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87. 악녀와 소년
같은 시대 마릴린 먼로와 더불어 매력적인 미모로 명성을 날린 브리지트 바르도.
하지만 동물 보호를 빙자한 망언과 백인 우월주의 행각으로 지탄을 받은 인물이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도 개고기 문제를 트집 잡아 망언을 일삼아 무개념 개빠 할망구로 낙인찍혔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리즈 시절 미모를 보았다 해도 준영이 호의를 느낄 리 만무했다.
“이준영입니다. 유명하신 은막의 스타를 이렇게 뵐 줄은 몰랐습니다.”
반갑지 않은 상대라고 해도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악수를 나눈 브리지트가 곧장 손수건으로 손을 닦는 모습을 보자니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이게 진짜! 내가 무슨 병균이냐!’
“어… 일단 좀 앉지.”
앙리도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했던지 슬쩍 끼어들어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윌은 어때? 잘 지내고 있는 건가?”
“착실히 일하면서 살고 있어.”
윌리엄 터너는 여전히 옛 부하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공장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소란을 피우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준영이 습격당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찾아와서 와일드 테리어와 두목인 더그에 대해서 알려 주기도 했다.
“착실하게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군. 기왕이면 학업에도 힘썼으면 좋겠는데…….”
“진심이야?”
“그럼, 어찌 되었든 그 녀석은 내 동생이니까.”
앙리의 말에 준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빈말이라고 해도 나쁘지 않았으므로.
“그럼 본인이 좀 모범을 보이지 그래? 지금처럼 방탕하게 살아선 윌에게 미움만 살걸.”
“하하하, 그런가.”
앙리가 머쓱한 표정을 지을 때, 브리지트가 날카롭게 언성을 높였다.
“무례하군요. 이분이 누구신지 알기나 하고 감히 훈계를 늘어놓는 건가요? 보그 백작 가문의 소공자라고요!”
“BB, 괜찮아. 나랑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앙리가 만류했지만, 브리지트는 쉽게 말문을 닫지 않았다.
“공 차는 걸로 명성을 얻었다고 시건방 떨지 말아요. 그런다고 천박한 근본이 달라질 것 같아요? 배운 게 있으면 주제를 알아야지.”
“BB, 그만하라니까!”
브리지트의 폭언에 맨유 선수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단 말인가.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어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방금 발언은 준영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비아냥대는 소리 같았으니까.
과연 준영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동의합니다, 바르도 양. 제가 존경하시는 분께서도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하셨죠. 당신도 마찬가지로 보이는군요.”
뜨겁게 분노해야 할 상황에서 싸늘하게 웃음을 지으며 쏘아붙인 준영.
브리지트의 표정이 좀 더 표독스럽게 변했다.
“마찬가지라니? 방금 그 말, 무슨 뜻으로 말한 거죠?”
“알아서 생각하십쇼. 천박한 놈의 훈계나 충고 따위 필요 없을 게 아닙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미안해하는 앙리를 보며 말했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간 벼락 맞는단 말이 있지. 그러니 사람을 만나더라도 골라서 만나는 게 좋아.”
“뭐라고? 비천한 야만인 주제에……!”
발끈하던 브리지트는 서슬이 퍼런 준영의 눈길에 움찔했다.
“예전에 읽은 책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문명인들은 무례한 말을 해도 머리통이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야만인보다 무례한 거라고.”
브리지트는 더 이상 떠벌릴 수 없었다.
마치 준영이 ‘계속 나불대면 네 머리통을 쪼개 버리겠다.’라고 하는 것 같았으니까.
앙리와 브리지트에게서 등을 돌린 준영은 곧장 계산을 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경호원 로베르트나 맨유 선수들도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진짜 저런 여자일 줄은…….”
“사람은 겉이 아닌 속을 보라고 하더니만.”
“다시 보니 별로 예쁘지도 않던걸.”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존 레논.
그는 브리지트 바르도의 팬이었던 터라, 식사가 끝나면 사인을 받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잘 대해 준 주장에게 폭언을 날리는 모습을 보자니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어이, 골 빈 여자 말에 신경 쓰지 마.”
“괜찮아요, 숀. 바로 흘려버렸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준영의 찝찝한 기분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목에 걸고 있던 탈리스만을 꺼냈다.
