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80. 로순다의 비극
손웅민의 노트북에 재생되고 있는 다큐멘터리 동영상에 바비 찰튼 경의 모습이 나왔다.
과거 현역 시절을 회고하던 늙은 축구 선수.
그는 자신과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중원 삼총사로 활약한 던컨 에드워즈에 대해 말했다.
「던컨은 정말 뛰어났어요. 창의력도 빼어나고, 뭔가를 배우는 것도 누구보다 빨랐죠. 든든한 동료였지만, 그를 보면 열등감이 느껴지곤 했지요.」
그렇게 토로했던 바비는 뒤이어 이준영에 대해 이야기했다.
「존은 던컨과 비슷하면서도 달랐어요. 진짜 차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남다른 실력을 가졌는데……. 정말이지 경이로운 선수였죠.」
구단 박물관에 걸린 옛 동료의 사진을 보는 바비의 눈가는 진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벅차고 힘들 때, 항상 그를 보고 다시 일어나곤 했어요. 그와 함께 뛰면 어떤 상대라도, 어떤 어려운 경기라도 해낼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죠.」
그러면서 바비는 1958년에 있었던 일들을 언급했다.
나락에 떨어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FA컵과 유러피언 컵에서 일궈 낸 기적 같은 우승들,
그리고 잉글랜드 대표팀에 발탁되어 월드컵에 나간 이야기도.
영상을 보던 손웅민은 스마트폰으로 그와 관련한 기록들을 찾았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월드컵 결승에 올랐다고 했지? 아시아 선수로 월드컵 최다 득점 기록도 갖고 있고…….”
이준영의 이 같은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에 잉글랜드 대표팀 소속이었고, 아시아가 아닌 유럽에서 활동했던 선수였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작 동양인이란 이유로 발롱도르도 못 받았는데 말이야.”
아무튼 신기한 사람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많은 관심과 흥미가 느껴지는 건 그저 그가 레전드 플레이어이기 때문일까?
「그때 정규 시간이 약 8분 정도 남아 있었어요. 리드를 잡았기 때문에 우린 수비에 전념했죠.」
잠시 생각하고 있는 사이, 영상에서는 축구 황제 펠레가 나와서 월드컵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그만큼 못 잊을 경기였다는 거지. 아마 나만 그런 건 아닐 겁니다.」
펠레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마친 후, 오래된 흑백 영상이 나왔다.
바로 1958년 월드컵 결승전 경기, 그 마지막 10분을 찍은 영상이었다.
***
10분도 남지 않은 경기.
가린샤의 역전 골로 리드를 잡은 브라질은 남은 시간 수비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전부 내려와! 끝날 때까지 버텨야 한다!”
페올라 감독이 보이는 사인에 브라질은 최전방 공격수들까지 전원 자신들 진영으로 물러섰다.
“쩝, 이러지 말고 공격을 하는 게 낫지 않아요? 추가 골을 넣으면 잉글랜드도 완전히 주저앉을 것 같은데.”
“크크, 네가 골을 못 넣어서 공격을 하고 싶은 건 아니고?”
바바에게 속내를 들키자, 펠레는 찔끔했다.
프랑스와의 준결승에서처럼 자신의 활약으로 경기를 끝내고 싶었으니까.
“뭐, 기회가 오면 때려 박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지금은 감독님 말씀대로 버티는 게 맞아.”
8년 전에 놓쳐 버린 우승컵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
곰처럼 움츠리는 게 맘에 들지 않더라도 영광을 위해서는 욕심과 자존심을 접을 줄 알아야 한다.
“어차피 이대로 끝나도 넌 주목받게 되어 있어. 예언자로서 말이지.”
경기 전날 펠레는 기자들 앞에서 2 대 1로 브라질이 이길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몇 분 있으면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잉글랜드의 파상 공세를 끝까지 막아 내는 게 중요했다.
“자갈루! 앞으로 나가서 막아!”
“측면에서 크로스를 올리게 두지 마!”
“동양인을 놓치지 마! 분명히 박스로 들어와서 헤딩을 노릴 거다!”
이렇게 브라질 선수들이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2줄 수비로 공간을 빽빽하게 만든 덕분에 잉글랜드 선수들은 제대로 패스와 돌파를 시도하기 힘들었다.
거기다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까지 촉박하니 저도 모르게 성급한 플레이가 나왔다.
“롭슨, 침착하게 해!”
베테랑인 톰 피니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바비 롭슨은 급하게 크로스를 올렸다.
