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79. 평생을 건 도전
동점 골을 넣은 브라질.
그들은 내친김에 역전을 노리고 파상 공세로 나왔다.
디디가 공을 가진 채로 잉글랜드 수비진을 한차례 쓸어 보다 측면의 가린샤에게 패스를 보냈다.
바비 찰튼의 앞에서 슬쩍 페인트 동작을 취하던 가린샤는 잽싸게 돌진을 시도하다 절묘하게 크로스를 올렸다.
‘아웃프런트 킥?’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싶더니 발등 바깥쪽으로 공을 문전으로 올려 보냈다.
바비 찰튼은 물론 박스에 있던 수비수들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공이 기묘하게 휘어지며 떨어졌기 때문.
빌리 라이트의 머리를 스친 공은 뛰어드는 바바의 이마에 꺾이며 골 그물을 흔들었다.
“우와, 역전 골이다!”
“아니야. 옆 그물이야.”
브라질로서는 실로 아쉬운 상황.
잉글랜드 입장에선 위기를 넘겼다고 좋아할 수 없었다.
브라질의 공격이 계속 날카롭게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저것들, 점점 더 까부는데?”
“젠장, 마음 같아선 엉덩이라도 걷어차 주고 싶어.”
상대가 마음대로 설치게 두는 건 좋지 않다.
그렇기에 준영은 더더욱 펠레를 마크하는 데 신경 썼다.
팀의 막내가 펼치는 활약은 선배 선수들에게 분발과 독려의 계기가 되니까.
“패스, 얼른 패스해요!”
지토가 잉글랜드의 공을 인터셉트해 오자, 펠레는 곧장 손을 들어 올리며 잉글랜드 페널티 박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준영과 맞대결을 펼쳤다.
‘이번엔 제대로 제쳐 주겠어!’
‘어디 와 봐라, 애송이 축구 황제!’
펠레는 준영을 등진 상태에서 패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지토가 찔러 준 패스가 도중에 토미 뱅크스의 발끝에 맞고 조금 떠서 날아왔다.
잡기 힘들게 들어온 그 공을 펠레는 발등으로 띄워 올린 후, 그대로 반대편 다리를 들어 올리며 오버헤드 킥을 시도했다.
“오오오!”
관중들의 탄성을 끌어낸 펠레의 오버헤드 킥.
하지만 그의 발은 공이 아니라, 그 공을 먼저 걷어 낸 준영의 머리를 후려치고 말았다.
“아악!”
삐이익-!
준영이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심판의 휘슬이 날카롭게 울렸다.
사색이 된 펠레는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일부러 한 건 아니에요! 진짜라고요!”
브라질 선수들도 황급히 몰려와서 심판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여기서 자칫 퇴장이라도 당하면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니까.
“원칙적으로 사람의 머리 높이로 발을 드는 건 반칙이야. 명심하라고!”
그럼에도 오버헤드 킥은 대체로 묵인되고 있다.
시전하기 어려운 고급 기술이기도 하거니와, 일단 성공하면 멋지기도 하고 관중들도 좋아하니까.
아무튼 모리스 심판은 구두 경고만 하고 넘어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펠레는 자신을 무섭게 쏘아보는 준영의 눈길과 꼭 말아 쥔 큼지막한 주먹에 움찔했다.
“Desculpe, Muito Desculpe(죄송, 진짜 미안해요).”
“됐으니까 가 봐.”
퉁명스럽게 대꾸한 준영은 머리를 흔들었다.
방금 전 일격에 눈앞에서 천체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다행히 우주 쇼가 수그러들고 있었기에 시합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고난이긴 했지만, 득은 있군.’
시합이 잠시 중지되면서 브라질의 일방적인 흐름이 끊겼다.
심판의 경고를 받은 펠레도 함부로 설치지는 못할 터.
‘천천히 흐름을 우리 쪽으로 돌려놓자. 아직 시간도, 기회도 충분히 있으니까.’
스코어보드의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던 준영은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
전반전은 1 대 1로 끝났다.
라커룸으로 돌아온 잉글랜드 대표팀은 윈터보텀 감독에게서 후반전 작전을 들었다.
“너희도 봤지만, 브라질은 공격수 4명, 수비수 4명, 중원에는 하프백 2명을 두고 있어. 공격이나 수비에서 항상 6명이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거지.”
브라질의 4백은 보다 수비 간격을 좁힘으로써 효율적인 방어를 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하진 않았다.
“후반전에는 브라질도 결판을 보려 하겠지. 공격 가담이 좋은 니우통 산투스가 전진해 나올 테니까 그 뒷공간을 잘 파고들어야 해.”
