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83. 훈장과 반지
런던에서의 일정을 마친 준영은 모즐리의 프레드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서 오게, 존.”
“정말 큰일을 했어요, 주장!”
한 달 만에 돌아온 준영을 저택 식구들뿐만 아니라 찰스 신부나 린든 사장 등 이웃 사람들과 팀원인 알렉스 퍼거슨도 찾아와 반겨 주었다.
덕분에 저택이 한바탕 떠들썩했다.
“자, 우리 마을에서 탄생한 월드컵 영웅을 위해 건배합시다!”
“건배!”
사람들은 시원한 맥주와 준영이 전수한 백 씨 버전 치킨을 맛보며 축하 만찬을 즐겼다.
“주장, 여왕 폐하를 또 알현했다면서요? 신문을 보니 훈장을 받았다던데요?”
알렉스가 훈장 얘기를 들먹이자, 준영은 대표팀 선수들과 함께 버킹엄 궁에 갔을 때의 일을 늘어놓았다.
“에든버러 공작께서 말씀하시길, 대영제국 훈장은 일단 절차가 필요하기에 의회의 승인을 받으면 연말에나 수여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
“어? 그럼 아직 받지 못한 건가? 신문이 오보를 낸 거예요?”
“아니. 그 대신에 여왕 폐하께서 로열 빅토리아 훈장을 주셨어. 나라에 공을 세우고 국민들을 기쁘게 한 이들에 대한 포상을 늦춰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오오오!”
준영이 품에서 내놓은 훈장을 보고 다들 탄성을 내뱉었다.
이 로열 빅토리아 훈장은 의회의 승인 없이 국왕의 독단으로 줄 수 있다고 한다.
보통은 왕의 곁에서 오래 봉사한 시종이나 근위병들에게 내려지는데, 이번에 특별히 대표팀에 수여되었다고.
“그럼 전부 다 받은 건가?”
“예, 근데 이것도 등급이 있더라고요.”
일반 선수들은 6등급(RVM) 메달을 받았다.
그리고 출전해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이들과 코치들은 각기 4등급(LVO)과 5등급(MVO) 훈장이 주어졌다.
감독인 월터 윈터보텀은 3등급(CVO) 훈장이 수여되었다고.
“오빠야는 그럼 몇 등급이야?”
“4등급이야.”
카린의 물음에 준영은 손가락 4개를 펼쳐 보였다.
선수로 4등급 훈장을 받은 이는 준영을 포함해 빌리 라이트, 톰 피니, 바비 찰튼 4명뿐이었다.
“로열 빅토리아 훈장이 수여되었으면 빅토리아 기사단의 일원이 된다고 하던데……. 그럼 존도 Sir라는 칭호가 붙는 거야?”
엔지의 말에 알버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Sir 칭호가 붙는 건 1등급과 2등급까지이지. Knight Bachelor로 따로 임명되면 가능하다만, 쉽게 내려지는 작위는 아니란다.”
“기사단 소속인데 기사가 아니라니 이상해.”
카린이 불만스럽게 뺨을 부풀렸다.
같이 이야기를 들은 알렉스나 이웃 사람들의 반응도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준영은 그리 아쉬워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작위란 게 그리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난 따로 특별한 선물도 받았는걸.”
“특별한 선물?”
“영국 본토 시민권.”
문서상 준영은 홍콩 시민권자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것으로도 선수로 활동하기에 문제는 없지만, 사업을 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는 본토 시민권자인 편이 훨씬 유리했다.
“아무튼 훈장까지 받았으니, 더 이상 한낱 축구 선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죠. 안 그렇습니까?”
준영의 물음에 알버트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일전에 한낱 축구 선수에게 손녀를 못 준다고 했던 말을 꽤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
어쨌거나 여왕 폐하께 훈장까지 받았는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범한 건 인정해야겠구만.”
“감사합니다.”
반색을 한 준영은 리즈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할아버지의 반응을 살피고 있던 그녀도 활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인정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안 돼. 내 손녀는 못 보내.”
“할아버지!”
알버트는 끈덕지게 고집을 부렸다.
준영은 딱히 그 고집을 꺾을 생각은 없었다.
리즈를 끝까지 못 보낸다고 하면 자신이 존 Y. 리 프레드로가 되면 될 테니까.
***
사흘 후, 준영은 리즈와 함께 근방의 피크 디스트릿 국립공원 방면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알파 로메오도 꽤 괜찮은 차로군.”
“그러게요. 둘이 타고 다니기에 딱 좋아요.”
