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77. 우연한 인연
“Inglaterra Jogador!”
가린샤도 준영을 알아보고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건넸다.
그와 악수를 나눈 준영은 여전히 황당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이런 데서 가린샤를 만날 줄은……. 근데 쇼핑 중이었나?’
아마 저쪽도 결승전을 앞두고 휴식 및 관광을 즐기고 있는 모양.
그 와중에 쇼핑을 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문제는 당최 흥정이 안 된다는 사실.
말을 못 알아들어도 보디랭귀지면 어느 정도 통하기 마련인데, 그조차도 쉽지 않았던 것.
“이것 보쇼! 가격이 100달러라고! 여기 내 손에 들린 10달러 지폐 10장만 내면 된다 이 말이야.”
“10 dólares?”
“아냐! 한 장이 아니라 10장이라고! 어이구, 답답한 손님이구만, 진짜!”
주인이 가슴을 치며 열 손가락을 펼치자, 가린샤는 다시 지갑을 뒤졌다.
그러곤 이번에는 10달러 지폐를 뭉텅이로 꺼내 놓았다.
“Suficiente?”
“그, 그래. 이 정도면 됐소. 충분해.”
반색을 한 주인이 손을 뻗을 때, 준영이 끼어들어 가린샤가 꺼내 놓은 지폐 뭉치를 낚아챘다.
“이보쇼, 뭐 하는 거요? 왜 남의 장사를 방해하는 거요?”
“장사라면 거래를 올바르게 해야죠. 100달러라면서요? 근데 아무리 봐도 이건 100달러가 넘는데요?”
지폐를 헤아려 보니 180달러.
준영이 확인시켜 주자, 주인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알았소. 내가 잘못했소. 워낙 답답해서 빨리 거래를 끝내고 싶어 그랬소.”
“네, 근데 저런 고물 라디오를 100달러나 받아먹는 건 지나쳐 보이는데요? 많아 봤자 30달러밖에 안 될 것 같은데.”
“그, 그건…….”
준영의 말대로 가린샤가 고른 라디오는 큼지막하고 외관이 나무로 된 구식 진공관 라디오였다.
100달러는 바가지나 마찬가지였다.
“나라 망신시키지 마시고, 거기 있는 소형 휴대용 라디오랑 헤드폰도 같이 주세요.”
“이 라디오는 트랜지스터로 된 최신형 모델인데…….”
“그래도 100달러까진 아니죠? 충분히 마진을 남길 수 있을 텐데요?”
준영이 슬쩍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안 그래도 체격이 큰 그가 위압적으로 째려보자, 진땀을 흘리던 주인은 곧바로 백기를 들고 휴대용 라디오와 헤드폰을 내놓았다.
“잘 생각하셨어요. 장사는 양심적으로 해야죠.”
준영은 100달러를 지불하고, 남은 지폐는 가린샤에게 돌려주었다.
가만히 지켜보다 작은 라디오와 헤드폰이 덤으로 생긴 가린샤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Obrigado, Amigo.”
“뭐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용팔이는 조심해요.”
상점에서 나온 준영과 가린샤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좀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리즈는 가린샤가 떠나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뭔가 많이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이었어요.”
“맞아. 실제로 그런 면이 있어.”
예전에 가린샤가 문맹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기초 교육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능 자체도 일반인에 비하면 모자라는 수준이었다고.
‘하지만 대신 축구는 기가 막히게 잘했지.’
필드에서는 악마 같은 존재.
펠레와 함께 출전한 경기에서는 진 적이 없는 역대급 드리블러다.
‘필드에서 다시 보자고, 가린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준영은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
부르르릉-
대한민국 경기도 화성군.
물자를 잔뜩 실은 하얀 트럭 3대가 비포장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길옆 나무 그늘 밑에서 장기를 두던 촌로들은 요란하게 지나가는 트럭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디 공사하나?”
“공사는 무슨……. 구호 활동을 하러 가는 게지.”
“구호 활동? 저치들이 누군데?”
곰방대를 문 노인의 물음에 그의 친우는 혀를 차며 설명했다.
“자네, 못 들었나 보구만. ‘오드리 희망재단’이라고, 요즘 서울과 경기도의 빈민촌과 고아원에 구호품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어.”
