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86. 상상도 못한 조우
준영이 한창 프랑스 전지훈련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즈음.
한국에 있는 이억관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판매는 어떤가?”
“예상보다 훨씬 잘 팔리고 있습니다. 재고가 거의 전무할 정도입니다.”
상무의 보고에 억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서울 외곽에 공장을 마련하고 기자재를 들여와서 라면 생산을 시작한 지 약 두 달 정도 되었다.
처음엔 직원들의 숙련도가 부족해서 난항을 겪었지만, 다행히 안정적인 생산과 판매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밀가루 가격도 상승하고 있으니 가격을 좀 더 높게 받아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건 안 돼. 서민들이 적은 돈으로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려고 만들었는데 폭리를 취할 순 없지.”
“폭리가 아니고, 조금만 더 받아도 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지금도 충분히 수익은 나고 있지 않나. 몇 푼 더 벌겠다고 얌체같이 굴다간 신뢰를 잃고 말아.”
준영이나 케일에게 듣자니, 영국에서는 벌써 짝퉁 라면과 과자들이 팔리고 있다고 했다.
한국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미국의 원조 기간 동안 제분 산업이 꽤 발전하면서 국수와 과자 등을 만드는 업체들이 많아졌으니까.
즉, 비슷한 짝퉁을 만들 기술력은 있는 것이다.
“아 참, 그리고 다음 주에 시청에서 위생 검열을 나올 거라고 합니다.”
“또? 지난달에 끝난 거 아닌가?”
“정부에서 한창 방역에 신경 쓰라는 지침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그러는데… 아무리 봐도 뇌물을 바라는 것 같습니다.”
“쳇, 썩을 놈들 같으니라고!”
사실 적당히 기름칠을 할 돈이 없는 건 아니다.
김창룡이 숨겨 둔 재산을 수거하면서 자금은 충분했으니까.
지금 모아 둔 자금만 해도 현재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재벌들과 맞먹을 정도.
어디 돈뿐인가.
준영이 시킨 대로 강남 쪽에 농지도 많이 매입해 두었다.
공장에서 필요한 식자재를 생산하기 위한 목적인 듯한데, 일단 경작은 생계가 힘든 독립지사의 가족이나 참전자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맡겼다.
‘근데 잠실은 왜 사라고 한 거지? 개간을 하기도 힘든 모래밭인데.’
아무튼 좋은 데 쓰려고 마련한 돈과 땅을 엉뚱한 놈들 배 불리는 용도로 쓰고 싶진 않았다.
“할 수 없구만. 백을 좀 써야겠어.”
***
이억관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옛 동지들의 주선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인맥을 맺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그들 대부분은 초야로 돌아가거나, 정치적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관직에 몸담은 이들이 남아 있고, 현직 관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명사들도 있었다.
오늘 찾아가는 김현철도 그런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던 그는 임시 정부의 구미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재무부 장관을 맡고 있었다.
“사업을 하는데 공무원들이 성가시게 군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장관님. 아무래도 좀 지나친 듯해서…….”
“거참, 일부러 고국에 돌아와서 유익한 사업을 하는 사람을 돕진 못할망정……. 알겠소. 내 손을 써 볼 테니, 염려하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장관님.”
반색을 하는 이억관에게 김현철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마침 생각난 게 있던지 다시 말을 건네 왔다.
“아 참, 이 사장, 요즘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면서? 고아나 난민 구호도 하고, 독립지사들 가족의 생계도 살펴 주고 말이오.”
“예, 뭐… 고난의 세월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 마음먹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 참으로 장한 일을 하고 있소. 그래서 이 사장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소.”
김 장관의 말에 억관은 내심 웃음을 지었다.
부유한 귀국 동포와 알고 지내려는 이들이 꽤 많았고, 실제로 귀국 후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과거 독립지사들도 있었고, 경제인들이나 군인, 정치인들도 있었다.
순수하게 친목을 다지려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도움을 요청하거나 이권 보장을 빌미로 넌지시 뇌물을 요청하는 작자들도 있었다.
김현철이 소개해 주려는 이들은 과연 어떤 부류일까?
“혹시 제가 아는 분들입니까?”
“육군 제2군단장 안춘생 장군과 중화민국 대사인 김홍일 대사라오.”
전자는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로 중국군 장교와 광복군 구대장을 지냈고, 후자는 오성 장군으로 이름을 날린 영웅.
