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88화 (188/400)

Round 188. 새로운 출발점

암스테르담 올림픽 스타디움.

경기장 트랙까지 입석 관중들이 꽉 들어찼다.

4만이 넘는 관중들의 시선은 AFC 아약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에 쏠려 있었다.

“이겨라, 신의 아이들(* de Godenzonen, 아약스의 별명)!”

“미헬스! 미헬스!”

에레디비시 초대 우승 팀이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팀 AFC 아약스.

그들은 유러피언 컵 챔피언을 상대로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대등하게 경기를 해 나갔다.

아약스의 공격을 주도하는 선수는 베니 뮬러와 샤크 스와트.

이 20살 동갑내기 유대인 콤비는 부지런히 맨유의 빈 공간을 파고들어가 페널티 박스로 패스를 찔러 넣고 크로스를 올렸다.

마무리를 맡은 것은 최전방 공격수 리누스 미헬스.

186센티미터의 키에 당당한 체격을 가진 그는 테크닉은 부족해도 힘과 높이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파이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

투웅-!

헤딩슛을 시도하던 미헬스는 공중에서 맨유 센터백과 부딪쳐 밀려 나갔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괴물 동양인 센터백은 공중으로 튀어 오른 공을 여유 있게 잡아챈 후, 직접 공을 몰고 앞으로 나갔다.

“와, 미헬스가 또 밀려났군.”

“헤딩을 하나도 못 따내고 있어요.”

“저게 저승사자 군단을 울린 통곡의 벽인가.”

아들과 함께 오늘 경기를 보러 온 허머누스 크루이프는 맨유 5번의 플레이에 연방 혀를 내둘렀다.

정말 굉장한 선수였다.

피지컬은 물론, 개인기나 체력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한 면이 없었다.

“헨드릭, 너도 저 선수를 보고 배우는 게 어떠니?”

올해 11살인 헨드릭은 아약스의 유스팀에서 뛰고 있었다.

그래서 해 준 말이었는데, 아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빠! 저 5번은 수비수잖아요! 난 공격수라고요!”

“공격도 꽤 하는데?”

허머누스의 말대로 5번 존 Y. 리는 동료 선수들과 패스를 주고받더니 순식간에 아약스 문전까지 쇄도해 왔다.

그러곤 주장 게르 반 모릭을 절묘한 턴으로 제쳐 내고 강슛을 날렸다.

어찌나 슛이 강했는지, 골키퍼가 펀칭을 했음에도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무지막지한 슈팅에 헨드릭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저 5번, 진짜 수비수 맞아?’

이후에도 경기를 계속 보니 맨유에는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공수 양쪽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더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를 격침시킨 남자 바비 찰튼과 잉글랜드 축구 최고의 천재 플레이어라는 던컨 에드워즈.

그들은 존 Y. 리와 더불어 엄청난 체력과 활동량, 그리고 넓은 시야와 창조적인 플레이로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저게 유럽 챔피언, 월드 클래스 선수들의 플레이구나!’

헨드릭은 감탄했다.

예전엔 파스 빌케스(* Faas Wilkes(1923~2006), 데니스 베르캄프 이전 네덜란드 최고의 공격수)같이 뛰어난 드리블러를 마냥 동경했는데, 오늘 경기를 보자니 생각이 달라졌다.

‘최고의 플레이어는 저렇게 필드 전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영향력을 끼치는 선수가 아닐까?’

헨드릭 요하네스 크루이프.

훗날 축구계에 요한 크루이프로 알려진 소년은 오늘 경기를 보고 한층 성장하고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

아약스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전지훈련을 마친 맨유 선수들은 맨체스터로 돌아왔다.

여독을 풀 겸, 버스비 감독은 선수들에게 일주일의 휴가를 주었다.

8월 말부터 시작하는 새 시즌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선수들을 마냥 굴리기만 할 순 없었기 때문.

“명심해. 휴가를 준 건 쉬라고 준 거지, 방탕하게 놀라고 준 게 아니야.”

