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78화 (178/400)

Round 178. 애송이 축구 황제

브라질은 곧장 코너킥으로 공격을 이어 갔다.

키커를 맡은 가린샤는 준영의 큰 키에 신경 쓰지 않고 높고 빠르게 공을 올려 보냈다.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낙하지점으로 움직이던 준영은 갑자기 공의 방향이 슬쩍 꺾이는 걸 보았다.

‘헐, 커브?’

예상과 다른 지점으로 떨어지는 공을 향해 바바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맥도널드 골키퍼가 뛰어올라 안전하게 공을 잡아챘다.

“나이스, 맥도널드!”

“프랑스 얼간이처럼 흘리면 안 돼.”

맥도널드도 프랑스 골키퍼의 실책이 신경 쓰였던지 공을 신중히 관리했다.

거기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준영과 조셉 포스터가 만들어 낸 실패작 같은 성공작인 살인마(?) 장갑까지 끼고 나왔다.

“자, 멋지게 한 골 만들어 보라고!”

맥도널드가 길게 공을 내찼다.

조니 헤인스는 가슴으로 그 공을 받아 내어 브라질 페널티 박스로 접근한 톰 피니 쪽으로 패스를 보냈다.

하지만 피니는 공을 잡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것도 접근해 온 브라질 수비수들을 잔뜩 유인한 상태로.

“이런, 속았다!”

“얼른 마크해!”

피니가 흘려준 공을 잡은 건 로버트 A. 스미스.

준결승부터 출전했던 그는 브라질 수비수들에게 미지의 존재였다.

물론 이번 시즌 영국 리그 득점왕이라는 것 정도는 들었지만, 진짜 실력을 맛본 적은 없었다.

스미스는 그런 브라질의 빈틈을 그대로 찔렀다.

그는 허둥지둥 마크에 나서는 브라질 수비수들을 앞에 둔 상태에서 그대로 과감하게 강슛을 날렸다.

파앙-!

지면에 낮게 깔린 슈팅은 브라질 골키퍼 지우마르의 손을 스치며 골대 안으로 꽂혀 들어갔다.

“골! 골이다!”

“맙소사, 잉글랜드가 먼저 터트리다니!”

전반 4분.

예상보다 빠르게 경기의 균형이 깨졌다.

관중석에서 감탄 섞인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잉글랜드 선수들은 얼싸안고 신나게 골 셀레브레이션을 즐겼다.

“거참, 우리 편이 방해가 될 줄이야.”

지우마르는 방금 전 실점 상황을 떠올렸다.

상대 공격수가 슈팅을 날렸을 때, 수비수들이 앞을 막고 있는 바람에 방향을 읽을 수 없었다.

‘저런 슛은 수비수에게 튕겨 나오는 게 보통인데… 뚫고 들어와서 꽂힐 줄이야.’

브라질 입장에선 참으로 얼얼한 일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 대회에서 처음으로 상대 팀에 선제골을 내준 것이니까.

“괜찮아요. 만회하면 되니까.”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펠레.

언제든 골을 넣을 수 있다는 그 자신만만한 모습에 선배 공격수 바바나 마리우 자갈루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한 골 정도 먹을 건 예상했다고요. 그리고 역전승이 더 드라마틱하잖아요.”

“그러니까, 2 대 1로 이겨서 네가 한 예언을 완성하겠다는 거야?”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듣자니 미국의 유명 선수도 미리 예고하고 점수를 냈다는데요?”

펠레의 말에 바바가 가볍게 쥐어박았다.

“인마, 그건 베이브 루스잖아. 그 사람은 야구 선수라고.”

중앙선에 서서 즐겁게 떠드는 브라질 공격수들의 모습에 잉글랜드 선수들은 부아가 치밀었다.

“저것들, 실점을 하고도 시시덕거리다니!”

“얼마나 우릴 우습게 보고 있는 거야?”

“쳇, 조 예선에선 찍소리도 못하고 쩔쩔맸던 놈들이……!”

본의 아니게 잉글랜드 선수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댄 펠레와 브라질 공격진.

경기가 재개되자, 그들을 향해 사나운 차징과 거친 태클이 날아들었다.

“본고장 축구 맛이 어때?”

“발재간 좀 부린다고 까불지 마!”

화끈하기 짝이 없는 축구 종가의 대응에 브라질 선수들은 다소 주춤했다.

