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85. 험한 길을 가는 자
이준영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은 금세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다음 날 신문을 본 맨체스터 시민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격분하고 나섰다.
“아니, 어떤 놈들이 우리 팀 주장에게 해코지를 하려 든 거야?”
“경찰은 뭘 한 거지? 이런 갱단 하나 잡지 못하고!”
맨체스터뿐만 아니라 영국 곳곳에서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소 보수적인 계층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왕 폐하께 훈장을 받은 수훈자를 습격해? 이런 불경한 놈들이 있나!”
“나라에 먹칠을 하다니!”
“당장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아직 월드컵 우승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황.
그렇다 보니 일부 극우층을 제외하고 다들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사건의 주범, 와일드 테리어는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스, 다친 녀석들이 입원한 병원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쳤답니다.”
“얼른 맨체스터를 뜨는 게 좋지 않을까요?”
“리버풀에 있는 화이트 디펜스 당원이 아일랜드 밀입국 배편을 알아봐 준댔어요.”
지인의 집에 피신해 있던 와일드 테리어의 리더 더그는 부하들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젠장, 성공할 줄 알았는데!’
노란 원숭이가 탄 차의 차창을 날려 버렸을 때만 해도 성공한 줄 알았다.
배트에 후려 맞고 정신 못 차리는 녀석을 끌어내 흠씬 패 주고 벌거벗겨 길거리에 나뒹굴게 할 생각이었다.
사실 그것도 약과라고 여겼다.
미국에서는 감히 백인들의 사회에 끼어들고, 백인 여자를 탐하는 흑인들이 목이 매달리거나 산 채로 불태워진다고 들었으니까.
그런데 제대로 손을 대기도 전에 원숭이 놈이 미쳐 날뛰었다.
더그도 어제 하마터면 놈의 차에 치일 뻔했다.
정말 수치스러웠다.
원숭이 하나를 잡으려고 떼로 몰려갔다가, 손봐 주기는커녕 도망치고 말았으니!
“더그 있나?”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집주인인 프레스턴이 들어왔다.
“경찰이 이 근방을 뒤지고 있어. 얼른 빠져나가는 게 좋을 거야.”
“고맙습니다, 어르신.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됐어. 다신 이런 멍청한 짓 하지 마. 너희 아버지랑 아는 사이만 아니었으면 벌써 신고를 했을 거다.”
멍청한 짓이라는 말에 더그는 발끈했다.
그는 잔뜩 성난 표정으로 프레스턴을 노려보았다.
“뭐가 멍청했다는 거죠? 원숭이 한 마리 제대로 손봐 주지 못한 것 때문이라면 수긍하겠습니다만…….”
“아니, 너희들 행동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다.”
프레스턴의 말에 더그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뭐라고요? 어르신도 상하이에서 전 재산을 잃고 돌아오셨잖아요! 검둥이와 쿨리가 일자리를 다 빼앗아 간다고 화를 내셨던 분이 왜……?”
“더그야, 넌 표적을 잘못 잡았어.”
프레스턴은 덤덤하고 냉정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네 말대로 외국에서 굴러들어온 부랑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많아. 하지만 존 Y. 리는 달라. 그놈은 오히려 일자리를 만들어 줬다고.”
프레스턴의 이웃 중에도 미스터리 푸드에 취업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일이 많긴 해도 급료나 대우는 나쁘지 않다고.
“앞집에 고든 알지? 그 녀석이 다니는 기술학교에 장학금을 주고 있는 게 존 Y. 리다.”
“젠장, 겨우 그것 가지고 눈감아 줘야 한다고요?”
“한 가족의 생계가 걸렸고, 한 사람의 미래가 걸렸어. 그걸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겠구나.”
“저도 더는 어르신과 말 섞지 않을 겁니다. 다신 찾아오지도 않을 거고!”
더그는 곧장 프레스턴의 집을 떠났다.
정말 사람이 저렇게 변할 줄 몰랐다.
겨우 금전 몇 푼 때문에 원숭이를 묵인하자니!
쿨리와 검둥이들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이유를 알 만했다.
