 크게 흔들었다.
첼시 선수들이 안도하던 그 순간, 바비 찰튼이 벼락같이 달려와 바운드된 볼을 골대로 밀어 넣었다.
“와! 해트트릭!”
“바비 저놈, 완전 펄펄 날아다니는구만!”
21세기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포텐 폭발!
주워 먹기라 하더라도 뛰어난 포착 능력이 없으면 스탯을 쌓는 건 불가능했다.
“이러면 다시 세 골 차인가.”
“첼시로선 힘들겠구만.”
이미 전세는 되돌리기 힘들어졌다.
비단 관중들뿐만 아니라, 기자나 축구인들이 보기에도 그랬다.
그럼에도 첼시의 소년 공격수는 포기하지 않고 동료들을 독려하며 팀의 공격을 이끌어 갔다.
‘때리는 슈팅이 죄다 유효 슛이군. 결정력 하나는 굉장한 녀석이다.’
저런 녀석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다른 수비수들도 준영처럼 생각했던지, 지미 그리브스가 근처에 있으면 냉큼 마크를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미는 후반 77분, 로니 코프의 마크를 단 상태에서 중거리 슛을 날렸다.
그 슈팅은 해리 그렉이 손쓸 수 없는 골대 왼쪽 하단 구석에 정확히 꽂혔다.
“대단한데, 저 애송이!”
“그래, 공격수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맨유 선수나 관중들도 감탄을 보낼 정도로 멋진 슈팅.
그러나 분통함을 느끼는 이도 있었다.
“큭, 질 것 같으냐!”
주장에게 지미 그리브스보다 골을 더 많이 넣겠다고 큰소리를 쳤던 알렉스 퍼거슨.
그는 자신의 두 번째 골을 넣기 위해 부지런히 첼시 진영을 쑤시고 다녔다.
“패스해요, 패스! 나 빈 공간에 있다고!”
두 팔을 마구 휘두르며 어필했지만, 공은 전달되지 않았다.
‘녀석아,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 수비수들이 다 보잖아.’
아무리 빈 공간에 있어도 저러면 소용이 없다.
아니, 그래도 어그로를 끌고 있으니 도움은 되었다.
공을 몰고 전진해 가던 준영은 첼시 수비수들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서 데니스 바이올렛에게 패스를 밀어 주었다.
마크하는 피터 실렛을 제친 데니스는 뛰어나온 골키퍼까지 따돌렸다.
‘음, 노마크인데 각도가 없군.’
잠시 주저하는 사이 피터 실렛이 황급히 달려 들어왔다.
이에 데니스는 막 문전으로 쇄도한 알렉스에게로 공을 보냈다.
찰스 실렛과 몸싸움을 벌이며 들어오던 알렉스는 데니스의 어시스트를 발끝으로 밀어 넣었다.
“또 들어갔다!”
“오, 우리 편 애송이도 만만찮은걸!”
오늘 경기 총 5골.
화끈하게 승리를 거둔 맨유는 1958-59 시즌을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
맨체스터 북쪽 랭커셔주 블랙번.
풋볼 리그 원년 12개 팀의 하나였던 블랙번 로버스가 이 도시에 자리하고 있었다.
블랙번은 지난 시즌 디비전2에서 웨스트햄에 이어 2위로 1부 리그로 승격했다.
그리고 올 시즌 첫 경기인 뉴캐슬 원정에서 5 대 1의 대승을 거두며 원년 멤버의 화려한 귀환을 알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들의 승리는 그리 이슈가 되지 못했다.
대다수 언론의 관심은 유럽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쏠려 있었으므로.
“유나이티드가 첼시를 5 대 2로 격파했군.”
“바비 찰튼은 시즌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어. 거기다 던컨 에드워즈의 복귀라…….”
훈련을 시작하기 직전.
팀의 고참 윌리엄 에커슬리를 비롯한 블랙번 선수들은 어제 경기 소식이 실린 신문을 보았다.
해트트릭을 하고 손가락 셋을 펼친 바비 찰튼의 모습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우리가 유나이티드랑 경기를 하면 결과가 어떨까?”
“글쎄요, 일단 정보 누설부터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유나이티드의 첩자가 우리 팀에 있잖아요.”
공격수 피터 도빙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샌디 버스비를 바라보았다.
샌디는 맨유의 감독 맷 버스비의 아들이었기 때문.
피터의 말에 샌디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첩자를 전향시켜 유나이티드의 정보를 빼낼 생각을 하셔야지.”
“오, 알려 줄 마음이 있는 거야?”
“후후후, 버림받은 거나 마찬가지인 신세라서.”
“버림받다니?”
“아버지가 8월 초에 새로운 전력 분석팀을 꾸렸어.”
그 전력 분석팀은 마크 존스와 조니 베리, 데이비드 펙 등 비행기 사고로 은퇴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시즌이 개막하기 전부터 망원경과 휴대용 무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다른 팀을 정탐하고 다녔다고.
“스파이 활동이라니. 유나이티드 놈들은 돈이 썩어 나나?”
“FA컵이랑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하면서 외부에서 투자나 지원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존 Y. 리도 그 투자자 중 한 명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하면서 알게 된 자본가들에게 투자와 지원을 적극 권유했다고.
세간에 유명한 스포츠 스타이자 잘나가는 사업가이다 보니, 이에 응한 이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지난번에 만났더니 뭐라고 하는지 알아? 투자금이 좀 더 모이면 제대로 된 선수 기숙사, 클럽 하우스라는 걸 만들 거래.”
