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70화 (170/400)

Round 170. 경계 대상 1호

‘나이스 패스!’

준영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떨어지는 공을 잡아챘다.

“오오-!”

공중에서 뚝 떨어진 공을 아무런 반동 없이 트래핑하는 솜씨에 관중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준영을 마크한다고 접근해 왔던 뱅트 구스타프손은 감탄과 동시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렇게 깔끔하게 공을 다루고 곧장 플레이를 이어 나갈 줄은 몰랐으니까.

‘덩치도 큰 놈이 뭐가 이렇게 잽싼 거야?’

단순히 몸놀림만 빨라서 되는 움직임이 아니다.

판단력이 빠르니 자연히 몸놀림에도 주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섣불리 태클을 하다간 놓치고 말아. 그러니까… 이런!’

최대한 바싹 붙어 봉쇄한다고 마음먹는 순간, 준영의 발밑에 있던 공이 어느새 사라졌다.

슬쩍 돌파하는 척하다 발뒤축으로 흘린 공은 때마침 측면으로 내달리는 바비 롭슨의 앞으로 정확히 전달되었다.

공을 몰고 갔던 롭슨은 수비수가 접근하기 직전 문전을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때마침 뛰어들던 데릭 케반이 머리를 댔다.

하지만 그 헤딩슛은 스웨덴 골키퍼 칼레 스벤손의 정면으로 날아가 버렸다.

“와, 위험했어.”

“헤딩슛이 정면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꺾였다면…….”

“정신 차려! 좀 더 바싹 붙어 막으라고!”

놀란 관중들의 성화에 스웨덴 선수들은 굳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잉글랜드의 공격이 생각보다 빠르게 전개되었기 때문.

“뱅트, 그 동양인 좀 더 확실하게 마크해.”

주장 리드홀름의 말에 뱅트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위기 상황은 동양인이 측면에서 내준 패스로 야기되었기 때문.

‘주장의 팀도 유러피언 컵에서 저 녀석에게 한 방 얻어맞고 패했다고 했지? 좀 더 마크를 바싹 붙지 않으면……!’

골킥으로 다시 경기가 재개되면서 뱅트는 준영의 뒤를 쫓아갔다.

공이 오면 곧장 대응할 수 있도록 항상 일정 거리를 두고 붙어 다녔다.

‘꽤 성가시게 구는군. 하지만 나쁘진 않아. 나한테 발목이 잡힌 셈이니까.’

지난번 통화에서 머피 코치가 말했다.

뱅트 구스타프손은 패스 능력도 뛰어나다고.

역습 상황에서 상대 선수의 견제를 뿌리치고 미드필드 지역으로 공을 전달하거나, 최전방으로 직접 롱 패스를 건네주는 것도 잘한다고.

‘한마디로 빌드업에 뛰어난 수비수라는 거지.’

나 때문에 스웨덴의 공격 수단 하나가 막히면 그것으로도 우리 팀에는 이득.

그렇게 판단한 준영은 이후에도 뱅트가 자신의 견제를 그치지 않게끔 유도성 플레이를 계속해 나갔다.

물론 찬스가 오면 슈팅을 날린 것은 물론이었다.

***

전반전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갔다.

스코어는 여전히 0 대 0.

준영의 예상대로 스웨덴은 수비에 성공한 후에도 빠른 역습 전개에 나서지 못했다.

중원에서 바비 찰튼이 활발하게 저지하고 나선 덕분에 여전히 군나르 그렌과 닐스 리드홀름의 패스도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결국 스웨덴이 노릴 수 있는 것은 다소 마크가 헐거운 측면을 노리는 것뿐이었다.

더구나 스웨덴 좌우 측면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윙어들이 있었다.

“아, 머리 아파. 토할 것 같기도 하고…….”

경기가 생각만큼 풀리지 않자 레나트 스코일룬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런 얼굴과 달리 공을 다루는 두 발은 아주 활발하게 잘 움직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옥수수처럼 휘청이던 레나트는 에디 클램프의 차징을 능숙하게 흘려 내며 측면을 내달렸다.

코너 플래그 부근까지 달려갔던 그는 곧장 잉글랜드 문전으로 공을 올려 보냈다.

빠르고 날카로운 크로스.

떨어지는 공을 향해 스웨덴의 젊은 공격수 아그네 시몬손이 달려들었다.

조 예선 멕시코와의 경기에서도 2골을 터트리며 3 대 0의 완승을 견인했던 시몬손.

스웨덴 관중들은 그가 이 기회에서 시원스럽게 골망을 흔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공은 그의 머리에 닿기 직전, 콜린 맥도널드 골키퍼의 손을 맞고 골대 위로 넘어가 버렸다.

퍼억-!

“아아악!”

뒤이어 벌어진 골키퍼와 공격수의 충돌.

꽤 심하게 부딪쳤던지 둘 다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양 팀 팀 닥터들이 필드로 오르고, 황급히 달려온 준영은 빌리 라이트에게 상황을 물었다.

