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74. 축구 종가 vs 전차 군단
1958년 6월 24일 오후 7시.
결승행 티켓을 두고 예테보리 울레비 경기장에서 축구 종가와 디 만샤프트가 격돌했다.
전날부터 장외 설전이 치열하게 오갔던 만큼, 초반부터 경기는 거칠게 진행되었다.
“패스해, 헬무트!”
“호어스트 쪽이 비었어!”
지난 월드컵 우승의 일등 공신 헬무트 란은 잉글랜드의 빈 공간으로 파고든 호어스트 스치마니악 쪽으로 공을 건넸다.
현재 서독 축구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스치마니악.
만능 미드필더로 손꼽히는 그의 앞을 동양에서 온 거인이 떡하니 가로막았다.
“어서 와, 약쟁이.”
준영의 빈정거림에 스치마니악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기에 준영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난 지난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았어.”
“뭐? 아까 주사 한 방 맞고 왔다고?”
“Hurensohn(개자식)!”
발끈한 스치마니악이 공을 치며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준영은 능숙하게 어깨로 밀어내며 공을 빼앗아 냈다.
그러자 스치마니악은 곧바로 백태클로 응수, 준영을 쓰러트렸다.
“아이고, 약쟁이가 사람 잡네.”
“큭, 이놈이 끝까지……!”
이러한 충돌은 경기 중에 필드 곳곳에서 일어났다.
어깨로 부딪치고, 발을 걸고, 유니폼을 잡아채는 건 예사.
경합 시 팔을 휘두르며 상대를 가격하거나 헤딩을 빙자한 박치기를 하고 발등을 밟아 댔다.
그 바람에 헝가리 출신의 졸트 주심은 바쁘게 휘슬을 불며 선수들에게 경고를 하고 만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심판이 제일 바빠 보여요.”
“그러게 말이다. 그냥 본보기로 양 팀에서 한 명씩 퇴장시키면 진정될 것 같구나.”
원정 응원을 온 영국 사람들과 함께 경기장에 자리를 잡은 프레드로 일가는 잉글랜드 대표팀과 준영을 열심히 응원했다.
“준, 힘내요!”
“이겨라, 대한 건아 이준영!”
조윤옥은 흰 천에 어설프게 그린 태극기를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음을 지은 준영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경기에 집중했다.
***
경기가 제법 과열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양 팀 선수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지는 않았다.
거칠게 대하는 건 어디까지나 기세 싸움이었기 때문.
그래서 볼 경합은 치열하게 진행하면서도 패싱 플레이는 아주 냉정하게 펼쳤다.
특히 서독은 마치 블록을 맞추듯, 공수에서 뛰어난 조직력을 보여 주었다.
‘역시 독일 축구로군. 일사불란한 게 군대가 따로 없어.’
괜히 전차 군단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21세기에 비하면 그 전차들은 작았지만, 모두 단단하고 기동력이 뛰어났다.
거기다 특유의 조직력은 잉글랜드 수비진을 연방 들쑤시며 틈을 만들어 냈다.
“토미, 성급하게 달려들지 마!”
빌리 라이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토미 뱅크스는 태클로 상대를 저지하려 들었다.
하지만 살짝 멈춰 서며 그 태클을 피한 서독의 주장 한스 셰퍼는 곧장 슈팅을 날렸다.
제대로 맞은 슈팅은 니어 포스트 상단을 통해 골 그물을 흔들었다.
“들어갔다아-!”
“역시 우리 독일은 최강이야!”
전반 24분에 터진 셰퍼의 선제골.
응원을 온 독일인들은 신나게 환호성을 질렀다.
“봤냐, 영국 해적 놈들아! 이게 독일 축구다!”
“크하핫! 우리가 챔피언이라 이거야!”
흥에 겨웠던 나머지, 누군가 응원가를 불러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도 우렁차게 따라 불렀다.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 über alles in der Welt~”
그 노래에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스웨덴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독일인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는 지난 대전 때 나치들이 불렀던 독일 국가였으니까.
“으으, 망할 크라우트 놈들!”
“뭐 하고 있냐, 축구 종가! 당장 저것들을 닥치게 만들라고!”
영국인과 스웨덴 관중들의 닦달이 아니더라도 잉글랜드 대표팀은 곧장 만회를 시도했다.
베테랑 톰 피니가 서독 페널티 박스로 들어와 강슛을 날리기도 하고, 조니 헤인스의 크로스를 받은 로버트 A. 스미스의 헤딩슛이 아깝게 빗나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관중석에선 아쉬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뭔가 되고 있긴 한데…….”
“피니나 스미스 둘 다 컨디션이 완전히 올라온 건 아닌 것 같아.”
“후반전은 몰라도 전반은 좀 힘들 것 같군.”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이렇게 쑥덕이고 있을 때, 서독의 역습이 차단되었다.
