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72화 (172/400)

Round 172. 스타 탄생

후반 37분에 터진 이준영의 역전 골.

리드를 잡은 잉글랜드는 바로 수비를 강화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라인을 내리지는 않았고, 오히려 다급해진 스웨덴의 뒷공간으로 역습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그 역습의 선봉장은 동점 골의 주인공인 바비 찰튼이었다.

“망할, 저 금발 애송이는 어떻게 된 놈이야?”

“폐가 3개라도 되나? 어떻게 지치지도 않는 거지?”

왕성한 체력을 자랑하는 바비는 경기가 끝나 갈 무렵임에도 불구하고, 경기 시작 때와 다르지 않은 빠르고 힘찬 질주를 보여 주었다.

오히려 뒤쫓아 가던 스웨덴 수비수가 발이 꼬여 넘어질 정도.

“단독 찬스다!”

“좋아, 끝장내라!”

바비가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잡는 것을 본 준영과 잉글랜드 선수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기서 추가 골을 넣으면 사실상 경기는 종료.

그러나 바비가 힘차게 찬 슈팅은 골대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아, 이런 실수를…….”

“힘이 너무 들어갔어. 차라리 나한테 패스를 하지.”

핀잔을 주는 바비 롭슨의 입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방금 전에 그 역시 노마크였던 데다 공만 오면 툭 차 넣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으니까.

“이봐, 애송이 찰튼, 내일 내가 슈팅 훈련을 지도해 줄 거니까 각오하라고.”

“네. 잘 부탁드립니다, 롭슨 선배.”

아쉽게 기회를 놓쳤지만, 리드해 가고 있었기에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준영이나 빌리 라이트 등 수비수들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디! 리드홀름이 측면을 노리고 있으니까 조심해!”

“함린에게 패스를 가게 하지 마!”

“간격! 수비 간격 유지하라고!”

잉글랜드 선수들은 쉴 새 없이 소리를 지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에 반해 스웨덴 선수들은 말을 나눌 겨를도 없었다.

어떻게든 박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거나 슈팅을 날리는 데 급급했다.

“급하게 하지 마! 공을 아껴!”

“움직여, 레나트! 잉글랜드를 저녁 식사로 삼겠다며?”

주장인 닐스 리드홀름과 고참인 군나르 그렌이 동료 선수들에게 연방 지시를 내리고 독려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마음이 급한 그들에게 와닿지 않았다.

그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잉글랜드에게는 느리고, 스웨덴에게는 너무나 빠르게.

“아아, 제발! 누구라도 동점 골을 넣어 줘!”

“힘내, 함린!”

초조함이 극에 달한 홈팬들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다 시계도 멈추고, 심판도 슬슬 휘슬을 입에 가져가던 그때.

군나르 그렌이 필사의 힘을 짜내 중거리 슛을 날렸다.

‘무, 무회전……!’

준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회전에 가까운 그 슈팅을 맥도널드 골키퍼는 제대로 잡지 못하고 흘려 버렸다.

그리고 그 공을 향해 함린이 한 마리 제비처럼 몸을 날렸다.

“들어가라!”

태클을 하듯이 함린이 밀어 넣은 공은 골키퍼의 겨드랑이를 억지로 비집고 골문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하지만 라인을 넘기 직전에 달려든 준영이 멀리 걷어 내 버렸다.

삐익- 삑!

마침내 경기 종료!

4강 진출에 성공한 잉글랜드 선수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스웨덴 선수들은 허탈감에 너 나 할 것 없이 주저앉거나 드러누웠다.

“여기서 탈락이라니…….”

“매직 마자르도 이겼는데… 선제골도 먼저 넣었는데!”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던 준영은 주저앉은 함린에게 다가가 다독이며 일으켜 주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 너희 팀, 정말 강했으니까.”

빌리 라이트나 바비 찰튼 등 다른 잉글랜드 선수들도 스웨덴 선수들을 위로해 주었다.

“젠장, 이번엔 내가 멍청했어! 다음엔 맨정신으로 붙어 보자고!”

“기대하지, 주정뱅이 양반.”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악수를 나누는 양 팀 선수들.

아쉬운 표정이 가득한 홈팬들은 그들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 주었다.

***

스톡홀름에서 잉글랜드가 승전고를 올리고 있을 즈음.