“말디니에게 감사 편지라도 보내야겠어.”
준영이 스웨덴에 있을 무렵, 체사레 말디니의 알파 로메오 줄리에타 스파이더가 배송되었다.
사나이답게, 레전드답게 약속을 지켰던 것.
덕분에 오늘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었다.
“여긴 드라이브 코스로도 괜찮지만, 하이킹하기에도 딱 좋아 보이는데?”
“맞아요. 그러니까 천천히 둘러보면서 가요.”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두 사람은 느긋하게 산책을 즐겼다.
완만한 능선을 가진 산과 언덕을 보다 보면 그 사이에 자리한 협곡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들, 드넓은 목초지와 숲을 끼고 있는 농가와 고즈넉한 저택들은 정말 동화책 속의 풍경 그대로였다.
“거참, 그동안 이런 좋은 경치를 못 보고 지냈다니…….”
준영은 스웨덴에서 샀던 8밀리미터 시네마 카메라로 주변 풍경과 리즈의 모습을 담았다.
카메라 앞에서 영화배우처럼 포즈를 취해 보던 리즈가 물음을 건넸다.
“그거 꽤 마음에 드나 봐요?”
“응. 다루기는 스마트폰 쪽이 훨씬 편하지만, 이쪽도 특유의 레트로한 감성이 멋지더라고.”
그렇게 촬영을 하며 걸어가던 중에 두 사람 앞으로 작은 동굴이 하나 나타났다.
나무 지지대나 땅 바닥에 레일 같은 게 깔린 걸 봐서는 자연 동굴은 아니고 무슨 갱도 같아 보였다.
“광산이 있었던 건가?”
“옛날에 여기서 구리를 캤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 크기가 너무 좁은 거 아냐? 톨킨 교수님 소설에 나오는 드워프들의 광산 같군.”
“소규모 광산은 기어들어가야 하는 좁은 곳들도 많았다니까요.”
가만히 폐광을 지켜보던 준영은 은근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보물 같은 게 숨겨져 있지 않을까?”
“네? 에이, 금광도 아닌데 보물이 있겠어요?”
“혹시 모르지. 누가 몰래 보물을 꽁꽁 숨겨 뒀을지?”
히죽 웃음을 지은 준영은 몸을 숙여 폐광 안으로 들어갔다.
“위험해요. 잘못하면 무너질지 모른다고요.”
“어? 여기 뭐가 있는걸.”
진짜 뭔가 발견하기라도 한 걸까.
걱정스러워하던 리즈는 준영이 폐광에서 뒷걸음질 치며 나오자,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런 그녀에게 준영은 주먹에 쥐고 있던 물건을 보여 주었다.
“어머, 이건 반지……?”
“마음에 들어?”
장미처럼 빨간 루비가 박힌 반지.
섬세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루비 반지를 가만히 살펴보던 리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에 들긴 한데, 이런 게 폐광에 떨어져 있었다고요?”
“그럴 리가 있나. 선물을 꺼내려고 쇼를 좀 했던 거지.”
“네? 선물이요?”
“오늘 리즈 생일이잖아.”
준영은 이 반지를 지난번에 유러피언 컵 일정으로 밀라노에 갔을 때 사 두었다.
체사레 말디니와 내기를 하고 헤어진 후에 돌아다니다 부첼라티(Buccellati) 매장을 보았던 것.
21세기에도 손꼽히는 보석 브랜드라 망설이지 않고 들어가 딱 좋은 것을 구입할 수 있었다.
“선물은 아침에 꽃다발과 향수를 받았는데, 이런 걸 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한 골 넣었으면 추가 골도 넣고 싶은 게 축구 선수의 마음이라고.”
“이 정도면 결승 골이네요.”
준영은 생긋 미소를 짓는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워 준 후, 그 손에 정중히 입을 맞췄다.
“사랑하는 여왕님,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합니다.”
“고마워요, 기사님. 맡겨 놓은 마음 계속 잘 보관할게요.”
서로의 마음을 나눠 가진 연인.
하늘 높이 뜬 태양은 축복하듯이 그들에게 따스한 햇살을 내려보냈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훈련장.
충격과 절망, 재기와 영광을 두루두루 경험했던 1957-1958 시즌을 뒤로하고, 선수들은 다음 시즌을 위해 다시 구슬땀을 흘렸다.
“저것 봐. 해리 그렉이다.”
“존 Y. 리도 있어.”