정말이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명망 있는 분들이 아닌가.
놀란 눈을 한 이억관을 보며 김현철은 웃음을 지었다.
“이 사장이 매헌의 가족들을 살펴 줬다는 얘기를 듣고 김 대사께서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더군. 그래서 꼭 만나고 싶다 하셨소.”
“오성 장군께서 절 찾으신다니 참으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현철의 말에 따르면 김홍일은 이번 달 말에 잠시 귀국을 할 예정이라고.
그쯤에 안춘생도 시간을 낼 수 있기에, 따로 장소를 마련해 만나기로 했다.
이억관으로서는 무척이나 기대되는 만남이었다.
‘맨체스터 차이나타운에서 뭉그적거리고 있었으면 이런 만남은 상상도 못했을 텐데……. 준영이 그 친구 덕을 톡톡히 보는군.’
억관은 두 분을 만나게 되면 준영에 대해서도 꼭 이야기를 하리라 다짐했다.
***
맨유와 랭스의 친선 경기는 2 대 0으로 끝났다.
후반전 교체로 출전한 신예 알버트 퀵솔이 박스 외곽에서 과감한 슛으로 추가 골을 기록한 것.
이후 파리로 이동한 맨유 선수단은 RC 파리와 경기를 가졌다.
준영은 RC 파리라는 팀에 대해서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듣도 보도 못한 팀인데……. 파리를 대표하는 팀이면 파리 생제르맹 FC 아닌가?’
이때는 2부 리그에 있는 걸까, 아니면 아직 창단을 하지 않은 걸까.
‘아무튼 그다지 강팀은 아닌 것 같군.’
준영은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경기장에서 벌어진 맨유와 RC 파리의 친선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버스비 감독이 이번 경기는 신참과 비주전 선수들을 출전시켰기 때문.
맨유는 전반에 알버트 퀵솔과 존 레논의 골로 일찌감치 앞서 나갔다.
하지만 후반에 심기일전한 RC 파리는 프랑스 국가대표 로제르 마르슈를 중심으로 대반격을 펼쳤다.
그들은 종료 직전에 연달아 골을 터트렸고, 결국 경기는 2 대 2 무승부로 끝났다.
“파리 녀석들, 꽤 근성이 있던데?”
“6만 관중 앞에서 지고 싶지 않았겠죠.”
“그것도 있겠지만, 그 경기장이 프랑스 스포츠 성지래. 우리로 치면 웸블리 같은 곳이라고.”
RC 파리와 경기를 마친 다음 날.
맨유 선수들은 끼리끼리 뭉쳐 파리 관광에 나섰다.
준영도 동료들과 함께 센강 유람선도 타고, 에펠탑도 구경했다.
‘에펠탑은 21세기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구만.’
준영은 챙겨 갔던 8밀리미터 무비 카메라로 철탑을 구경하는 동료들의 모습을 찍었다.
알렉스 퍼거슨과 존 레논이 그런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주장, 멋지게 찍어 줘요!”
“멍청한 녀석들, 요청만 할 게 아니라 멋지게 폼을 잡아야지.”
애송이들에게 쏘아붙인 숀 코너리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마치 연인과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듯한 그 모습은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와, 역시 진짜 배우는 달라!”
“이 정도는 기본이지.”
으쓱해하던 숀은 필름을 바꿔 끼우는 준영에게 말을 건넸다.
“요즘 계속 카메라를 끼고 사는군. 나중에 영화감독이라도 하려고?”
“취미 겸 활용인 거죠.”
준영은 어제 RC 파리와의 친선전도 촬영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 랭스전이나 훈련을 할 때도 코칭스태프나 경호원 로베르트에게 카메라를 맡겨 찍게 했다.
“기록을 남길 의도치고는 좀 사치스럽군.”
“그런 거 말고도 분석을 위한 목적도 있죠. 나중에 맨체스터에 돌아가면 영사기로 돌려 보면서 복습할 겁니다.”
“아하, 전지훈련 동안 뭘 잘했고, 뭘 개선해야 하는지 지적할 용도로구만.”
“그렇게 하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니까요.”
버스비 감독도 이 같은 영상 분석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머피 코치는 아예 상대 팀 정탐에도 적극 활용하자고 주장할 정도.
“기왕 활용할 거면 8밀리미터보다 16밀리미터가 좋다고 생각해. 휴대성에서 큰 차이가 없는 데다, 후자가 화질이 더 좋거든.”