6.25전쟁이 끝나고, 외국에서 여러 구호 단체들이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었다.
오드리 희망재단은 최근에 활동을 시작한 구호 단체였다.
얼마 되진 않았지만, 그들은 금방 세간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재단을 후원하는 사람이 무척 유명했으니까.
“오드리라는 외국 여배우인데, 젊은 애들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래.”
“오두리라는 게 사람 이름이었나? 난 동네 이름인 줄 알았지.”
“오두리가 아니라 오드리라니까.”
촌로들을 뒤로하고 달려가던 트럭들은 도중에 멈춰 섰다.
선두에 있던 1호 차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죠?”
“아, 헵번 씨,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펑크가 난 거라 바퀴만 갈아 끼우면 됩니다.”
1호 차에 타고 있던 이억관은 2호 차에서 내린 오드리 헵번에게 냉큼 양산을 씌워 주었다.
“쓰세요. 태양빛이 몹시 따갑습니다.”
“어머, 고마워요, 사장님.”
생긋 미소를 짓는 오드리를 보자니 억관의 입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거참, 준영이 그 친구가 왜 이 아가씨를 입이 닳도록 천사님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구만.’
사실 빼빼Ro인지 하는 과자를 판 수익의 일부로 전쟁 난민 구호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광고 모델을 맡은 여배우가 모델료를 전액 구호 기금으로 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참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배우가 오드리 헵번이었을 줄이야!’
도대체 준영은 어떻게 이 사람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와 인연을 맺은 걸까?
아무튼 오드리는 유명 배우답지 않게 소탈하고 시원스러웠다.
흔쾌히 자신의 이름을 구호 재단명으로 쓰는 데 허락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구호 활동에 참여하고 싶다며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보였기에 그녀를 쫓아다니는 기자들도 놓쳐 버렸을 정도였다.
“풍경이 황량하네요. 마치 전쟁의 상흔 같아 보여요.”
“안타까운 일이죠. 옛날에는 금수강산이라 불렸는데…….”
“다시 그리 불릴 날이 올 거예요.”
오드리의 말에 억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리가 끝났습니다!”
트럭 운전기사의 말에 다들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과거에 일본인들이 신사로 쓰던 낡은 목조 건물이었는데, 현재는 가톨릭 교단에서 보육원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여기가 일심원이라는 곳인가요?”
“예, 듣자니 전쟁이 끝날 무렵에 뜻있는 사람들과 UN군 장병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세웠답니다.”
전쟁 중에 UN군 장병들이 구조하고 직접 보살핀 전쟁고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아 건립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심원(一心院)이라고 지었는데, 한마음 보육원으로 바꿀 거라 하더군요.”
“왜 바꾸죠?”
“그게 이름이 너무 딱딱하고, 사람들이 불교 사찰로 착각할까 봐 그렇다고…….”
오드리와 억관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건물 안에서 아이들이 몰려나왔다.
“와! 어디에서 왔어요?”
“헬로, 예쁜 언니야!”
보육원 선생님들이 병아리 떼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을 통제하려 애썼다.
귀찮을 만도 하건만, 오드리는 좋다고 달라붙는 아이들을 연방 어루만져 주었다.
“얘들아, 줄 서라! 줄!”
“말 잘 듣는 착한 아이한테 과자를 먼저 줄 거야.”
억관 일행은 아이들에게 사탕과 과자 등을 나눠 주고, 쌀을 비롯한 식량과 아이들의 옷가지, 신발 등도 전달했다.
또 공이나 인형 같은 장난감들도 건네주었다.
“난 나중에 황금발 최정민처럼 유명한 축구 선수가 될 거야.”
“바보야, 요즘은 축구왕 이준영이 더 유명해.”
이억관은 떠들면서 공을 차는 꼬맹이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멀리 서쪽을 바라보았다.
‘월드컵 결승까지 올라갔다던데……. 마지막까지 잘하게, 준영이.’
준영의 선전을 기원하는 억관.
그는 전혀 몰랐다.
오늘 구호 활동으로 우연히 찾아온 이곳이 준영과 인연이 닿아 있는 장소라는 사실을.
***
1958년 6월 29일, 오후 3시.
한낮의 태양이 쏟아져 내리는 로순다 경기장에 5만에 가까운 관중들이 꽉 들어찼다.