문전으로 들어간 준영의 머리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정작 크로스는 그의 머리에 닿기 힘들 만큼 멀리 지나쳤다.
‘남은 시간은 4분…….’
눈 깜짝할 사이에 남은 정규 시간의 절반이 지나갔다.
터치라인 밖으로 나간 공을 드로잉한 브라질은 공격을 하는 대신, 페널티 박스 우측면에서 같은 편끼리 공을 돌리며 시간을 끌었다.
딱히 약 올릴 의도는 없었지만, 그들의 행동은 잉글랜드 선수들의 부아가 치밀게 만들었다.
“젠장! 시간도 없는데!”
“공을 뺏어! 어떻게든 공격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바비 찰튼과 조니 헤인스, 그리고 준영까지 가세해서 인터셉트를 하려 애썼다.
하지만 개인기와 패스가 뛰어난 브라질 선수들을 상대로 공을 빼앗기란 영 쉽지 않았다.
브라질 선수들 역시 진지하게 공을 돌리고 있었으므로.
‘한 번! 한 번만 걸려라!’
바비 찰튼의 필사적인 인터셉트에 브라질 선수들도 마냥 공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에 수비를 거들던 가린샤는 바비의 몸에 맞춰 공을 터치라인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하지만 그 의도를 바비도 간파하고 몸을 피했다.
그렇게 바비 찰튼을 스치고 지나간 공은 뒤쪽에 있던 준영의 발밑으로 흘러갔다.
‘찬스!’
“저 녀석을 막아!”
화들짝 놀란 브라질 선수들이 곧장 좁혀 들며 마크를 걸었다.
준영은 어깨싸움에서 상대를 밀어내고, 발밑으로 날아드는 태클을 피해 냈다.
그런데 태클을 뛰어넘으면서 몸은 넘어왔지만, 공은 불규칙하게 튀었다.
브라질 수비수 지우마 산투스의 팔에 닿았던 것!
‘핸드볼인데?’
심판이 제대로 못 봤던지 휘슬은 울리지 않았다.
준영도 따로 어필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브라질 골대에 공을 때려 박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는 돌아서서 튀어 오른 공을 발등으로 재차 튕기며 벨리니의 마크를 제쳐 냈다.
그리고 돌아서며 떨어지는 볼을 향해 발리슛!
예상치 못한 동작에서 나온 슈팅에 지우마르 골키퍼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
“슛- 고오오오올!”
“들어갔다! 들어갔다고!”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던 잉글랜드 관중들은 브라질 골대가 세차게 흔들리자 펄쩍 뛰며 모자를 집어 던졌다.
경기가 거의 끝나 갈 무렵에 나온 기가 막힌 동점 골.
잉글랜드 원정 팬들은 물론, 대다수의 스웨덴 관중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이걸 해내다니!”
“정말 엄청난 저력이군!”
“저 15번 녀석, 진짜 괴물 같은 놈이야!”
보란 듯이 포효하는 준영에게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런 환희와 경탄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바로 브라질 선수와 팬들.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진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 그들은 깊은 침묵에 잠기거나, 울분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이런 게 어딨어!”
“가린샤 저놈은 왜 상대방에게 공을 건네준 거냐고!”
“설마 8년 전의 비극이 반복되는 건……?”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마!”
멘붕에 빠진 브라질 팬들과 달리, 선수들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진 않았다.
허탈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경기가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골을 넣고 끝내죠.”
“그래, 아직 한 골 정도 넣을 시간은 남아 있지.”
중앙선으로 공을 가져간 브라질 선수들은 심판의 휘슬이 울리자 곧바로 패스를 돌리며 공격을 전개했다.
이제 가린샤의 표정에서도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절대 8년 전의 비극을 반복할 수 없다고 여긴 그들은 남아 있는 힘을 짜내 잉글랜드 문전으로 몰려갔다.
“마크해! 마크!”
“여기서 골을 주면 안 돼!”
브라질만큼 잉글랜드도 필사적.
그들은 겨우 되살린 승리의 불씨를 꺼트리고 싶지 않았다.
이에 디디의 중거리 슛이 날아들자, 빌리 라이트가 몸을 던지는 육탄 방어를 펼쳤다.
“리바운드 볼은 어디에……?”
“자갈루다! 자갈루를 막아!”
자갈루가 슈팅 자세를 잡자, 도널드 하우와 토미 뱅크스가 동시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자갈루의 슈팅은 페인트.
그는 살짝 공을 띄워 올려 박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공을 향해 달려가는 펠레.