“하긴, 누가 누군지 알아보려면 화질이 좋은 편이 낫겠죠.”
준영과 동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를 구경한 다음, 2층에 있는 레스토랑 쥘베른을 찾아갔다.
여기저기 둘러보느라 출출한 데다, 꽤 명소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21세기 미슐랭 가이드에 나올 정도로 맛집이지.’
준영 일행은 미리 예약한 자리에 둘러앉았다.
“로베르트 씨도 앉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어서요. 배를 든든히 채워야 경호도 잘할 게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를.”
옅은 미소를 지은 로베르트도 자리에 앉았다.
곧 종업원이 와서 음료와 식전 빵을 놓고 갔다.
그리고 주문한 코스 요리들이 차례대로 나왔다.
“주장, 이 젤리 위에 있는 노란 건 뭐죠? 치즈 같은 건가?”
“푸아그라. 거위의 간이야.”
“아, 이게 푸아그라구나!”
“비싼 거니까 충분히 음미하면서 먹어.”
애피타이저를 먹고, 메인 요리로 흰살생선구이를 맛보고 있을 즈음.
아리따운 여성과 함께 막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 청년이 준영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 이게 누군가? 무슈 리 아닌가.”
“앙리잖아. 오랜만이군.”
앙리 드 보그.
보그 백작의 장남이자 터너 신부와 배다른 형제인 사람.
그리고 틈만 나면 리즈에게 찝쩍대는 성가신 녀석이다.
“이런 데서 볼 줄은 몰랐군. 그래, 리즈는 잘 지내고 있나?”
“그래, 대입 시험도 마쳤고, 얼마 전에 졸업식도 치렀어.”
준영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리즈의 생일에도 찾아오지 않았으면서 뭐 하러 묻나 싶었기에.
‘그러고 보니 프랑스에 갔다가 웬 여자에게 홀딱 빠졌다고 그랬던가.’
지난달 스톡홀름에서 열린 우승 축하 파티에서 만났던 보그 백작에게 그리 들었다.
BB라는 여자에게 완전 코가 꿰여서 정신 못 차리고 있다고.
그 말을 하던 백작이 길게 한숨을 쉬었던 것이 생각났다.
‘이 여자가 문제의 BB인가.’
준영은 앙리와 팔짱을 끼고 있는 여성에게 눈을 돌렸다.
인형 같은 외모에 굴곡진 몸매의 금발 미녀.
처음 만나는데도 어째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사해, BB.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주장 존 Y. 리야.”
앙리의 소개에 잠시 준영을 흘겨보던 BB는 마지못한 듯 인사를 건넸다.
“브리지트 안마리 바르도예요.”
“뭐라고!”
경악의 외침은 뒤에서 지켜보던 팀원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미녀다 싶어서 수군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브리지트 바르도라니!
“프랑스의 유명 배우잖아!”
“우와, 어째 눈에 익다 싶더니만!”
야한 잡지에 곧잘 나오던 요염한 미녀.
실물을 보고 다들 헬렐레하는 반응을 보였다.
평소 무뚝뚝하고 냉정한 경호원 로베르트조차도 볼이 발그레해졌을 정도.
그런 그들과 달리 준영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브리지트가 마치 벌레 보듯이 자신을 흘겨본 것도 있지만…….
‘개빠 할망구잖아!’
21세기에서 들었던 악명 때문에 호감은 깨알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
1. 임시 정부 구미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김현철 장관은 50년대에 농림부와 부흥부, 재무부 장관을 두루 지냈습니다.
이후 주미 대사를 지내시기도 했고, 한독당 당무위원, 국정자문위원, 현대그룹 고문 등으로 활동하시기도 했죠.
2. RC 파리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래된 팀입니다.
1970년대 파리 생제르맹 FC가 창단된 후에도 파리의 메이저 구단으로 잘나갔었는데 80년대에 대폭망하는 바람에 그만……;;;
현재는 프랑스 5부 리그인 샹피오나 나시오날3에 있습니다.
RC 파리의 홈구장 올랭피크 이브 뒤 마누아르 경기장은 1924년 파리 올림픽과 1934년 프랑스 월드컵 경기가 치러진 곳입니다.
RC 파리는 1985년까지 이 경기장을 쓰다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부채가 너무 심하다 보니 100년 가까이 쓰던 홈구장에서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