그리 말한 머피 코치는 휴가 끝나고 몸 상태가 개판인 놈들은 가만히 안 둔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어디 체중이 늘기만 해 봐. 스페셜 트레이닝으로 굴려 버릴 테니까.”

“으윽, 제발 그건 참아 주세요.”

준영이 전수한 21세기의 트레이닝은 선수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딱히 어렵지 않고 훈련 시간도 짧은데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초죽음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그래도 효율이 좋기에 일부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들은 꽤 좋아했다.

“존, 휴가 동안 뭘 할 거야?”

“쉬어야지. 던 너는?”

준영의 말에 던컨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었다.

“당연히 특훈이지! 난 거북이들에게 추월당한 토끼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이 녀석, 속내는 초조한 모양이군.’

부상으로 이탈한 사이 바비 찰튼은 월드 클래스가 되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프백에선 로니 코프와 프레디 굿윈이 제 몫을 다할 만큼 경험과 실력이 올라갔다.

물론 재능에 있어선 던컨이 그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문제는 현재의 맨유는 뮌헨 사고 이전의 맨유와 다른 새로운 팀이라는 점.

그렇다 보니 던컨도 전지훈련 기간 동안 팀워크를 맞춰 나가는 데 애썼다.

“너무 무리하진 마라, 천재.”

“Yes, Sir.”

장난스럽게 경례를 보낸 던컨이 떠난 후, 준영은 슬쩍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이제는 시계나 계산기, 카메라, 메모장 등 몇 가지 기능밖에 쓸 수 없는 미래의 모바일 기기.

준영의 눈에 시간보다 그 위의 날짜가 눈에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벌써 1년이 넘었구나.’

잠시 날짜를 계산해 보던 준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난 1년 사이 참 많은 일이 있었고,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빌 섕클리, 데니스 로, 버트 트라우트만, 맷 버스비, 던컨 에드워즈…….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무대로 나와서 체사레 말디니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펠레 등 레전드 플레이어들과 맞붙어 보기도 했다.

‘처음 과거로 왔을 때만 해도 눈앞이 깜깜했었는데, 지금은 더 먼 곳을 보고 있구나.’

빅 이어를 들어 올리고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선수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며 레전드 반열에 올랐지만, 거기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새로운 시즌이 기대되는군.”

또 어떤 일들이,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흥미진진한 미래를 향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그에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준! 여기예요!”

길 한편에서 세워진 세단.

체트리와 마중 나온 리즈가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시대에 와서 맺은 첫 번째 인연.

준영은 함께 미래로 나갈 연인이 있는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

모즐리의 실파크.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는 건 이곳을 홈구장으로 쓰는 모즐리 AFC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빨리빨리 움직여!”

“그쪽의 빈 공간으로 들어가야지!”

청백으로 나뉘어 자체 연습 경기를 벌이고 있는 모즐리 AFC에는 2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한 명은 맨유의 주장이자, 이곳 모즐리 AFC의 객원 코치를 맡고 있는 이준영.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준영을 만나러 영국까지 왔었던 조윤옥이었다.

윤옥은 준영의 권고대로 한국으로 돌아가 정식으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왔다.

물론 무단가출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고.

“패스! 이쪽으로!”

백팀의 윙어를 맡은 조윤옥은 공이 전달된 쪽으로 재빨리 달려가며 수비수를 제쳐 냈다.

그러고는 청팀의 페널티 박스 측면에서 과감하게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슈팅은 골키퍼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너무 서둘렀잖아! 더 치고 들어가서 쏴야지!”

“넵, 시정하겠습니다!”

필드 밖에 있던 준영의 호통에 고개를 숙였던 윤옥은 다시 수비에 가담하러 백팀 진영으로 내려갔다.

준영과 함께 윤옥을 지켜보던 모즐리 AFC의 감독 에드먼드 짐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발 하나는 정말 빠르군요.”

“생긴 거랑 다르게 빠르긴 하죠. 슛도 정확하고 실수도 적죠. 하지만 그걸론 부족해요.”