그러면서 윈터보텀은 선수들 개개인에게도 지시 사항을 날렸다.
“롭슨, 좀 더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해 봐. 찰튼 넌 가린샤를 좀 더 바싹 마크해! 자꾸 크로스를 올리게 내버려 두면 곤란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존, 그 펠레라는 애송이를 신경 쓰는 건 좋지만, 다른 수비수들을 믿어. 네가 너무 수비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미드필드가 거의 무방비라고.”
윈터보텀의 지적이 옳았다.
펠레에게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중원에서 디디나 지토를 제대로 저지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제아무리 펠레라도 공이 안 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확실히 중원부터 패스를 차단하지 않으면…….’
분명 펠레는 이번 대회에서 실력을 드러낸 요주의 대상.
하지만 축구는 11명이 하는 경기이고, 한 명에게만 너무 매달려서는 곤란했다.
더구나 브라질은 원맨팀이 아니라 가린샤, 바바, 디디 등 톱 플레이어들이 즐비하니까.
후반전엔 이들도 전력을 다할 게 틀림없다.
탐색은 전반전만으로 충분했을 테니까.
“이제 45분 남았다. 새로운 챔피언의 들러리가 아닌, 역사에 남을 국민 영웅이 되는 거다. 알겠나?”
“Yes, Sir!”
기운차게 외친 준영은 선수들과 다시 필드로 나갔다.
앞으로 평생 따라다닐 타이틀을 위하여.
그는 후반전에 모든 것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
후반전, 진영을 바꾼 브라질과 잉글랜드 선수들은 초반부터 맹렬히 공방을 주고받았다.
선제골의 주인공인 로버트 A. 스미스는 후반 2분, 상대 진영으로 잽싸게 파고든 톰 피니에게 패스를 찔러 주었다.
상대 장신 수비수 힐데랄도 벨리니를 제쳐 버린 피니는 골문을 향해 강슛.
하지만 이 슈팅은 지우마르 골키퍼에게 잡혔다.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던 지우마르는 앞으로 달려가는 니우통 산투스에게 공을 던졌다.
공을 받은 니우통은 곧바로 잉글랜드 진영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저놈이……!”
“보고 있지 말고 막아!”
니우통은 달려드는 잉글랜드 선수들의 태클과 차징을 능숙하게 제쳐 냈다.
그러곤 페널티 박스로 들어가면서 손을 흔드는 펠레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벼락같은 슈팅을 날렸다.
뻐엉-
허공에 선명하게 궤적을 그은 슈팅은 아슬아슬하게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휴, 빗나갔구나.”
“저놈, 진짜 수비수 맞나?”
윈터보텀 감독의 말대로 이후에도 니우통 산투스는 과감하게 잉글랜드 진영으로 넘어왔다.
슈팅과 크로스의 질적인 수준은 공격수인 마리우 자갈루보다 나을 정도.
거기다 드리블 능력 역시 뛰어났다.
“후후후, 저 아저씨가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나보단 못하지만.”
연방 잉글랜드 진영을 쑤시는 니우통의 활약에 가린샤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런 니우통의 앞에 나선 준영이 그에게서 공을 가로챘다.
“잘했어! 이쪽으로 패스해!”
니우통이 비우고 나온 빈 공간으로 바비 롭슨이 달려갔다.
하지만 준영의 패스는 그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니우통을 대신해 수비로 내려갔던 자갈루가 도중에 가로챈 것이다.
“흥, 잉글랜드 놈들, 니우통이 아무 생각 없이 올라올 줄 알았나?”
“자갈루는 수비에도 일가견이 있단 말씀!”
공을 가로챈 자갈루는 디디에게 패스를 보냈다.
준영이 재빨리 마크해 들어오자, 디디는 곧장 가린샤 쪽으로 공을 넘겼다.
하지만 가린샤가 잡기 전에 바비 찰튼이 태클로 터치라인 밖으로 밀어냈다.
‘후반전엔 설치지 못하게 하겠어!’
매섭게 빛나는 바비의 눈빛에도 불구하고, 가린샤는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그의 그런 태도는 브라질 선수들은 물론, 비센치 페올라 감독도 우려하게 만들었다.
“바비 찰튼, 분명히 젊고 미숙한 선수지. 하지만 절대 만만하게 볼 순 없어.”
유러피언 컵에서 디 스테파노를 묶고, 레알 마드리드를 격침시키는 골을 터트렸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 경기에서는 과연 그냥저냥 물러날까?
