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73. 장외 설전
‘꽤나 당돌한 놈이군.’
보고 싶다고 멀리 한국에서 찾아왔던 데는 결국 이런 목적이 있었던 것인가.
좀 어이없긴 하지만, 준영은 조윤옥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비슷한 또래 시절 무작정 유럽에 남아 입단 테스트를 하러 다녔던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
“왜 하필 나야? 한국에도 뛰어난 축구인들이 많을 텐데? 그러니까 김용식 선생님이나 최정민 선수 같은…….”
“형님은 구라파를 주름잡은 축구왕이시지 않습니까? 기왕 배울 거면 최고의 선수에게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윤옥이 이렇게 말하니 준영은 할 말이 없어졌다.
자신이 윤옥이라도 같은 생각을 했을 테니까.
“하나만 물어보자.”
“옙, 뭐든지 물어보십쇼.”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윤옥은 이어지는 질문에 찌그러지고 말았다.
“영국에 오는 데 부모님 허락은 받았냐?”
“그, 그게…….”
우물쭈물하는 꼴을 보니 집에서 가출하다시피 뛰쳐나온 모양.
짧게 혀를 찬 준영은 다시 물음을 건넸다.
“영국까진 어떻게 온 거야?”
“그게… 옆집 아저씨가 시내에 자주 다니는 구둣방이 있는데, 거기 사장님이 알게 된 영국 사업가가 형님과 절친하단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까 조셉에게 묻어 왔다 이거구만.”
조셉은 무슨 생각으로 이 녀석을 데려온 건지!
자칫하면 납치범 누명을 덮어쓸 수 있지 않은가.
“긴말할 필요는 없겠군. 일단 따라와.”
“네, 넵!”
준영은 윤옥을 데리고 캠프의 연습 구장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어제 경기에 뛰지 않은 선수들이 자유롭게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그들에게서 준영은 공을 하나 받아 냈다.
그리고 그걸 윤옥에게 건넸다.
“해 봐.”
“뭘 말입니까?”
“리프팅이든 드리블이든 한번 해 봐.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가르쳐 주든 말든 하지.”
그러자 윤옥은 곧바로 자신의 기량을 준영에게 보였다.
호기심이 든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들도 발을 멈추고 구경을 했다.
“저 동양인 꼬마는 누구지?”
“존의 친척인가?”
“하나도 안 닮았잖아. 덩치도 작고.”
“공 다루는 걸 보니 축구를 배우긴 한 모양인데…….”
주변에서 이리저리 떠드는 가운데, 준영은 묵묵히 윤옥의 개인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아마추어 수준이군.’
공을 제법 다룰 줄 알지만, 21세기는 물론 이 시대의 유럽 유소년 선수들과 비교해도 다소 기량이 떨어져 보였다.
물론 아시아에서는 뛰어난 수준일 것이다.
거기다 양발을 잘 쓰고 전체적인 밸런스도 좋아 보였다.
“앗, 왜 그러십니까?”
“뺏기지 마. 나한테 공 뺏기면 탈락이야.”
지켜보고만 있던 준영이 공을 빼앗을 것처럼 달려들자, 윤옥은 황급히 공을 갖고 도망쳤다.
그 뒤를 준영이 곧장 쫓아갔다.
‘어쭈, 투박하게 생긴 거랑 다르게 순발력과 스피드는 제법 빠르네.’
거기다 공에 대한 집중력이 뛰어났다.
눈에 확 띌 정도로 기술이 대단치는 않았지만, 집중력이 좋기 때문인지 실수는 없었다.
“드리블은 그럭저럭이군. 저기 골대 있지? 슛 한번 해 봐라.”
준영이 후보 골키퍼가 우두커니 서 있는 골대를 가리켰다.
윤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슈팅을 날렸다.
동양인 애송이, 그것도 아마추어 수준.
그렇게 보고 있던 후보 골키퍼는 빠르고 날카롭게 하단 구석으로 날아가는 슈팅을 보곤 깜짝 놀랐다.
그 슈팅을 가만히 보고 있던 준영이 물었다.
“너 공격수냐?”
“예, 학교에서 주전 공격수를 맡고 있습니다.”
“학교? 어느 학교 축구부인데?”
“동북고 축구부입니다.”
“진짜?”
준영은 깜짝 놀랐다.
동북고 축구부는 유명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 팀이었으니까.
