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82화 (182/400)

Round 182. 최고의 명사

개선식에 참가한 준영은 이후 사흘 동안 런던에 머물렀다.

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여왕과 에든버러 공작의 초대를 받아 왕궁을 방문하기도 하고, 우승 축하 파티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TV와 라디오 방송에도 나가고 언론과 인터뷰도 가졌다.

“리 선수, 유명 대학 축구부에서 일일 지도를 요청하는 초청장이 왔습니다.”

축구협회 직원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일 지도라……. 어려울 건 없지만, 제가 알기론 대학 쪽 사람들은 프로 선수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는다던데요?”

풋볼 리그가 출범하기 전에는 학생과 같은 아마추어 선수들이 축구계를 선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프로 축구가 출범했을 때만 해도, 상업화된다는 데 강한 비판이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상당히 오래 남았다.

그래서 프로팀에 소속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올림픽 출전이 금지되는 일도 있었다.

실제로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축구에서도 영국과 독일은 대부분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물론 말씀하신 대로 돈을 받고 경기에 뛰는 것을 스포츠에 대한 모독이라 여기는 이들이 여전히 많죠.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리 말한 직원은 간청하듯이 준영에게 말했다.

“협회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꼭 참석해 주십시오.”

‘협회가 예전에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확 때려치우고 싶다만.’

속내는 그렇지만, 그렇다고 딱 잘라 거부해서도 안 된다.

협회와 등지면 여러모로 피곤해지니까.

그나마 월드컵 우승을 한 덕분에 루스 총무가 잠잠한데, 이쪽에서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근데 어느 대학이죠?”

“옥스퍼드입니다.”

“헐… 유명 대학이라더니, 진짜 유명한 곳이네.”

이건 거절할 수 없다.

후견인이나 마찬가지인 알버트 존 프레드로 남작의 모교가 옥스퍼드였으니까.

거기다 현재 사업과 관련해서 법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있는 변호사 마거릿 대처 역시 옥스퍼드 출신.

이들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초청에 응하는 게 맞았다.

“알겠습니다. 대신 협회에서 권하는 일정들은 이번 주까지만 소화할게요.”

“다른 일들이 있습니까?”

“네, 개인적인 일들이 좀 많습니다.”

다음 주에 리즈의 생일과 고교 졸업식이 있다.

거기다 월드컵 기간 동안 맡겨 놨던 회사 업무도 어찌 되어 가는지 살펴야 하고.

그게 끝나면 다음 시즌 준비를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 훈련에도 참여해야 한다.

“예, 리 선수는 성실하게 협회 일정을 소화해 주셨으니, 그렇게 조치해 드리죠.”

“고맙습니다.”

다음 날, 준영은 차를 타고 옥스퍼드로 떠났다.

그곳에서 뜻밖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한 채.

***

“어서 오게, 리 선수. 난 옥스퍼드 유니버시티 AFC의 코치인 길버트 베인이라고 하네.”

준영은 자신을 마중 나온 중년의 지도자와 악수를 나눴다.

“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야말로 영광이지. 월드컵 올스타와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대회가 끝나고, 각국의 취재원들은 의견을 규합해 스웨덴 월드컵 올스타를 선정했다.

골키퍼에는 북아일랜드 출신이자 준영과 같은 맨유 소속인 해리 그렉이 뽑혔다.

수비수에는 준영과 빌리 라이트, 브라질의 니우통 산투스가 선정되었다.

하프백에는 잉글랜드의 바비 찰튼과 브라질의 디디.

그리고 공격수에는 펠레와 가린샤, 프랑스의 쥐스트 퐁텐, 레몽 코파, 스웨덴의 군나르 그렌이 뽑혔다.

“선수들은 어디 있습니까?”

“필드에. 안내할 테니 따라오라고.”

잠시 후, 준영은 대학 구내 축구장에서 짙은 청색 유니폼을 입은 옥스퍼드 유니버시티 AFC 선수들과 대면했다.

“안녕하세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존 Y. 리입니다.”

“반갑습니다, 리 선수.”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선수들도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던지, 준영과 악수를 나누며 꽤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예상보다 학생들은 호의적이었고, 훈련에 있어서도 준영의 지도를 잘 따랐다.