그러자 이 부적을 주었던 리즈의 모습이 금방 머릿속에 그려졌다.
‘얼른 보고 싶군. 목소리도 듣고 싶고…….’
호텔로 돌아가면 바로 모즐리의 프레드로 저택에 전화부터 하리라 마음먹었다.
***
파리를 떠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단은 비행기를 타고 독일로 향했다.
독일에서 만난 첫 상대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유러피언 컵 1956-57 시즌에 맨유가 만난 적이 있는 팀이었다.
당시 맨유는 홈에서 3 대 2로 이겼고, 원정에서는 0 대 0으로 비겼다고 한다.
‘꿀벌 군단은 이 시대에도 만만찮게 강했구나.’
21세기에 손웅민이 양봉업자로 돌문을 탈탈 털었다면, 현 시대 맨유의 양봉업자는 데니스 바이올렛이었다.
재작년 유러피언 컵에서 돌문을 상대로 2골을 터트린 바이올렛은 이번 친선전에서도 2골을 터트리며 3 대 0 완승에 기여했다.
빌 포크스와 함께 센터백으로 출전한 준영은 상대 공격을 안정적으로 막아 내고 던컨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활약을 펼쳤다.
“데니스도 예전의 기량을 모두 되찾은 것 같군.”
“네, 부상 후유증은 이제 다 떨쳐 낸 것 같습니다.”
버스비 감독과 머피 코치는 내용과 결과 모두에 만족했다.
제일 맘에 드는 건 선수들의 실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는 점.
유럽 챔피언이라는 자부심 때문일까, 플레이도 훨씬 과감해졌고, 상대 팀의 공세에도 여유롭게 대처했다.
“앞으로 두 경기 남았지?”
“네, 인근의 샬케 04와 시합을 한 다음에 네덜란드로 가서 AFC 아약스랑 경기할 겁니다.”
“좋아, 그럼 남은 두 경기에서는 자네가 월드컵에서 배워 온 전술을 써먹어 보자고.”
“브라질의 4-2-4 포메이션 말입니까.”
비록 우승이 좌절되긴 했지만, 브라질의 전술은 월드컵을 보러 온 축구인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매직 마자르의 MM 포메이션을 강화한 이 전술은 상황에 따라 6명의 수비수와 6명의 공격수를 활용할 수 있었다.
즉, 수비는 더욱 견고하게, 공격은 더욱 강력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
브라질의 전술에 주목한 머피 코치는 맨유로 복귀한 후에 이 전술을 선수들에게 훈련시켰다.
그러나 새로운 전술은 쉽게 이식되지 않았다.
기존의 전술에 익숙해 있던 선수들에게 낯설었기 때문.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빈 공간을 메우고 공수 균형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전술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더라고요.”
“거기다 체력과 테크닉도 좋아야 하고 말이지?”
“예, 시시각각 변하는 공격과 수비 상황에 대응해 협력을 원활히 하자면 창의성도 좋아야 하죠.”
“생각보다 이식에 시간이 걸리겠군. 하긴 브라질에 맞는 옷이었으니 잉글랜드식으로 맞추는 게 쉽진 않겠지.”
그래도 버스비는 남은 두 경기에서 실험을 해 볼 생각이었다.
실제 경기에서 계속 써먹어 봐야 익숙해질 테니까.
***
샬케 04와의 경기는 1 대 0의 신승이었다.
RC 파리전과 같이 비주전 선수들을 선발시켜 4-2-4 전술로 경기를 했는데, 플레이는 깔끔하지 못했다.
특히 경기 중에 미드필드 좌우 공간이 상대 공격수들에게 노출되어 위기 상황이 곧잘 일어나곤 했다.
질 뻔한 경기를 그나마 이길 수 있었던 건 후반에 교체로 들어갔던 던컨이 프리킥 골을 성공한 덕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선 좌우 풀백뿐만 아니라 윙어들도 수비를 거들어 줘야 해.”
“브라질의 자갈루라는 공격수는 수비도 게을리하지 않았지.”
“맞아. 심지어 풀백인 니우통 산투스가 공격에 나가면서 생긴 빈 공간을 채워 줬다고.”