“바비 찰튼에 콜린 웹스터까지……. 월드컵 플레이어들이 다 모였군.”
새로 팀에 영입된 선수들은 연방 신기한 표정으로 팀의 핵심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방송과 언론에 나온 월드 클래스 선수들, 특히 우승을 견인한 챔피언들은 정말 남달라 보였다.
“리틀 존은 진짜 거인 같아.”
“바비 찰튼은 어떻고? 무슨 후광 같은 게 느껴진다고.”
이렇게 쑥덕이던 신참들에게 머피 코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들, 훈련에 집중 안 하냐? 훈련장 뺑뺑이 좀 돌아 볼래?”
“죄, 죄송합니다.”
“아니지, 마냥 뛰게 하는 게 좋은 게 아니랬지. 리틀 존이 가르쳐 준 코어 훈련을 빡세게 해야겠어.”
웨일스 대표팀을 8강에 올려놓은 지미 머피.
그의 놀라운 지도력에 영국은 물론, 유럽과 브라질에서 감독으로 모시겠다는 팀들이 즐비하게 나왔다.
하지만 머피는 이런 오퍼를 거절하고 맨유에 남았다.
맷 버스비 감독을 보좌하는 게 제일 맘이 편하기 때문이라고.
“아아악, 뭐야, 이 훈련!”
“뱃가죽이 찢어질 것 같아!”
난생처음 코어 운동을 제대로 하게 된 신참들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머피 코치는 매의 눈으로 그들을 감시하며 제대로 훈련을 시켰다.
“어때, 존? 신참들 중에 쓸 만한 녀석들이 있는 것 같아?”
수비수 빌 포크스의 물음에 준영은 막 플랭크를 하면서 부들부들 떠는 젊은 공격수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 이름이 알버트 퀵솔이었던가요?”
“맞아. 셰필드 웬즈데이에서 뛰었지. 지난 시즌 FA컵에서도 우리랑 경기할 때 나왔어.”
빌의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히 생각났다.
상당히 날렵한 움직임과 정교한 패스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거의 홀로 셰필드 웬즈데이를 이끌고 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
“시즌 끝나고 제일 먼저 영입된 녀석이야.”
“감독님이 꽤 눈여겨보고 있었나 보군요.”
지금도 맷 버스비는 영입할 인재가 없나 살피는 중이었다.
이번 시즌도 리그와 유러피언 컵을 동시에 소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원래는 팀도, 협회도 유러피언 컵 출전을 반대했었는데 말이지.’
실제 역사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58-1959 시즌 유러피언 컵 출전을 중도에 포기했다.
협회가 반대하는 데다, 팀의 재정도 좋지 않고, 뮌헨 참사로 인한 트라우마가 심했으므로.
덕분에 예선에서 맨유를 만난 스위스의 BSC 영 보이스만 득을 봤다.
영 보이스는 이후 승승장구하며 4강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역사가 바뀌었으니 그리는 안 될 거다. 크크크.’
준영이 올 시즌 유러피언 컵에 대한 야망을 불태우고 있을 때, 빌은 뭔가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물음을 건넸다.
“아 참, 한국에서 널 찾아온 축구 선수가 있다면서?”
“예, 맞아요. 누구에게 들었어요?”
“퍼기 녀석이 이야기하던데. 그놈 너랑 같은 동네에 살잖아.”
“그랬군요. 퍼기도 윤옥이를 봤던가?”
“그 한국 녀석, 실력이 어때? 잘하나?”
“아마추어 수준입니다. 아직 한참 배워야 해요.”
조윤옥은 지금 부모님의 허락을 받으러 한국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스웨덴 월드컵 결승전까지 보고 갔는데, 뭔가 꽤 충격을 받은 기색이었다.
‘무리도 아니지. 자기랑 비슷한 또래에 넘사벽급 실력을 가진 괴물을 봤을 테니.’
펠레는 지금 생각해도 괴수 그 자체.
아직 체격적으로 덜 여물었고, 경험이 부족한 구석이 있었기에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4년 후라면?
그땐 진짜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정도의 역대급 재능을 가진 선수는 없으니까.
‘아니, 있어. 그것도 여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펠레와 동등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는 천재가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
위의 사진에 나온 게 로열 빅토리아 훈장입니다.
본문에도 언급했지만, 보통 왕실에 봉사한 사람들이나 외국에서 방문한 귀빈들이나 받는 거지요.
한국인으로서는 주영 대한민국 대사와 주아세안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를 지낸 임성남 대사가 2013년에 받은 적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