서쪽의 예테보리 울레비 경기장에서 맞붙은 브라질과 웨일스는 연장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후반을 0 대 0으로 결판을 내지 못했기 때문.

“끈질긴 놈들이군. 웨일스가 저런 저력을 가진 팀일 줄이야.”

“마치 우릴 속속들이 아는 느낌이었어.”

브라질은 비교적 쉬운 경기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홈팀인 스웨덴을 피했고, 상대 주포 윌리엄 존 찰스가 부상으로 8강전에 빠졌기 때문.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웬걸.

웨일스는 끈덕진 수비를 펼치며 정규 시간 동안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단지 수비만 하지 않고 간헐적으로 역습을 펼쳤는데, 공격수의 기량이 뛰어났으면 큰일 날 뻔한 상황들도 있었다.

웨일스 선수들, 특히 그 기회를 놓친 당사자는 땅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아, 내가 리틀 존 그 녀석의 절반만 되었더라면 좋았을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웨일스 대표팀에 선발된 공격수 콜린 웹스터는 좀 전에 놓친 기회가 머리에서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기막힌 패스를 받아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만들었는데, 너무 성급하게 처리하려다 선방에 막히고 말았다.

그것만 넣었다면 승리의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었을 텐데!

“콜린, 잊어버려. 지나간 건 어쩔 수 없어.”

지미 머피 코치, 아니 감독이 그의 심정을 눈치채고 위로해 주었다.

“공격수는 단 하나만 성공해도 스타가 될 수 있어. 알겠나? 단 하나면 돼!”

“명심하겠습니다.”

콜린은 이를 악물고 필드로 나갔다.

오늘 그는 부상당한 윌리엄 존 찰스의 대타로 출전했다.

자신도 존 찰스 못지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세리에 A 같은 해외 무대로 진출해서 마음껏 기량을 펼치고 싶었다.

‘할 수 있어! 분명히 기회가 올 거야!’

연장전이 시작되자 콜린은 남은 체력을 짜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하지만 공격 점유율이 브라질에 기울어져 있어 공을 잡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나마 잡은 공도 상대 풀백 니우통 산투스에게 빼앗겨 버렸다.

“잡아! 돌파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

“절대 통과시키지 마!”

웨일스 선수들의 태클과 차징을 절묘하게 피해 낸 산투스는 측면에 있던 가린샤에게 패스를 보냈다.

몸을 흔드는 페인팅으로 수비수를 교란하던 가린샤는 갑자기 공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뭐야? 무슨 수작이지? 빼앗을 테면 빼앗아 보라 이건가?’

발끈한 수비수가 달려든 순간, 공을 가볍게 툭 친 가린샤가 그를 순식간에 제쳐 냈다.

그리고 중앙으로 쇄도하는 바바를 바라보며 빠르게 컷백을 찔러 주었다.

“아, 안 돼!”

웨일스 센터백은 바바의 발이 공에 닿지 않게 사력을 다해 밀어냈다.

하지만 밀려나고도 바바는 도리어 웃음을 지었다.

대표팀의 깜찍한 막내 펠레가 뒤이어 쇄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

“빌어먹을, 사각에서 튀어나오다니!”

웨일스 골키퍼가 서둘러 각을 좁힌 그 순간, 펠레는 자신의 앞으로 굴러온 공을 뒤쪽 발뒤꿈치로 완전히 방향을 바꿔 골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런 제길…….”

황급히 수비에 가담하러 왔던 콜린은 이미 끝나 버린 상황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 춤을 추며 골 셀레브레이션을 펼치는 펠레의 모습이 보였다.

리틀 존이 머피 감독에게 몇 번이나 강조해서 주의를 주었던 브라질의 괴물 꼬마.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미래의 축구 황제.

그가 스타가 된 순간을 콜린은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스웨덴과 경기를 끝내고 예테보리로 돌아온 다음 날.

준영은 잉글랜드 대표팀 캠프에 비치된 영자 신문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잉글랜드 사상 첫 4강 진출, 역전 골의 주인공은 동양의 거인 사무라이 존 Y. 리…….”

골을 넣고 포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미소 짓던 준영은 이어지는 타이틀의 글을 보고 눈썹을 휘었다.

“어떤 새끼가 기사를 쓴 거야? 사무라이? 참 나, 내가 일본 놈인 줄 알아?”

기분이 제대로 잡쳤다.

준영은 기사를 쓴 딜런 워드란 기자 놈의 이름을 기억해 뒀다.