경기가 끝난 후 준영과 콜린 웹스터, 바비 찰튼 월드컵 3인방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수정해야 할 점을 동료 선수들에게 일러 주었다.
이 과정에서 준영의 8밀리미터 무비 카메라로 찍은 경기 영상이 이용되었다.
단순히 말로 듣는 것보다 자신이 뛴 영상을 보니, 선수들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알았으니까 다음 경기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다음 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까? 로테이션을 돌리는 것 같던데.”
“뭐, 출전하지 못하면 열심히 보기라도 해야지. 보면서 배우는 것도 있을 테니까.”
독일에서 일정을 마무리한 맨유 선수단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다.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자 고즈넉한 농촌 풍경과 운하, 풍차가 나타났다.
‘딱 네덜란드다 싶은 풍경이로군. 다음 시즌을 마치면 이쪽으로 리즈와 오붓하게 관광이라도 올까?’
준영이 차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을 때, 버스가 도중에 파르세벨트라는 작은 마을에 멈췄다.
“여기서 잠시 쉬어 가겠습니다.”
운전기사의 말에 버스에서 나온 선수들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그런 그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다가와서 음료수와 간식거리 등을 팔았다.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곧잘 상대해 봤는지 장사 수완이 상당했다.
“응? 자네들, 영국인들인가?”
“맞아요. 영어 할 줄 아세요?”
“알지. 전쟁 때 우리 집 다락에 숨겨 준 영국과 미국 파일럿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와, 혹시 설마 레지스탕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더 모여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외국인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온 적은 없었으니까.
“영국의 축구 선수들이래.”
“이번에 유럽 챔피언을 차지했다나 뭐라나.”
쑥덕이던 사람들의 시선은 준영에게 쏠렸다.
이런 시골에서 동양인을 구경하는 건 흔치 않았으므로.
“아저씨, 일본 사람이야?”
“아니, 난 한국인이란다, 꼬마야.”
준영은 자신에게 말을 건넨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이는 10대 초반 정도?
그런데 얼굴이 굉장히 친숙해 보였다.
“영어 좀 하는구나. 학교에서 배웠니?”
“응. 근데 아저씨도 선수야?”
“그래, 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이지.”
“주장이면 팀에서 제일 잘하겠네?”
“물론이지.”
준영의 말에 던컨이 곧바로 반박에 나섰다.
“아니지, 유나이티드의 에이스는 이 몸이라고!”
“예전의 에이스였지.”
“나 참, 뭐라는 거야? 진짜 내 실력 보여 줘?”
느닷없이 자존심 충돌.
곧장 버스 트렁크에서 공을 하나 꺼낸 두 사람은 일대일 대결을 펼쳤다.
스텝 오버를 비롯해 둘의 발끝에서 터지는 현란한 개인기에 소년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탄성을 금치 못했다.
저런 발재간은 시골, 아니 암스테르담에 가서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와, 둘 다 진짜 잘하네!”
소년의 감탄에 던컨이 으스댔다.
“말했잖아. 난 유나이티드의 에이스라고.”
“난 이 에이스도 못 나간 월드컵에 나간 플레이어지.”
“나 참, 내 보결로 나갔으면서 잘난 척은!”
준영과 던컨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저편에서 나타난 중년 남자가 소년을 불렀다.
“후스! 거기서 뭘 하는 게냐? 한참 찾았잖니!”
“아, 죄송해요, 아버지. 구경 좀 하다가 그만…….”
준영은 소년의 이름을 듣고 흠칫했다.
“후스? 네 이름이 후스야?”
“응, 후스 히딩크야.”
후스, 영어식 발음으론 거스.
네덜란드 시골에서 만난 이 꼬마가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 낸 구국의 명장 희동구라니!
‘아, 어쩐지 본 적이 있던 얼굴이다 했더니!’
“이만 가 볼게. 아저씨들도 좋은 여행 하라고.”
준영은 부리나케 부친에게 달려가는 소년 히딩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의 짧은 만남이 세계적인 명장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정말이지 궁금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당장 미래로 가서 알아보고 싶을 정도로.
***
히딩크 감독의 풋풋하신 현역 시절 모습입니다.
엊그제 같던 2002년 월드컵도 어느새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우리에게 아픔과 영광을 모두 맛보게 해 주신 희 감독님,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