프레스턴 같은 자들이 있으니 이 지경인 게 아니겠는가.
‘지금은 잠시 물러난다만,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유니언 잭에서 누렇고 검은 얼룩들이 사라질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울 거라고!’
잔뜩 삐뚤어진 길을 위태롭게 걸어가는 더그의 눈빛이 벌겋게 타올랐다.
***
하늘은 맑고 기온은 따스했다.
프랑스 마른 주의 도시 랭스.
도시 중심에서 남서쪽, 베슬 강가에 있는 오귀스트 드로네 경기장으로 관중들이 모여들었다.
9월 시즌 개막까지는 아직 멀었지만, 오늘 이곳에선 특별한 경기가 열리기 때문이다.
바로 스타드 드 랭스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친선전이었다.
이 지역 연고팀이 1957-58 유러피언 컵 우승팀과 맞붙는다고 하니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경기에서 누가 이길까?”
“당연히 우리 Les rouges et Blancs(* 빨강하양, 랭스 팀의 별명)지!”
“하지만 상대는 저승사자 군단도 잡은 유럽 챔피언인데?”
“랭스도 강해!”
랭스는 유러피언 컵 첫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둔 바 있었고, 현재 프랑스 국가대표 주전 선수들이 상당수 뛰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레몽 코파 역시 랭스 출신일 정도로 명문 구단이었다.
“힘내, 퐁텐!”
“로스비프 놈들한테 지지 마!”
경기가 시작되자 랭스의 홈팬들은 열띤 응원을 펼쳤다.
쥐스트 퐁텐, 로제르 피아토니를 앞세운 랭스는 초반부터 맹공을 퍼부었다.
앞을 막는 맨유 하프백 로니 코프를 제쳐 낸 퐁텐은 수비진 가운데 박혀 있는 장신 선수에게 주목했다.
‘존 Y. 리, 브라질의 흑진주를 막아 낸 실력을 한번 보자고.’
레 블뢰를 격침시킨 펠레를 봉쇄한 맨체스터의 거인.
하지만 퐁텐은 준영과 일대일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에게 눈길을 주는 사이, 던컨이 날름 인터셉트를 해 갔기 때문.
“하하핫, 한눈팔면 안 되지, 형씨.”
‘아, 저놈을 잊고 있었군!’
버스비의 아이들을 대표하는 천재 플레이어 던컨 에드워즈.
그는 거침없이 필드를 내달렸다.
마치 고삐가 풀린 야생마 같은 모습.
랭스 선수들의 마크를 따돌리며 시원하게 측면을 내달린 그는 랭스 문전으로 공을 올렸다.
날카롭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 크로스는 딱 맞춰 쇄도한 데니스 바이올렛의 헤딩슛으로 이어졌다.
골키퍼 도미니크 콜로나가 몸을 날렸지만, 공은 그대로 골라인을 넘어가 버렸다.
“골인!”
“나이스 어시스트에 나이스 골이야!”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득점에 랭스 팬들도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렸다.
제일 기뻐한 건 맷 버스비와 감독이었다.
골이 터지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활짝 웃음을 지으며 아낌없이 박수를 쳤다.
“허허, 봤나, 짐? 던컨은 여전하군그래.”
“대단한 놈이에요. 몇 달 동안 경기를 못 뛰었는데도 저 정도라니!”
그동안 팀의 자체 연습 경기를 제외하고 공식 경기는 오늘이 처음.
그럼에도 던컨은 예전과 다름없는 빼어난 실력을 보여 주었다.
본인은 뭔가 만족스럽지 못한 기색이었지만.
“쩝, 근육량이 늘어서 그런가? 달릴 때 예전보다 몸이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너무 안달하지 마, 던. 아직 개막까지 시간이 있어. 전지훈련 동안 차차 맞춰 가면 돼.”
맨유의 7월 전지훈련은 프랑스에서 시작했다.
원래는 비용 문제 때문에 하드먼 회장과 이사진들은 가까운 스코틀랜드에서 하려고 했다.