하지만 준영은 그게 겁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잉글랜드 선수들 전체를 앞으로 끌어낼 의도라는 걸 눈치챘다.

“모두 자리를 지켜! 섣불리 전진하면 안 돼!”

준영의 경고가 먹히기 전에 브라질이 잉글랜드의 빈 공간으로 잽싸게 파고들었다.

중원에서 지토와 빠르게 패스를 주고받던 디디는 측면을 내달리는 마리우 자갈루에게 공을 넘겼다.

수비수 에디 클램프를 달고 잉글랜드 페널티 박스로 접근하던 자갈루는 슬쩍 방향을 전환하며 강슛을 날렸다.

‘이런, 위험해!’

터엉-!

골대 모서리를 맞힌 슈팅에 준영과 잉글랜드 선수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안도할 틈은 없었다. 튀어나온 리바운드 볼을 펠레가 잡았으니까.

준영은 곧장 바싹 달라붙어 돌아서지 못하게 막았다.

‘와, 담장을 등진 것 같군.’

‘어디 발재간 한번 부려 보시지, 축구 황제!’

힐끔 바바 쪽을 바라보았던 펠레는 준영이 멈칫하는 틈을 타서 잽싸게 측면으로 돌아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따돌렸다 생각했던 준영이 곧장 따라붙어서는 그를 밀쳐 내고 공을 빼앗아 냈다.

“이거 파울 아닌가요?”

쓰러진 펠레의 항의에 모리스 심판은 고개를 저었다.

준영이 먼저 어깨를 밀어 넣어 공을 확보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쳇, 저 프랑스 심판, 우리가 자기네 나라를 떨어트렸다고 앙심을 품은 게 틀림없어.’

분통하긴 했지만, 판정을 무시할 순 없는 노릇.

더구나 펠레의 관심은 이내 심판이 아닌 준영에게로 쏠렸다.

자신에게서 공을 빼앗은 이 동양의 거인은 견제에 나서는 바바와 자갈루, 지토를 능숙하게 제쳐 냈다.

“우와아아아!”

브라질 선수들 못지않은, 아니 한 수 위의 개인기에 관중석에서 크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능숙하고 세련된 개인기는 펠레마저 입이 떡 벌어지게 할 정도였다.

‘대단해!’

하지만 더욱 대단한 장면은 그 뒤에 나왔다.

미드필드 지역까지 전진했던 준영이 전방을 응시하다 길게 패스를 보냈던 것.

멋진 포물선을 그린 롱 패스는 브라질 수비수들 사이를 뚫고 가는 바비 롭슨의 앞으로 정확히 떨어졌다.

“골키퍼와 일대일이다!”

잉글랜드의 추가 골 기회!

목을 쭉 빼고 바라보던 관중들은 브라질 골키퍼가 페널티 박스로 뛰어나와 공을 멀리 걷어 내자 아쉬움을 삭였다.

“브라질 골키퍼가 잘 나왔어.”

“그러게. 조금만 늦었더라도 꼼짝없이 당했을 텐데 말이야.”

아쉽게 기회가 무산되긴 했지만, 잉글랜드의 방금 전 공격은 관중들뿐만 아니라 유럽 곳곳에서 찾아온 축구인들과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거참, 공격에서 짧고 정확한 패스가 대세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길고 짧은 게 문제가 아니야. 중요한 건 역습으로 전환하는 속도와 패스의 정확성이지.”

다들 진지하게 경기를 지켜보았다.

방금 전과 같은 공격 전술은 이미 잉글랜드가 이전 경기에서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경기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정교해지고, 뚜렷하게 모양새를 갖춰 나갔다.

모두의 시선은 그 전술을 점점 뚜렷하게 만들어 내는 장인에게로 쏠렸다.

잉글랜드의 15번 존 Y. 리.

매 경기 뛰어난 활약으로 팀을 결승에 올린 21세기 플레이어는 자신도 모르게 축구의 전술 발전을 가속시키고 있었다.

***

선제골을 내준 브라질은 가린샤와 자갈루, 펠레와 바바 4명의 공격수들이 활발히 움직이며 만회 골을 노렸다.

잉글랜드는 화려한 개인기와 날카로운 패스로 수비 라인을 흔드는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내며 묵직한 역습으로 받아쳤다.

‘아직 전반전이라 그런가? 브라질 녀석들, 여유만만이군.’

준영은 브라질 선수들의 표정과 그들의 플레이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보통 실점한 팀은 마음이 급해지기 마련.