“많이 다친 겁니까?”

“아니, 심하지 않으니까 잠시 숨 좀 돌리면 괜찮아질 거야.”

팀 닥터들이 두 선수를 살펴보는 사이, 준영과 잉글랜드 선수들은 골대 옆에 마련된 가방에서 물을 꺼내 잠시 목을 축였다.

그 광경을 스웨덴 선수들은 물론, 주심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긴 지금은 경기 중에 물을 마시지 않으니까.’

21세기에는 더울 때는 쿨링 브레이크까지 정해 놓고 선수들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만, 이 시대에는 그런 룰이 없었다.

준영도 처음에는 이상하게 여기다 쉬이 적응이 안 돼서 골키퍼에게 물통이 든 가방을 맡겨 경기 중에도 목을 축일 수 있게 했다.

맨유에서도 그랬고, 잉글랜드 대표팀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혹시 규정 위반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지만, 잠시 목을 축이는 걸 금지하는 심판은 없었다.

그것은 오늘 판정을 맡은 니콜라이 주심도 마찬가지였다.

“드시겠습니까?”

준영이 물통을 건네자, 니콜라이 주심은 냉큼 받아 들었다.

저녁 시간 경기라 선선했지만, 그래도 뛰어다니다 보면 목이 말랐으니까.

“이봐, 우리도 줘.”

“치사하게 너희들만 마시지 말라고.”

목이 타는 건 스웨덴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던지, 잉글랜드 선수들에게 물을 얻어 마셨다.

그렇게 양 팀 선수들이 사이좋게 물을 나눠 마시는 광경이 흐뭇하게 보였던지 관중석에서는 박수가 쏟아졌다.

“쩝, 맹물이잖아. 럼이나 브랜디라도 좀 탈 것이지…….”

“레나트, 얻어 마시면서 투덜대지 마!”

리드홀름의 꾸중에 레나트는 입을 쭉 내밀었다.

다행히 맥도널드 골키퍼와 시몬손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기에 경기는 재개되었다.

코너킥을 맡은 레나트는 수비에 가담하고 있는 준영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시몬손이라도 저렇게 큰 놈을 상대론 헤딩을 따내기 힘들겠지.”

안 그래도 저 동양인은 유러피언 컵에서 압도적인 공중 장악 능력과 수비력을 보여 준 걸로 유명했다.

유럽 최강팀으로 군림했던 레알 마드리드조차도 꼼짝없이 당했을 정도.

‘그러니 높은 크로스는 웬만하면 힘들고, 낮고 빠르게 가야 한다는 건데…….’

레나트가 잠시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빨리 처리하라는 듯 주심이 호각을 불렀다.

“그래, 역시 그렇게 해야겠군.”

결정을 내린 레나트는 곧장 코너킥을 날렸다.

높지만 심상찮은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코너킥에 준영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내심 그렇게 외친 건 골키퍼 맥도널드도 마찬가지.

그는 골대 왼쪽 상단 구석을 향해 떨어지는 크로스, 아니 슈팅을 보고서 손을 뻗었다.

손끝에 간신히 닿은 슈팅을 맥도널드는 사력을 다해 밀어냈다.

덕분에 골대로 떨어지던 공은 튕겨 나갔다.

‘살았다!’

맥도널드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 순간,

수비수 도널드 하우의 배후에서 침투한 쿠르트 함린이 떨어지는 공을 향해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공은 그대로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골이다! 골!”

“함린이다! 함린이 해냈어!”

신나게 골 셀레브레이션을 하는 스웨덴 선수들, 그리고 환호성을 내지르는 관중들 덕분에 로순다 스타디움은 크게 들썩였다.

이 와중에 조용한 건 잉글랜드 팀과 소수의 응원단뿐.

준영은 골을 넣은 함린 앞에서 으스대는 레나트를 노려보았다.

‘슛이 정확하단 얘기를 듣긴 했지만, 코너킥을 슛으로 노리고 찰 줄이야!’

맥도널드가 간신히 막아 냈지만, 함린의 쇄도를 막아 내지 못했다.

레나트의 바나나킥, 아니 크로슛에 다들 놀라 굳어 있었기 때문.

‘어쨌거나 경기 흐름은 스웨덴에 넘어가 버렸어. 얼른 되돌리지 않으면……!’

선제골을 내주면서 맞이한 어려운 상황.

하지만 준영은 침착하게 경기하려 애썼다.

여기서 멘탈을 다잡지 않으면 진짜 경기가 꼬여 버리고 말 테니까.

***

“Sverige! Sverige!”

스웨덴 관중들의 함성이 우레같이 울려 퍼졌다.

선제골을 넣은 김에 추가 골까지 넣어 주기를!

그런 관중들의 마음에 부응하기 위해 스웨덴 선수들은 거칠게 잉글랜드를 몰아붙였다.