지워지지 않는 불안감에 페올라 감독의 표정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
페올라 감독의 우려 속에도 브라질 선수들은 경기를 우세하게 이끌어 갔다.
후반전 시작 때만 해도 팽팽하게 진행되던 경기가 20분대에 접어들자 60 대 40 정도로 브라질의 공 점유율이 더 높아진 것.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브라질의 전술과 개인기가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잉글랜드는 잘 버티고 있군.”
“집중력이 좋은 거지. 하지만 체력이 떨어지면 그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기자들이 연방 셔터를 누르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자갈루와 거의 포지션을 바꾼 것처럼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하던 니우통 산투스가 잉글랜드 문전으로 크로스를 보냈다.
바바나 펠레의 머리를 노린 것이었지만, 빌리 라이트가 헤딩으로 먼저 걷어 냈다.
그렇게 흘러나온 공을 잡은 것은 박스 외곽에 있던 가린샤.
그가 다이렉트 슛을 시도하자, 바비 찰튼은 곧장 달려들어 발을 가져다 댔다.
“어라, 저거… 저거!”
굴절된 슈팅은 하늘로 치솟았다가 다시 뚝 떨어졌다.
그것도 골대 왼쪽 상단 구석으로.
화들짝 놀란 맥도널드 골키퍼가 몸을 날렸지만, 공은 거짓말처럼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들어갔다아!”
“역전! 브라질 역전!”
승부의 추가 기울어진 순간, 브라질에서 온 관중과 기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만세를 불러 댔다.
후반 37분.
승리를, 우승을 확정 짓는 가린샤의 골이 터졌다.
열광하는 브라질 선수들과 달리, 잉글랜드 선수들은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바비 찰튼은 더했다.
‘왜… 왜 하필이면 내 발을 맞고 들어간 거야!’
눈앞이 깜깜해졌다.
앞으로 평생 동안 자신에게 쏟아질 원망과 비난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절망이 짓누르는 그 순간, 그의 고막에 벼락같은 호통이 날아들었다.
“왜 다들 자빠졌어! 아직 경기 안 끝났다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15번 이준영.
연방 선수들을 다그치는 그의 모습에 몇몇 선수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 저런 브라질을 상대로 하필 이 시간대에 실점하다니.”
그들의 회의적인 반응에 준영이 코웃음을 쳤다.
“아직 10분 가까이 남아 있잖아. 거기다 1점 차밖에 안 돼. 난 0 대 4로 지고 있다가도 5 대 4로 이긴 경기도 봤다고.”
“야 인마, 그런 경기가 어딨어?”
“그래! 사기 치지 마!”
반발하는 선수들에게 가까이 다가간 준영이 쏘아붙였다.
“그래서? 나중에 손주들한테 가린샤에게 골 먹고 준우승했다고 자랑할 거야?”
“누가 자랑을 한다고…….”
“그래, 자랑거리는 아니겠지. 결승까지 올라오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그런데 벌써 포기하시겠다?”
월드컵 토너먼트, 아니 본선에도 올라오지 못하는 나라와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월드컵 결승은 준영도 꿈에서나 그리던 무대였다.
그러다 낯선 시대로 와서 월드컵 막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레전드 오브 레전드, 축구 황제 펠레와 맞붙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고 물러서라니.
그럴 순 없었다.
경기가 끝났다면 모를까,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이 있지 않은가!
“난, 챔피언의 들러리가 될 생각은 없어. 그게 브라질이든,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 대표팀이든 말이야.”
“맞아요. 기왕이면 주인공이 되어야죠.”
주저앉아 있던 바비 찰튼이 준영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그래,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다.
다들 고개를 내젓는 난관을 뚫어 온 이 거인과 함께라면, 불가능도 가능이 될 테니까.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기왕이면 멋지게 은퇴하는 게 좋을 테니까.”
주인공이 되자.
낙담해 있던 선수들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다들 그 안에 평생을 걸고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
4골 뒤지다 5골 넣고 이긴 경기.
2019년 6월에 있었던 강원과 포항의 경기였죠. 당시에 포테이토사우루스(…)와 함께 상당히 화제가 된 경기였습니다.
참고로 포항은 1999년 8월에 수원한테도 3골 앞서가다 4골 먹고 역전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경기도 진짜 명승부였죠. (포항에겐 흑역사……;;;)
뭐 이렇게 수난만 있었던 건 아니고, 포항도 2013년에 마지막에 울산에게 버저비터 골을 넣고 우승한 적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역시 포기하지 않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