준영의 대표팀 선배 손웅민만 해도 동북고 출신이었다. 물론 유럽에 간다고 중퇴했지만.
‘어쩌면 지금 한국에서 유망주로 손에 꼽힐 만한 수준일지도 모르겠군.’
분명히 비슷한 또래의 데니스 로나 알렉스 퍼거슨에 비할 수준은 못 된다.
하지만 특기와 개성을 살려 주면 앞으로 잘 발전해 나갈 것 같았다.
“괜찮은 실력이야. 내가 한두 수 가르쳐 주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먼저 부모님 허락을 받아 와.”
꽤 벅찬 조건이었는지, 윤옥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집에 알려지면 당장 회초리와 몽둥이를 푸짐하게 얻어맞게 될 테니까.
“전화나 편지 이런 건 안 돼. 왕복 비행기 값을 줄 테니까 반드시 집에 돌아가서 허락받고 와.”
“꼬, 꼭 그래야 합니까?”
“집에서 나온 지 한참 되었지? 아마 지금쯤 너희 부모님은 속이 새까맣게 탔을 거다. 여기에 동의?”
“동의… 합니다.”
한숨을 푹 내쉬던 조윤옥.
그러다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준영에게 말했다.
“반드시 설득해서 허락을 맡아 오겠습니다. 그러니 형님도 간략하게 서신을 써 주십쇼!”
“편지? 무슨 편지.”
“그러니까 얘 쓸 만하다, 곁에 두고 키워 주고 싶다 등등……. 그런 내용이 있으면 부모님을 잘 설득시켜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쭈, 이놈 보소.’
투박하게 생긴 것과 달리 제법 영악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사실 준영은 조윤옥이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 돌아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이었다.
녀석은 분데스리가 갈색 폭격기 차범곤이나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에서 뛰었던 허정우 같은 검증 자원은 아니니까.
그만큼 곁에 두고 키워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녀석의 언행을 보면 그 검증 자원들만큼 흥미는 간단 말이지.’
당돌하면서도 뻔뻔한 구석이 있다.
이 정도 배짱이나 영악한 점을 미루어 보면, 실전에선 더 뛰어난 활약을 해 줄지 모른다.
“오냐, 알았다. 편지 한 장 써 주는 거야 일도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형님!”
“너무 좋아하지 마. 나중에 후회할 수 있다고.”
기왕 받아들이게 된다면 알뜰살뜰하게 굴려 주리라.
공포의 삑삑이를 비롯해 21세기에서 악명 높은 훈련들을 총동원해서 말이다.
‘크크크, 그래야 검증 자원들만 한 선수가, 레전드가 키운 레전드 플레이어로 남을 테니까 말이야.’
축구왕 이준영에게 인정받은 게 기뻤던 조윤옥.
그는 준영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앞길에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디 만샤프트(Die Mannschaft).
그들은 지난 스위스 월드컵 때 매직 마자르를 물리치고 왕좌에 오른 디펜딩 챔피언이다.
서독은 헬무트 란의 결승 골로 유고슬라비아를 1 대 0으로 꺾고 4강에 올랐다.
그리고 결승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상대는 축구 종가 잉글랜드.
지난 대전에서 적대국이었던 두 나라는 경기 전 인터뷰부터 불꽃을 튀겼다.
“잉글랜드의 4강 진출을 축하합니다. 이제 귀국해도 충분한 자랑거리가 될 겁니다.”
잉글랜드는 4강에서 탈락.
서독 감독 요셉 헤르베르거의 도발에 윈터보텀 감독이 곧바로 받아쳤다.
“헤르베르거 감독님은 벌써 결승 생각을 하시는 모양이군요. 도버 해협을 넘지도 못했으면서 동부 전선으로 달려갔던 나라의 감독님답습니다.”
너네 설레발치다 망하지 않았느냐.
덮고 싶은 흑역사를 일깨운 이 발언에 서독 기자들은 부들부들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윈터보텀 감독보다 더 과격한 발언을 한 사람도 있었다.
“리 선수는 홍콩 출신이라지요? 아시아에서는 지난 대회 독일의 기적적인 우승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준영의 대답에 질문을 날린 서독 기자가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일그러지고 말았다.
“아시아에선 약 빨고 경기에 나가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거든요.”
“뭐, 뭐라고?”
준영의 발언에 서독에서 온 기자들이 발끈하고 나섰다.
“감히 무슨 망발을……!”