성급하게 만회를 하려다 보니 실수가 잦아지고, 시야는 도리어 좁아진다.

그래서 기회가 와도 허망하게 날려 버리기 일쑤.

‘그런 식으로 끌려다니다 보면 시간은 점점 부족해지고 마음은 더욱 급해지게 되지.’

그런 악순환을 풀어 주는 게 크랙이라 불리는 특급 플레이어, 그리고 경험 많은 베테랑들이다.

현재 브라질은 그 두 부류를 다 갖추고 있다.

그렇기에 쉬이 흔들리지도, 성급하게 굴지도 않았다.

‘언제든지 득점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후반전에도 계속 그 자신감이 이어진다면 골치 아프겠어.’

그 자신감을 더욱 뜨겁게 피워 올리는 상황이 벌어져도 곤란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막아 내고 있지만, 이대로는 좀 위험했다.

가린샤와 자갈루는 틈만 나면 위협적인 크로스와 패스를 찔러 넣고, 펠레와 바바는 번갈아서 중앙을 드나들며 수비수들을 유인하고 교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준영은 수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덕분에 잉글랜드 수비진은 4백에 가깝게 유지되고 있었다.

‘가린샤 쪽에서 계속 뚫리는데… 아무래도 바비 혼자서는 무리인가.’

뛰어난 체력과 끈질긴 맨 마킹 능력이 있는 바비 찰튼이지만, 가린샤는 그보다 한 수 위.

가린샤는 겉보기엔 뭔가 엉성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공을 쉽사리 빼앗기지 않았다.

거기다 슛과 패스도 상당히 변칙적이라 예상해서 대처하기 쉽지 않았다.

‘내가 가린샤를 막는 편이 나았으려나? 아냐. 그럼 펠레는 누가 막아?’

올해 17살의 펠레.

하지만 그 나이대 선수라고 볼 수 없는 드리블 능력과 결정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준영도 리그나 유러피언 컵에서 상대했던 1급 선수들을 대하듯이 펠레를 마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몸이 먼저 그렇게 반응을 했다.

‘그런데도 안심이 안 된단 말이지.’

축구 황제라는 미래의 명성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존, 그 애송이를 막아!”

눈앞으로 펠레가 공을 몰고 오자 준영은 생각을 접어 두고 일단 상대에게 집중했다.

그런데 그때, 펠레가 가늘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양발 사이에서 놀던 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방금 뭘 어떻게 한 걸까?

답을 찾기 전에 펠레가 잽싸게 준영을 제치고 빠져나갔다.

준영은 곧장 그를 쫓아갔다.

공은 놓쳐도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되는 건 상식이니까.

하지만 이번엔 그 상식이 빗나갔다.

펠레는 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좀 전에 잽싸게 뒤쪽의 디디에게 백 패스를 보냈고, 디디는 다시 바바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

‘젠장, 낚였어!’

이 영악한 애송이 축구 황제는 자신을 유인해 가며 문전에서 커다란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공간으로 들어온 바바는 빌리 라이트의 마크를 뿌리치고 슛을 날렸다.

파앙- 좌악!

전반 28분.

송곳같이 찔러 든 바바의 슈팅은 그대로 골대에 박혔다.

워낙에 빠른 슈팅이라 맥도널드 골키퍼는 반응조차 하지도 못했다.

“바바! 바바가 동점 골을 넣었다!”

“역시 브라질의 간판 공격수다운 실력이군!”

관중들은 골을 넣은 바바에게 환호했지만, 방금 전 골은 사실상 펠레가 만든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준영은 분통한 마음에 발을 굴렀다.

‘젠장, 백 패스였을 줄이야!’

공이 갑자기 사라져서 등 뒤에서 뒤꿈치로 공을 쳐올리는 레인보우 플릭을 쓴 줄 알았건만.

“인상 펴. 너만 실수한 거 아니야.”

빌리 라이트가 위로하듯 준영의 등을 툭 쳤다.

분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나 다른 수비수들이 디디나 바바에 대한 마크를 제대로 했다면 골을 내주지 않았을 테니까.

“이미 들어간 건 어쩔 수 없지. 또 당하는 바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자고.”

“그래요. 두 번 당할 순 없죠.”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자신감을 뜨겁게 피워 올리는 브라질에게 다시 기회를 줄 수 없었기에, 준영은 이를 악물고 경기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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