나중에 만나면 폭풍같이 까 주리라 다짐하면서.

해당 신문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은 준영은 다른 신문을 펼쳤다.

새로운 신문에는 양 팀 선수들이 사이좋게 물을 나누어 마시는 광경이나, 경기 후 악수를 나누는 사진 등이 실려 있었다.

그러면서 올바른 스포츠맨십이라며, 이를 선도한 준영을 호평해 주었다.

구겨진 표정을 말짱하게 편 준영은 다음 기사를 읽어 나갔다.

“브라질, 연장전 끝에 웨일스에 신승이라…….”

브라질이 이겼다는 건 어제 예테보리에 돌아와 웨일스 대표팀을 만났을 때 들었다.

아쉬워하다 못해 자책하는 콜린을 바비와 함께 한참 동안 달래 줘야 했다.

‘펠레가 연장 전반 7분에 결승 골을 넣었구나. 그가 결승 골을 넣은 건 역사대로야. 하지만 실제로 연장전까진 안 갔을 텐데?’

브라질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알려 주며 개입했기 때문일까.

브라질이 승리한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약간의 변동이 다음 경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존, 밖에 손님이 찾아왔어요.”

룸메이트 바비 찰튼이 방에 들어와서 한 말에 준영은 신문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 누군데?”

“나가 보면 알 거예요.”

씩 웃음을 짓는 바비의 반응에 혹시 하는 생각이 든 준영.

그는 냉큼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준, 나 왔어요!”

“하하, 역시 리즈였구나!”

예쁘게 단장한 리즈를 본 준영은 한걸음에 달려가 덥석 끌어안았다.

격한 환영 허그에 약간 당황했던 리즈는 이내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뉴스 들었어요. 준이 골을 넣어서 개최국에게 이겼다죠?”

“응, 이 기세면 결승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대회 끝날 때까지 준을 응원하면 되겠네요.”

“하하, 우리 여왕님이 응원해 주신다면 엄청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아 참, 근데 대입 시험은?”

“잘 치렀어요. 진학할 대학도 정했고.”

“잘됐네, 잘됐어!”

준영은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리즈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고 다음 목표인 입술을 노리려는 순간, 뒤통수가 몹시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알버트가 지그시 노려보고 있었다.

그 뒤에는 앤지와 카린이 키득거리며 지켜보는 중이고.

“아, 다들 같이 왔군요.”

“그랬지. 리즈가 어찌나 서둘러 발길을 재촉하는지, 좀 뒤처지고 말았어. 근데 자넨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구먼?”

“하하하, 그럴 리가요.”

약간 찔끔했던 준영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곧장 알버트에게도 가볍게 환영 허그를 했다.

“오빠야, 나도! 나도!”

“응, 카린도 잘 지냈어?”

준영이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카린을 도닥여 주었을 때, 앤지는 자신들과 함께 온 일행을 소개해 주었다.

“언니에게 연락받은 적 있지? 존을 만나러 온 한국인이야.”

“얘가 말이야?”

“존을 무척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 데려왔어.”

준영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소년을 바라보았다.

영화에서 보던 까만 학생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소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준영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조윤옥입니다. 준영 형님을 뵙고 싶어 한국에서 왔습니다.”

‘조윤옥?’

분명 예전에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

준영이 기억을 뒤지고 있을 때, 조윤옥이 갑자기 넙죽 절을 했다.

“형님께 축구를 배우고 싶습니다! 부디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뭐?”

너무나 갑작스러운 요청에 준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유상철이란 선수를 처음 알게 된 건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축구 한일전에서였습니다.

그리고 4년 후, 그는 나락까지 떨어진 한국 축구에 한 줄기 희망이 되는 동점 골을 넣었고, 2002년 마침내 월드컵 첫 승을 확정 짓는 골을 넣어 주었습니다.

당시 홍명보, 서정원 선수와 더불어 해외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선수였지요.

심지어 FC 바르셀로나에서 관심을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울산 현대 올드팬들에게는 90년대에 김현석, 김병지 선수와 함께 당시 팀을 대표하는 스타 선수였습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역 시절 좀 더 성원해 주지 못한 것이, 그리고 그가 보여 준 놀라운 활약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한 게 그저 미안할 따름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편히 쉬세요.

우리 시대 희망을 보여 준 레전드 플레이어 유상철, 당신의 투혼을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