준영의 말대로 윤옥은 비슷한 체격의 영국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쉬 밀려나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체력도 부족한 편.

연습 경기 후반 30분에는 완전히 지쳐서 몸이 기역자로 굽어 버렸다.

결국 준영은 그를 교체시켰다.

“뛰어 보니 어때? 아마추어 팀도 만만치 않지?”

“…예.”

윤옥은 겨우 목소리를 짜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준영이 모즐리 AFC 연습 경기에 뛰어 보라고 했을 때만 해도 자신감이 있었다.

아니, 준영이 자신을 너무 낮게 보는 게 아닌가 내심 불만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한국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있다는 육군 특무대에서도 졸업하면 들어오라는 영입 제안을 들었을 정도의 유망주였으니까.

그래서 영국 프로팀은 몰라도 아마추어 팀에서는 가볍게 활약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딴판.

연습 경기 90분도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축구 종가의 벽은 상상보다 훨씬 높았다.

“윤옥아, 이 사람들, 1년에 몇 경기 뛰는지 알아? 30경기, 아니 많게는 40경기 넘게 뛰어.”

“그, 그렇게나 많이 말입니까?”

“한국은 그렇지 않지?”

윤옥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도 이 시대 한국 축구의 상황을 자세히는 몰라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리그도 없고, 1년에 한두 번 대회가 있는 게 고작이다.

그런 판이니 선수들이 실전을 뛰어 봤자 몇 경기나 뛰겠는가.

당연히 체력이나 경험에서는 유럽 선수들에게 훨씬 뒤처질 수밖에.

“저는…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군요. 그런 주제에 감히 제자로 받아 달라고 떼나 쓰고…….”

“우물 밖으로 나오려고 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좀 더 나아지겠다는, 배우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발전도 없다.

그런 점에서 윤옥은 한 단계 성장했다고 할 수 있었다.

“자, 지금 여기가 시작점이다. 여기서 위로 올라갈지, 아래로 굴러떨어질지는 네가 하기에 달렸어.”

“정상까진 꽤 멀군요.”

“시작이 반이지.”

준영도 윤옥처럼 목표가 까마득하게 보이던 때가 있었다.

청소년 대표팀 발탁이라는 줄 하나만 붙잡고 프랑스에서 프로 무대를 두들겼다.

그렇게 오르고 또 올라서 AS 모나코의 주전이,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월드컵에 출전했다.

갑작스레 과거로 와서 모든 경력을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부딪치며 여기까지 왔다.

그렇기에 윤옥도 의지만 있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계속 오르다 보면 형님처럼 월드컵에 나갈 수 있을까?’

윤옥은 지난 스웨덴 월드컵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경쟁하는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선수를 보았다.

펠레라는 이름의 그 소년은 정말 충격적인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체격이 월등한 선수들을 상대로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쩔쩔매게 만들었다.

그만한 실력자는 앞으로 평생 공을 차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녀석과 달라. 출발점도, 실력도 다르지. 하지만 언젠가 만나서 맞붙어 보고 싶어!’

승리는 도전하는 자만이 쟁취할 수 있다.

윤옥은 그 도전을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형님,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제가 프로로 뛸 때까지 은퇴하지 말아 주세요.”

맞붙거나, 함께 뛰어 보거나.

윤옥은 꼭 준영과 함께 경기를 하고 싶었다.

이러한 윤옥의 요청에 준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다려 주지. 대신 나보다 먼저 은퇴하면 죽는다?”

“감사합니다!”

준영이 축구 선수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윤옥을 격려해 주고 있을 때였다.

프레드로 저택에서 체트리가 달려왔다.

표정을 보니 뭔가 급한 일이라도 벌어진 듯했다.

***

오늘 준영에게 튕겨 나간 리누스 미헬스는 토털 사커를 완성해 AFC 아약스의 전성기를 이끈 명장입니다.

본문에도 나온 요한 크루이프의 스승인 사람이죠.

현역 시절 공격수로서도 수준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허리 부상 때문에 30살의 나이에 은퇴해야 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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