그런데 맷 버스비 감독이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 팀은 이번에 유럽 챔피언에 올랐지 않습니까? 챔피언과 겨뤄 보고 싶어 할 팀들이 많을 거라고 봅니다만?’
그래서 먼저 랭스 쪽에 연락해서 친선전을 제의해 보았다.
랭스는 냉큼 그 제안에 응했고, 이후 파리와 릴 지역 팀들과도 친선전 약속을 잡았다.
교통이나 체류 비용은 상대 팀에서 맡기로 하고, 입장 수익의 일부도 넘겨받는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챔피언과 경기를 하고 싶어 하는 팀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소문이 퍼지자, 프랑스 내 다른 팀들은 물론 이웃한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 팀들에게서도 연락이 온 것.
레알 마드리드는 아예 고액의 대전료까지 따로 지불하겠다며 적극적으로 친선전 요청을 해 왔다.
그 요청을 떠올린 맷 버스비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유러피언 컵 3연패에 실패한 것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지.”
“어쨌거나 이번 전지훈련은 저렴하면서도 호사스럽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네요.”
선수들 입장에서도 만족감이 컸다.
힘든 훈련과 시합 후에는 느긋하게 관광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
다만 맨유 입장에서도 신경 쓸 문제가 있었다.
바로 선수들의 안전 문제.
전지훈련 직전에 이준영이 습격당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외국이라 해도 마찬가지이지. 광적인 축구 팬이야 어디든 있으니까.”
“네, 거기다 인종 차별주의자들도요.”
그래서 맷 버스비와 지미 머피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이번 전지훈련 방문지에서 제외했다.
이탈리아는 전후에도 파시 성향을 가진 이들이 남아 있었고, 스페인은 프랑코 독재 정권이 여전히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레알 마드리드는 분명히 강한 팀이지. 하지만 축구를 빵과 서커스의 수단으로 써먹고 있는 프랑코의 입김이 닿아 있는 스페인에서 공정한 경기가 될까?”
“힘들겠죠. FIFA나 UEFA에서 주관하는 경기가 아닐 테니까요.”
돈에 혹해서 이용만 당하고, 위신만 구기느니 안 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레알 마드리드와 붙을 기회는 앞으로 또 있을 테니까.
“아 참, 존은 따로 경호원들을 구했다던가?”
“네, 로베르트라고, 이번 전지훈련에도 따라왔습니다.”
그러면서 머피 코치는 한쪽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준영의 경호원을 힐끔 쳐다보았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는데, 체격도 크고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위압감이 굉장했다.
“척 봐도 강해 보이는구먼. 전직 군인인가?”
“듣자 하니 자유 폴란드군 공수부대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자유 폴란드군 출신이라…….”
자유 폴란드군은 전쟁 때 연합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고도 전후에 배신당하고 짐짝 취급을 받았다.
공산화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망명지에서 삶을 이어 가고 있는 그들 역시 이방인으로 차별받고 있었다.
로베르트 역시 그런 배신과 차별을 맛봤을 터.
그런 그의 입장에서는 준영이 남처럼 여겨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존이 그러는데, 앞으로 2∼3명은 더 구할 생각이래요.”
구단에서도 경찰과 용역 업체와 협력하여 경기장 보안에 더욱 신경을 쓸 계획이라고.
머피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맷 버스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신문을 보니 미국의 야구 선수가 이런 말을 했더군. 사람을 미워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피부색이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맞는 말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죠.”
“그런 현실은 바뀌어야겠지.”
버스비는 랭스의 코너킥 상황에서 냉큼 공을 끊어 내며 앞으로 나가는 준영을 보았다.
랭스 선수들의 거친 마크에도 불구하고 그는 침착하게 공을 치며 전진해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버스비는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바뀔 수 있어.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바뀌어 가겠지.”
존이라면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고난도, 불가능하다는 목표도 이루어 냈으니 지금의 험한 길도 분명히 헤쳐 나올 것이다.
***
‘사람을 미워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피부색이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저 사진의 오른쪽 인물, 다저스의 레전드인 피 위 리즈가 한 말입니다.
종목을 떠나서 참 레전드다운 발언이라고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