날카롭게 니어 포스트를 노려보았던 그는 곧바로 슈팅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지만 번개같이 달려든 이준영이 태클로 걷어 내 버렸다.
“파울! 페널티킥이라고!”
펠레가 땅을 치며 항의했지만, 심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준영이 태클로 먼저 공을 걷어 냈고, 그 뒤에 펠레가 걸려서 쓰러졌기 때문.
“역습! 빨리 공격해! 빨리!”
재빨리 일어나 걷어 낸 공을 잡아챈 준영은 브라질 진영으로 달려가고 있는 조니 헤인스에게 스루패스를 밀어 주었다.
측면으로 전력 질주했던 헤인스는 중앙으로 얼리 크로스를 보냈다.
멋지게 휘어 들어갔던 크로스는 역습 상황에서 누구보다 빨리 달려 나갔던 바비 찰튼의 머리에 제대로 걸렸다.
거의 날아가듯이 몸을 내던진 바비의 다이빙 헤딩슛은 지우마르의 손끝을 스치며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우와아아아!”
천둥 같은 함성이 다시 한번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잉글랜드의 재역전!
10분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드라마틱한 상황에 사람들은 어쩔 줄 몰랐다.
누군가는 그저 기뻐했고, 누군가는 자신이 본 게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볼을 꼬집었다.
성급하게 브라질의 우승을 급보로 타전한 기자들은 수정 기사를 보낸다고 허둥댔다.
“진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어.”
“경기를 이렇게 뒤집다니…….”
“승리의 여신도 참 변덕이 심하구만.”
그 승리의 여신에게 바람맞은 브라질 선수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정규 시간은 끝났으니까 심판이 3~4분 정도 주려나?”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돼! 이 한 골은 반드시 지켜야 해!”
브라질의 킥오프로 경기가 재개되자, 준영과 잉글랜드 선수들은 눈을 부릅뜨고 상대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러다 디디의 패스가 가린샤 쪽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패스는 약간 엇나갔고, 가린샤가 아닌 그를 견제하던 바비 찰튼이 공을 잡아챘다.
이에 다급했던 가린샤가 바비에게 백태클을 날렸다.
삑-!
“Puta que te pario!”
파울을 선언한 심판을 향해 가린샤가 욕설을 퍼부었다.
‘저러다 퇴장당할 텐데.’
가린샤 클럽이 역사보다 4년 일찍 출범하는 건 아닐까?
준영의 우려(?)와 달리 심판은 가린샤의 무례를 너그럽게 넘어갔다. 그러나 판정은 정정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프리킥으로 경기는 재개되었다.
이후에도 브라질 선수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었지만, 잉글랜드 선수들은 공을 빼앗기지 않았고 리드를 유지했다.
삐익-! 삑!
시합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준영과 잉글랜드 선수들은 신나게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이겼어! 우리가 우승이라고!”
“이거 꿈은 아니지?”
“가린샤에게 골 먹었을 땐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우승! 꿈에서나 그렸던 월드컵 제패!
역사보다 8년 일찍 잉글랜드에 우승컵을 안겨 준 미래인은 한껏 기쁨을 만끽하다 브라질 진영으로 눈을 돌렸다.
역사의 변동의 희생자들.
원래 첫 우승의 기쁨을 맛봐야 할 저들은 로순다에서 또 한 번의 비극을 맛보고 있었다.
“흐어엉! 이건 말도 안 돼! 왜 페널티킥을 안 준 거야, 왜!”
“울지 마, 이드송.”
“우리가 이긴 경기였는데! 다 이긴 경기였는데!”
어린 펠레는 누구보다 충격이 컸다.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그를 다독이는 가린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승전 최종 스코어 3 대 2.
펠레 스코어로 알려진 이 점수는 펠레가 절대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
***
월드컵은 보통 개최된 대륙의 국가가 우승을 하는데, 스웨덴 월드컵은 특이하게도 유럽에서 남미 국가인 브라질이 우승을 한 대회였습니다.
그만큼 이 당시 브라질의 전력은 굉장했습니다.
4년 후 칠레 대회에서도 우승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브라질이 다른 대륙에서 또 한 번의 우승을 한 2002년에도 참 멤버들이 화려했지요.
그런데 2014년 자기네 안방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그렇게 중량감 있는 선수는 없었고, 그나마 네이마르는 부상으로 뛰지도 못했죠.
내년에 카타르에서 월드컵이 열리는데, 그때 브라질이 또 우승을 할지, 아니면 다른 나라가 우승을 차지할지 기대되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