“거참, 실력도 그렇지만 생각하는 것도 딴판이로군.”
탄성을 내뱉던 피터는 한쪽에서 훈련 준비를 하던 일본인 선수를 슬쩍 바라보았다.
가와부치라든가, 사부로라든가.
아무튼 이번 시즌 새로 영입된 선수였다.
조니 캐리 감독은 딱히 맘도 없었는데, 구단주가 ‘우리도 신비한 동양의 선수를 영입하자!’라면서 런던에서 데려온 녀석이라고.
문제는 체격도 별로고, 실력도 신통찮았다.
가장 큰 문제는 영어도 잘 못한다는 것.
나름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인텔리에 영어도 배웠다고 하는데, 그의 발음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는 형편이었다.
“똑같은 동양인인데, 왜 우리 쪽 선수는 별로인 걸까.”
“똑같은 영국인이라도 축구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부류도 있잖아.”
“하긴, 그것도 그러네.”
피터와 샌디의 대화를 가만히 엿듣고 있던 가와부치 사부로는 존 Y. 리, 이준영이 들먹여지자 눈살을 찌푸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시합이 9월 6일인가.’
5라운드까지 앞으로 13일.
하나 출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2부에서 승격한 팀인데 뭐가 이렇게 강한지…….’
훈련에서 부딪쳐 본 블랙번 선수들의 몸은 돌처럼 단단하고, 체력도 뛰어났다.
경기 템포나 슈팅은 얼마나 빠른지 처음엔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다.
그건 함께 영국에 온 나가누마 겐이나 히라키 류조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
그 둘은 블랙번처럼 승격 팀인 웨스트햄에 있었는데, 자주 전화나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은 매번 힘들다, 아프다, 음식이 안 맞는다며 하소연하곤 했다.
‘그 조센징 놈은 어떻게 이겨 낸 걸까? 역시 외국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아무튼 막상 경험해 보니 영국 풋볼 리그의 수준은 너무나 높았다.
동료들은 물론, 연습 경기에서 맞붙어 보았던 아마추어 팀 선수들의 기량도 자신 못지않을 정도였다.
당연히 팀에서 자신을 보는 눈빛도 신통찮을 수밖에.
이대로라면 1경기라도 출전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안 돼.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면 난 끝장이야.’
자신을 이곳까지 보내 준 흑룡회나 그들의 지원 세력자들이 과연 가만히 있겠는가.
돌아가면 평생 축구장에는 발붙일 수 없는 신세가 될지 모른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 어떻게든!’
약해지는 마음을 뿌리친 가와부치는 축구화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훈련장으로 나갔다.
***
해가 지는 런던.
노팅힐 지하철역에서 2명의 동양인이 내렸다.
그들은 올 시즌 웨스트햄에 입단했던 나가누마 겐과 히라키 류조였다.
“히라키, 그리도 신나냐?”
“당연하죠. 오랜만에 일식을 먹을 기회잖아요.”
두 사람은 영국에 와서 음식 문제로 고생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끼 입맛에 맞지 않는 빵과 콩, 계란과 고기만 먹자니 힘들었던 것.
런던에 차이나타운이 있고, 놀랍게도 인스턴트로 된 라면까지 팔아 대안이라고 할 만한 게 있었지만, 이것도 마땅찮았다.
“중화요리라고 일본에 있는 거랑 똑같을 거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지.”
“라면도 마찬가지예요. 마늘 냄새가 강해서 영…….”
“흥, 조센징이 만든 게 다 그렇지.”
그렇게 곤경을 겪던 차에 오늘 노팅힐에 사는 일본인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런던에서 두 사람의 통역을 맡은 유학생의 친구였는데, 제법 요리를 할 줄 안다고.
“참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어요.”
“그러게. 성원하는 동포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도 힘내서 열심히 해야지.”
오랜만에 쌀밥과 된장국을 먹을 생각에 입에 도는 군침을 삼키던 두 사람.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던 두 사람이 도중에 발을 멈췄다.
“저, 저게 뭐죠?”
“야쿠자, 아니 갱들인가?”
두 사람의 눈에 10여 명의 청년들이 흑인을 폭행하는 광경이 들어왔다.
근처 건물에서는 또 다른 흑인이 청년들에게 끌려 나와 몰매를 맞고 있었다.
“깜둥이들을 쫓아내자!”
“영국은 백인의 나라다!”
몽둥이와 쇠파이프 등을 들고 난동을 부리던 청년들은 주춤주춤하던 두 일본인들을 보았다.
“어, 옐로우 멍키잖아.”
“칭크도 깜둥이랑 똑같아. 백인의 나라를 얼룩지게 하는 더러운 것들을 없애 버려!”
폭도들이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자, 둘은 허둥지둥 뒷걸음질을 쳤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인 거지?”
“몰라요. 일단 도망칩시다!”
두 사람은 안전한 곳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폭도들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사방에는 폭력과 방화가 판치고 있었다.
***
1. 지미 그리브스는 첼시와 토트넘에서 뛰었던 레전드 플레이어입니다.
굉장히 천재적인 득점 감각을 가지고 있는 선수로 유명했죠.
아쉽게도 선수 생활 말미에 심한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노년에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중이지요.
2. 일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노팅힐 폭동은 1958년 8월 말 극우 단체 화이트 디펜스에 의해 야기된 사건입니다.
주 피해 대상은 카리브계 이주민들이었는데, 이들은 백인 폭도들에게 맞서 싸우다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 사건의 주범 9명이 체포되어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았고, 영국의 정책과 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