그럴 만했던 게 그가 여느 프로 선수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사고로 붕괴된 팀을 홀로 이끌어 갔다던가?’

‘레알 마드리드의 오퍼를 거절했다지? 돈과 명예 앞에서 의리를 지키기란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저 사람 같은 동양인이면 과연 리그 정상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학생들이 보기에 준영은 차별이라는 험한 난관을 헤쳐 온 굳센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받아 준 팀과 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도리를 다한 고상한 인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성공한 사업가로 가난한 이웃과 학생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성품을 가졌다.

이런 사람에게 잠시나마 한 수 배울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영광일 것이다.

‘아마추어답게 서투른 구석이 많긴 하지만, 의욕은 대단한걸. 다들 매너도 좋고.’

인종 차별적인 언행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없는 게 당연했다.

보통 능력이 없거나 열등감이 심한 이들이 자신의 우월감을 채우기 위해 차별적인 언행을 일삼곤 했으니까.

옥스퍼드 대학생쯤 되면 능력도 있고, 배운 것도 많고, 집안도 부유한 이들이다.

이렇게 여유가 있고, 사고방식도 구세대보다 한결 개방적이니 포용력이 넓은 건 당연했다.

“리 선수, 축구에서 중요한 게 뭘까요? 전술? 아니면 테크닉?”

“선수 입장에서 보자면 체력이죠.”

“체력이요?”

“체력이 강해야 뭐든 할 수 있거든요. 좋은 플레이를 하고 싶어도 체력이 약하면 못하죠. 자기 기량을 과감하게 펼칠 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정신력은요? 우리 코치님은 불굴의 의지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하시던데.”

“체력이 강해지면 정신력도 자연히 강해져요. 강한 상대와의 경합에서 밀리지 않으면, 그만큼 자신감도 생기고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법이죠.”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존 로크의 말과 같은 거군요.”

“맞아요. 원래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도인데, 겉치레가 아니라 진짜 제대로 단련을 하면 정신력이 연마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준영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만큼 지도해 주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가르침 중에는 21세기의 훈련이나 노하우도 섞여 있었다.

그런 선진적인 지식과 정보를 경험한 학생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왜 톱 플레이어인지 알겠어. 단순히 체격만 좋거나 발재간만 뛰어난 게 아니었어.’

‘지난번에 만난 프로 선수는 주먹구구식인데, 이 사람은 굉장히 체계적이군.’

‘자기 관리도 상당히 뛰어난 것 같고…….’

이렇게 소중한 가르침을 받는 사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당연히 학생들의 입장에선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리 선수,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지도를 받을 수 있을까요?”

“네, 지금 같은 비시즌이면 얼마든지.”

다음을 기약하며 준영은 축구부 학생들과 헤어졌다.

하지만 바로 옥스퍼드를 떠날 수 없었다.

소문을 듣고 대학 곳곳에서 학생들이 몰려들었기 때문.

“저 사람이야! 저기 존 Y. 리가 있다고!”

“와! 진짜 왔구나!”

“리 선수! 사인 좀 해 주시죠!”

잉글랜드를 정상에 올려놓은 이방인.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이 유명 인사를 그냥 지나칠 리 만무했다.

그런데 호기심이 많은 건 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교수들, 그중에서 나이 지긋한 이도 학생들 사이를 헤치고 와서는 말을 건넸다.

“자네가 존 Y. 리로군. 알버트에겐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남작님을 아십니까?”

준영의 물음에 이마가 넓은 반백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알지. 내 친구인걸.”

“옥스퍼드에 계신 남작 어르신의 친구분이면…….”

머릿속에서 일전에 알버트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린 준영.

그의 두 눈과 입이 삼위일체로 동그랗게 변했다.

“톨킨 교수님?”

“그래, 내가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일세.”

판타지 문학의 대부, 톨킨.

알버트에게 자신이 미래인이라는 사실을 들통나게 만든 원흉(?)이 눈앞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

준영은 톨킨을 따라 그의 연구실로 왔다.

톨킨이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것들이 있다고 했기 때문.

‘뭐지? 설마 내가 미래인인 걸 남작님께 들었나?’

그럼 어찌 대응해야 할까.