”리 선수! 당신은 지금 푸스카스가 흘린 루머를 믿고 있는 겁니까?”
벌 떼 같은 항의에 준영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하프타임 때 주사를 맞은 건 사실 아닙니까.”
“그, 그건…….”
지난해 말, 스페인에 있는 페렌츠 푸스카스가 언론에 폭로한 사실이 있었다.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 당시 서독 선수들의 눈이 풀려 있었고, 경기가 끝난 후 그들의 라커룸에서 빈 주사기를 발견했다고 말이다.
이에 대해 당시 서독의 팀 닥터였던 프란츠 루겐은 투약한 사실이 있다며 시인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포도당 주사였을 뿐입니다. 터무니없는 억측은 삼가십시오!”
‘포도당은 개뿔. 히로뽕이었잖아, 개시키들아!’
베른의 기적에 대한 진실은 아직까지 소문만 무성할 뿐, 아직 제대로 된 증거나 증언이 나오진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도둑이 괜히 제 발 저린 건 아닌지, 독일 기자들은 버럭버럭 역정을 냈다.
“솔직히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리 선수가 의심스럽습니다.”
“의심스럽다니? 내가 약 맞고 경기한다 이겁니까?”
“아시아는 유럽보다 스포츠 수준이 뒤떨어진 게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유럽 선수들보다 뛰어난 체격을 가진 선수가 나올 수 있는 건지……?”
“이봐요, 당신네 나라에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가 누군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합니까?”
반박하던 서독 기자의 말문이 냉큼 닫히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그 ‘손’이라는 마라토너도 존 Y. 리와 같은 한국계였다.
이렇게 자폭한 서독 기자에게 비웃음을 보이던 영국인 기자 하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딜런 워드입니다. 리 선수는 준결승에서 어느 포지션으로…….”
“잠깐, 딜런 워드라고요?”
“그렇습니다.”
“날더러 사무라이 드립 치신 분 맞죠? 그렇죠?”
“예, 맞습니다만.”
딜런 기자는 준영이 무슨 뜻으로 ‘Drip’이란 단어를 썼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뭔가 거북하게 여기고 있음은 눈치챘다.
“왜 그랬어요? 왜 그런 표현을 쓴 겁니까?”
“그야 사무라이는 강하고 신비한 이미지를 가진 동양의 전사라서 리 선수와 어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사무라이 놈들은 제 모국에 쳐들어와서 무덤을 도굴하고 사람들의 귀와 코를 잘라 갔습니다. 강하고 신비하면 기자님을 나치 SS 같다고 해도 되겠습니까?”
딜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르고 쓴 게 사실이다 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줄 것은 무엇인가.
‘제길, 잘나간다고 아주 콧대가 하늘까지 솟구쳐 올랐군!’
언제까지 잘할 수 있나 보자.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면 포대처럼 탈탈 털어 주리라!
무안을 당한 기자들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든 말든 이후에 몇 차례 질문에 더 응답한 준영은 인터뷰를 끝내고 윈터보텀 감독과 함께 발길을 돌렸다.
“거참, 큰소리를 친 만큼 결과가 좋아야 하는데 말이야.”
“걱정 마십쇼. 이제 리그 득점왕도 회복했으니까요.”
지난 시즌 38골을 넣어 득점왕에 올랐던 토트넘의 로버트 A. 스미스.
발목 부상 여파로 이번 대회 내내 결장했던 그가 드디어 출격 준비를 마쳤다.
더구나 고질적인 사타구니 부상으로 컨디션 난조에 시달리던 톰 피니 역시 회복 완료.
공격진에 중량감이 더해졌으니, 상대가 디 만샤프트라 하더라도 충분히 맞붙을 만했다.
“두고 보십쇼. 집으로 가는 건 그놈들이 될 테니.”
윈터보텀 감독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신만만한 준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일 경기가 더욱 기다려졌다.
***
동북고 축구부는 개교하고 1년 후인 1954년에 창단되었습니다.
강인한 체력과 불굴의 기백을 목표로 하는 이 팀에서는 한국 축구에서 유명한 선수들이 정말 많이 배출되었죠.
이회택, 홍명보, 김은중 등등.
손흥민 선수도 입학하고 반년 정도 있었는데, 발이 빨라서 총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하네요.
현역으로 뛰고 있는 K리그 선수 중에는 양동현(수원 FC) 선수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박주영보다 기대했던 선수였는데, 그놈의 부상이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