오늘 준영과 더불어 하프백으로 출전한 바비 찰튼이 호어스트 에켈에게서 공을 빼앗아 낸 것.
새파란 애송이에게 당한 것이 분했던 에켈이 곧장 탈취를 시도했지만, 바비는 바로 접근해 온 준영에게 공을 보냈다.
한 번 앞쪽을 살펴본 준영은 측면으로 내달리는 톰 피니에게 패스를 보냈다.
“하하핫! 진짜 끝내주는 패스로구만!”
피니는 달려가는 자신의 앞으로 정확히 떨어지는 패스를 잡아챘다.
그러곤 서독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와 중앙으로 달려오는 스미스에게로 낮고 빠르게 컷백.
하지만 스미스의 발에 닿기 전에 서독 골키퍼 헤르켄라스의 선방에 튕겨 나고 말았다.
“쳇, 또 실패…….”
인상을 구기던 피니는 리바운드 볼을 향해 달려든 동료를 보았다.
아까 자신에게 패스를 해 준 준영이 쇄도해서 떨어지는 공을 곧장 후려 찼다.
터엉-
느낌이 좋다! 제대로 맞았다!
쭉 곧게 날아간 슈팅은 크로스바 하단을 맞히며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우와아아아!”
“동점 골이다!”
“또 저 동양인이군!”
이번 대회 4골째!
중요한 순간에 여지없이 폭발하는 그의 득점력에 관중들은 환호와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재수 없이 설치던 독일 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준 게 제일 통쾌했다.
“크윽, 저 망할 원숭이 놈!”
“하필이면 저놈에게…….”
서독 선수들은 분통한 표정으로 골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준영을 노려보았다.
대놓고 자신들의 치부를 들쑤신 녀석이 날린 일격은 너무나 쓰라렸다.
***
전반 32분에 터진 잉글랜드의 동점 골은 경기 양상을 바꿔 놓았다.
선제골을 넣은 독일에게 기울던 전세가 잉글랜드 쪽으로 반전된 것.
심지어 관중석의 분위기도 잉글랜드 쪽으로 돌아섰다.
“지지 마라, 축구 종가!”
“크라우트가 결승에 올라가게 만들면 전부 죽을 줄 알아!”
이렇게 분위기가 돌변한 상황에서도 서독 선수들은 다시 경기 흐름을 자신들에게 가져오려고 애썼다.
가장 분투한 것은 헬무트 란.
그는 쉴 새 없이 잉글랜드 진영을 쑤시고 다니며 우베 젤러, 프리츠 발터, 한스 셰퍼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득점이 된 것은 없었다.
골대를 빗나가거나, 골키퍼의 손아귀에 잡히거나.
거기다 빌어먹을 원숭이에게 막히기도 했다.
방금 전 우베 젤러의 슈팅도 준영의 몸을 맞고 골대 옆으로 흘러 나가 버렸다.
“젠장,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 원숭이에게 막히면 더 화가 나! 건방지게 뒷짐까지 지고……!”
“진정해. 짜증 내면 될 일도 안 돼.”
서독의 최고참인 프리츠 발터가 흥분한 후배들을 다독였다.
“저놈에게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 없어. 놈에게 매달리느라 공격을 못하게 되면 우리만 손해라고.”
“휴… 명심할게요.”
“그래, 이 코너킥 공격을 어떻게든 잘 살려 보자.”
호어스트 에켈이 코너킥을 찰 준비를 하는 가운데, 페널티 박스로 양 팀 선수들이 몰려들었다.
서독에겐 전반전 마지막 찬스, 그리고 잉글랜드에겐 위기.
다들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에켈의 코너킥이 높이 궤적을 그으며 떨어졌다.
“야, 잡지 마!”
준영은 자신의 어깨와 유니폼을 붙잡는 독일 선수들을 뿌리치고 공이 떨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약간 박스 외곽으로 떨어진 공을 잡아챈 건 프리츠 발터.
누구보다 재빨리 다가가 공을 잡아챈 그는 곧장 골대 쪽으로 방향을 돌려 슈팅을 날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오른쪽 허벅지 뒤쪽을 푹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윽……!”
슈팅은 어처구니없이 빗나가 버리고, 발터는 통증 부위를 움켜잡은 채 주저앉았다.
점점 심해지는 통증에 그의 얼굴도 크게 일그러졌다.
“왜 저러지? 다쳤나?”
“부딪친 것 같진 않은데 어째서?”
서독 선수들이 당혹해하는 가운데, 시계를 보던 심판이 전반전을 종료시켰다.
하지만 선수들은 곧장 퇴장하지 않고 다친 발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발터 선배, 왜 그래요?”
“그게… 갑자기 허벅지 뒤쪽이… 으으윽!”