“달려! 달려라, 함린!”

“그래, 거기서 패스! 슈웃-!”

측면을 파고들어온 함린의 컷백을 아그네 시몬손이 다이렉트 슛을 날렸다.

하지만 급하게 날린 슈팅은 중심을 잘못 잡는 바람에 허공으로 솟구치고 말았다.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런 상황은 좋지 않다는 걸 빌리 라이트는 잘 알고 있었다.

“정신 차려, 돈! 도대체 몇 번이나 더 당할 셈이야!”

빌리의 호통에 도널드 하우는 쩔쩔맸다.

“죄송해요, 주장. 저 함린이란 놈이 너무 빨라서……. 다음에는 반드시 막겠습니다.”

“그래, 제발 그렇게 해 줘.”

어떻게든 이 위기 상황을 잘 넘겨야 한다.

1 대 0이 2 대 0으로 되면 더욱 힘들어지게 되니까.

‘부탁한다. 어떻게든 빨리 득점을… 아니, 저 바이킹 놈들 기를 죽일 만한 슈팅을 날려 줘!’

빌리의 애원을 듣기라도 한 것일까.

골키퍼가 길게 찬 공을 잡아 낸 준영이 과감하게 단독 돌파를 시도했다.

뱅트가 곧장 마크에 나서자, 그는 스텝 오버, 헛다리 짚기로 제쳐 냈다.

깜짝 놀란 뱅트는 허겁지겁 쫓아가서 태클을 날렸다.

하지만 주춤하던 준영이 턴을 돌면서 그 태클마저 피해 냈다.

“저, 저거!”

“막아! 슈팅을 날릴 거다!”

주변에 있던 스웨덴 선수들이 준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터진 슈팅은 골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구석을 노리고 살짝 휘어 찬 슈팅은 골키퍼 칼레의 손을 맞고 골대를 넘어갔다.

아찔했던 상황에 관중들은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우와, 방금 그거 봤어?”

“응, 뱅트를 아주 농락해 버리던데.”

“디 스테파노를 잡은 놈이라더니, 괜히 경계 대상 1호가 아니구만.”

관중들의 우려 섞인 함성과 동료들의 쑥덕임에 뱅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방금 전엔 진짜 망신을 당했다.

상대의 개인기에 농락당해 넘어졌을 뿐만 아니라, 허겁지겁 쫓아간다고 거의 짐승들처럼 네발로 기었다.

그런데 그렇게 쫓아가서 날린 태클도 허사.

정말 골로 연결되었다면 얼굴도 못 들 뻔했다.

‘빌어먹을,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겠다!’

이 존 Y. 리라는 동양인은 신장에 걸맞게 헤딩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앞서 있었던 코너킥 상황에서도 헤딩슛을 만들어 냈다. 악착같이 경합한 덕분에 득점까지 연결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확실히 눌러 주겠어! 문전에서 설칠 마음이 들지 않도록!’

조니 헤인스가 코너킥을 준비하는 가운데, 준영은 페널티 박스 외곽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마 코너킥이 올라오면 쇄도하면서 헤딩슛을 시도할 터.

뱅트나 스웨덴 선수들은 다들 그리 생각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파앙-!

조니 헤인스의 코너킥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공이 날아든 곳은 박스 중앙이 아닌 준영이 있는 외곽.

‘외곽에서 슛을?’

준영이 가슴으로 받은 공을 발치에 떨어트리자, 뱅트와 수비수들은 우르르 몰려들었다.

태클 혹은 육탄 방어로 슈팅을 막아 낼 생각이었던 것.

“낚였네. 만선이네~”

히죽 웃음을 지은 준영은 공을 살짝 띄워 측면으로 보냈다.

그 공은 박스 밖에서 공격에 가담한 바비 찰튼의 앞으로 전달되었다.

바비가 주저 없이 날린 슈팅은 세차게 그물을 흔들었다.

***

마신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실제 경기 중에 물을 마시는 경우엔 갈증만 없앨 정도로 입에 머금고 있다 뱉는 게 일반적입니다.

속에 뭔가가 든 상태로 뛰어다니면 거북하니까요.

요즘은 경기 중에 선수들이 마실 물을 팀에서 준비하곤 하지만, 예전에는 선수들이 각자 준비했었습니다.

지금은 은퇴한 일본 골키퍼 가와구치 요시카쓰도 현역 시절 경기 중에 자신이 마실 물을 따로 준비해 두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일전 할 때, 그 물을 최용수 선수가 마셨다고 합니다.

가와구치 골키퍼는 훗날 ‘그 친구는 항상 골포스트 옆에 세워 둔 내 물을 뺏어 먹어 막상 나는 경기 중에 목이 말라도 마실 물이 없었다.’라고 했는데, 당시에는 최용수 선수가 너무 무서워서 제대로 항의를 못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용수 형님은 현역 시절 골키퍼들 물을 곧잘 뺏어 먹었다고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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