입이 가벼운 사람 같진 않지만, 뭔가 바라는 건 있을 것이다.

가령 미래에서 가져온 실마릴리온이라든가.

그걸 아드님이 정리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뭘 그리 골몰히 생각하는 겐가?”

“그게… 무엇이 궁금하신가 싶어서요.”

손수 홍차를 타서 준영에게 건넨 톨킨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 긴장할 건 없네. 아는 것만 대답해 주면 되니까.”

“그 전에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남작님이 저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를 해 주신 겁니까?”

혹시 미래인이라는 사실을 들었는가?

그래서 물어본 것인데, 톨킨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가문의 내력이 꽤 괜찮다면서? 문자를 만든 왕의 다섯 번째 왕자가 자네 가문의 조상이라던가?”

“예, 족보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인이라는 건 말하지 않은 모양.

내심 안도하는 준영에게 톨킨이 말했다.

“난 언어 쪽으로 관심이 많아. 물론 영문학이나 고대 유럽 언어 전문이네만, 그래도 동아시아에 문자를 만든 왕이 있단 이야기는 흥미롭더군.”

“네,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면 다들 신기하게 여기더군요.”

“그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겠나? 알버트의 이야기를 듣고 동양사 관련 서적을 찾아봤네만, 한국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부족하더군.”

“하아… 그럴 겁니다.”

새삼 이 시대 참혹한 한국의 인지도를 실감한 준영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세종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그 세종이라는 왕이 문자를 만든 건 백성들의 소통을 위해서라는 건가?”

“네, 이게 그렇게 만든 문자입니다. 훈민정음 혹은 한글이라고 하죠.”

준영은 종이에 28자를 적어 대강 어떤 방식으로 발음하는지, 글자를 조합하는지 알려 주었다.

“이런 글자를 정말 그 왕 혼자서 만들었다고? 정말 놀랍구만.”

“그래서 제 고국에선 손꼽히는 위인으로 존경받고 있죠.”

준영은 톨킨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줌으로 개인적인 친분을 다지고자 했다.

톨킨은 이미 이 시대의 유명 인사.

그런 분과 알고 지냈다고 하면 레전드로서 품격이 더 높아지지 않겠는가.

단순한 축구 선수 이상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혹시 알아? 이렇게 친해지면 톨킨 교수 소설에 날 모델로 한 캐릭터가 나올지? 후후후!’

엉뚱한 기대를 품는 준영에게 톨킨이 다시 말을 건넸다.

“상당히 흥미롭군. 혹시 관련 책자를 좀 구할 수 있겠나?”

“한국에 아는 분이 계시니까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한 준영은 톨킨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눈 후 헤어졌다.

그렇게 나오고 나니, 한국에 있을 이억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꾸 귀찮은 일거리를 늘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억관 아저씨라면 군소리 없이 해 주겠지. 나랑 달리 진짜 애국자니까.’

영국의 유명 인사가 한국의 위인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면 두 팔 걷어붙이고 자료를 보내 줄 터였다.

한국을 보다 널리 알릴 좋은 기회라면서 말이다.

‘뭐,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끝날 수 있는 거니까.’

개인적으론 유명 인사와 친분을 두텁게 쌓고, 국가적으론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

이런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

프로 리그가 출범한 후에도 이를 거부하고 아마추어 클럽이나 실업팀으로 남은 팀들이 꽤 있었습니다.

소설에서 한 번 소개된 적이 있는 스코틀랜드의 퀸즈 파크 FC 같은 팀이 대표적이죠.

스코틀랜드 축구협회 창설에도 기여한 이 팀은 아주 오랫동안 아마추어 노선을 유지하다 2020년 들어 비로소 프로로 전환했습니다.

물론 단순히 아마추어리즘을 추구하는 운영 방침 때문이 아니라, 재정적인 문제나 다른 이유 때문에 전환을 하지 않는 팀들도 있습니다.

국내에도 미포조선이나 KB국민은행 같은 실업팀들이 프로로 전환하거나 승격할 기회가 있었는데 포기했죠.

할렐루야의 경우 K리그 원년 우승 팀이지만, 선교에 치중하느라 파행 운영을 하고 리그에서 이탈해서 상당히 안 좋은 선례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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