결국 서독의 팀 닥터가 오고 발터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잉글랜드 선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근육에 쥐가 난 건가?”
“아냐. 나도 예전에 저런 적 있었어. 멀쩡하게 뛰어가다 뭔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던데…….”
그때 준영의 입에서 정확한 부상 명칭이 튀어나왔다.
“햄스트링 파열 같아요.”
“햄스트링? 허벅지 쪽 근육 말이야?”
“네, 지나친 질주나 방향 전환 때문에 근육이 손상되는 거죠.”
21세기에 저 부상으로 애먹는 선수들을 많이 봤다.
올해 37살인 프리츠 발터 역시 방금 전 상황에서 너무 무리를 하다 부상이 일어난 것으로 보였다.
“그럼 서독은 후반전에 한 명 빠지게 되나?”
“아마 그렇겠죠.”
승리의 여신이 디펜딩 챔피언에게서 등을 돌린 모양.
잉글랜드 선수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
하프타임이 끝나고 양 팀 선수들이 다시 필드로 돌아왔다.
그런데 서독 진영에는 부상으로 이탈할 거라 예상했던 프리츠 발터가 그대로 후반에 출전했다.
‘붕대로 부상 부위를 감아 응급조치를 한 건가. 하지만 저 상태로는 오래 못 갈 텐데.’
최악의 경우 부상이 더 심각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건 선수 본인의 결정일까, 아니면 지도자의 강요일까.
준영은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야 어쨌든 상대는 자신이 막아야 할 적이었으니까.
‘불쌍한 아재이지만, 부상당했다고 해서 봐주지 않을 거야.’
준영은 막 에켈의 패스를 받은 발터에게서 태클로 공을 빼앗아 냈다.
곧바로 서독 쪽 관중들이 야유를 퍼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개자식! 겨우 부상을 참고 출전한 사람에게……!”
서독의 수비수 에리히 유스코비악은 발터를 쓰러트린 준영을 보고 이를 갈았다.
그는 발터가 당한 분풀이를 준영에게서 공을 건네받은 톰 피니에게 퍼부었다.
준영이 한 것과 똑같이 태클로 그를 쓰러트린 것.
“어디 오기만 해 봐. 죄다 작살내 줄 테니까!”
유스코비악이 단단히 벼르고 있는 가운데, 양 팀의 공방이 계속 오갔다.
그사이 프리츠 발터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슛은커녕 뛰는 것도 힘들어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서독이 공을 잡으면 어떻게든 공격에 가세하려고 애썼다.
‘이 대회가 내 마지막 월드컵이야. 다시 결승에 올라서… 거기서 더블 우승을 할 수 있다면!’
하지만 염원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스치마니악에게 가던 패스가 바비 찰튼에게 끊겼고, 이것은 재빨리 공격 가담을 하러 가는 준영의 발밑으로 전달되었다.
“덤벼, 원숭이 새끼야!”
준영이 공을 몰고 오자, 유스코비악이 과감하게 덤벼들었다.
그는 준영의 헛다리 짚기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공이 가는 쪽으로 먼저 어깨를 넣어 가로챘을 뿐만 아니라, 곧장 돌아서 역습을 시도했다!
‘이런, 그렇게 둘 순 없지!’
준영은 냉큼 유스코비악의 어깨를 잡아챘다.
바로 휘슬이 울릴 정도로 노골적인 파울.
역습을 차단하자면 어쩔 수 없었지만…….
“Bastard!”
퍽!
유스코비악이 다리를 걷어찼다.
준영으로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무에타이 공격이었다.
***
1. 독일 축구대표팀의 별칭은 디 만샤프트이지만, 국내 언론이나 축구 팬들은 전차 군단이라고 곧잘 부르곤 합니다. 정작 독일에서는 군국주의 냄새 난다고 싫어하는 별명이죠.
2. 프리츠 발터는 독일 축구대표팀 역사상 가장 뛰어난 5명의 주장 중 하나로 꼽히는 선수입니다.
스웨덴 월드컵 때는 한스 셰퍼에게 완장을 넘겨주고 원로(…) 노릇을 했는데, 실제 4강에서 경기 중 부상으로 이탈하는 불운을 맞았죠. 그 여파가 컸던지 다음 해 현역에서도 은퇴했습니다.
3. 에리히 유스코비악은 원래 공격수 출신이다가 수비수가 되면서 대표팀 감독 헤르베르거의 낙점을 받았습니다.
수비를 꽤 야무지게 잘해서 ‘망치’라는 별명이 있었다지요.
실제로 준결승에서 자신에게 파울을 한 쿠르트 함린에게 보복 행위를 했다가 퇴장당했습니다.
그 바람에 독일 축구대표팀 역사상 월드컵에서 처음 퇴장당한 선수로 기록에 남게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