관중들의 시선과 기자들의 카메라는 필드에서 킥오프 준비를 하는 잉글랜드와 브라질 양 팀 선수에게 향해 있었다.
“과연 누가 이길까?”
“우승 후보를 무찌른 브라질과 디펜딩 챔피언을 꺾은 잉글랜드… 막상막하로구만.”
“아니, 천재 스트라이커를 보유한 브라질이 우위일지도.”
“안 그래도 그 펠레라는 녀석이 어제 호언장담을 했다더군.”
어제 펠레는 언론 기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브라질은 8년 만에 다시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 섰습니다. 당시에는 모두가 눈물을 흘렸지만, 내일은 모두가 기쁨의 춤을 추게 될 겁니다.’
그러면서 펠레는 2 대 1로 브라질이 이길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호기로운 발언에 준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펠레는 정말 펠레답구만.”
월드컵 결승전은 그야말로 꿈의 무대.
꿈에서만 그려 봤던 경기에 실제로 뛰게 될 거라 생각하니, 흥분과 함께 부담감도 느껴졌다.
점점 D-day가 다가올수록 심장은 더욱 요동쳤다.
그런 상황에서 펠레가 예언을 했다!
덕분에 준영은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부담감을 어느 정도 떨쳐 낼 수 있었다.
‘땡큐, 펠레. 제 무덤을 파 줘서 고맙구나.’
경기 끝나면 쓰담쓰담이라도 해 주리라.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오늘 주심으로 나온 프랑스의 모리스 심판이 휘슬을 불었다.
‘드디어 시작이다!’
‘가자, 우승으로!’
양 팀 선수들이 공이나 상대 선수가 가는 방향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오늘 하프백으로 출전한 준영은 펠레와 바바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물론 측면에 있는 가린샤에게서도.
‘하지만 직접 상대하는 건 내가 아니야.’
오늘 가린샤의 전담 마크로 나온 선수는 바비 찰튼.
윈터보텀 감독은 체력이 좋고 끈질긴 수비력을 갖춘 찰튼이라면 가린샤를 잘 봉쇄해 줄 것이라 판단했다.
준영도 자신이 가린샤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들을 제공해 주었다.
‘절름발이라고 했던가?’
한쪽 다리가 다른 쪽보다 길다고.
그렇다 보니 대다수 사람들은 그가 축구를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린샤는 그 남다른 다리로 보통 사람과 다른 박자와 리듬감의 드리블을 해냈다.
그 기묘한 드리블을 본 사람들은 악마의 드리블러라며 치를 떨었다.
‘과연 어느 정도려나?’
바비가 긴장하고 있던 그때, 디디가 가린샤가 달려가는 쪽으로 패스를 밀어 주었다.
황급히 쫓아간 바비는 가린샤가 공을 잡기 전에 태클로 걷어 내려 했다.
하지만 분명히 제대로 들어갔다고 생각한 태클은 가린샤의 간단한 페인팅 동작 한 방에 땅바닥만 긁고 말았다.
‘이런, 당했다!’
바비를 제쳐 낸 가린샤는 곧장 페널티 박스 중앙으로 크로스를 올렸다.
쇄도하는 펠레의 발 앞으로 정확히 떨어지는 볼.
빌리 라이트가 막아서자, 펠레는 가볍게 공을 툭 차올리며 그를 벗겨 냈다.
‘이런 망할 애송이가!’
‘아저씨 실력으론 안 돼.’
득의의 미소를 지은 펠레가 슈팅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길게 뻗은 다리가 그의 슈팅을 골문이 아닌 바깥으로 튕겨 냈다.
‘존 Y. 리…….’
‘우릴 프랑스 놈들처럼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역사의 주인공과 역사를 바꾸려는 개척자.
초반부터 두 사람의 시선이 따갑게 오갔다.
***
가린샤가 스웨덴에서 100달러 주고 라디오를 산 건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1950년대 당시 1달러 가치가 2만 원 정도 된다니까 바가지를 써도 엄청 쓴 셈이죠. 그게 최신식 트랜지스터라디오라도 말입니다.
1930년대 기록을 봐도 라디오 가격은 20~30달러 선이었거든요.
아무튼 가린샤는 정작 산 라디오에서 스웨덴 말밖에 안 나와서(…) 사기를 당한 줄 알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