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69. 블로굴트
준영은 스톡홀름에 있는 지미 머피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브라질의 선전과 별개로 웨일스의 8강 진출 소식을 들었으니 축하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거기다 겸사겸사 알아볼 것도 있지!’
대회 조직위에 문의해 웨일스 대표팀이 머무는 캠프로 전화를 거니, 곧바로 머피 코치와 연결이 되었다.
“여보세요? 코치님, 접니다. 존입니다. 8강 진출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존. 자네와 잉글랜드의 8강 진출도 축하하는 바이네. 이거 늦게 전해서 미안하구만.)
“괜찮습니다. 플레이오프에 신경 쓰느라 바쁘셨을 테니…….”
잠시 덕담을 주고받은 후, 두 사람은 본격적인 통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지미 머피가 준영의 목적을 단번에 눈치챘다.
(스웨덴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지?)
“하하하, 잘 아시네요.”
(자넨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일 수 있다면 다 하잖아.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 들어주지. 대신에 말인데…….)
“브라질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시죠? 덤으로 울레비 경기장 잔디 상태까지 알려 드리죠.”
(후후후, 역시 거래를 할 줄 아는군.)
잉글랜드는 스웨덴을, 웨일스는 브라질을.
조 예선에서 맞붙었던 팀을 바꿔서 상대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정보 교류는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일단 브라질의 주전 골키퍼 지우마르 말인데, 엄청난 선방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풀백인 니우통 산투스의 공격 가담도 주의해야 하고요.”
(음… 공격진은?)
“소련과의 경기에서 바바가 두 골을 넣었다는 건 들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골을 넣은 녀석보다 무서운 놈들은 따로 있죠.”
바로 가린샤와 펠레.
준영은 브라질과 소련의 경기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21세기에서 들은 이야기로 그 둘이 어떤 활약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가린샤가 측면에서 소련 수비진을 완전히 흔들어 놨습니다. 그리고 펠레가 바바에게 추가 골을 어시스트했고요.”
(펠레라면 이번 대회 가장 어린 애송이 말이지?)
“단순한 애송이가 아닙니다. 브라질 감독이 왜 17살 애송이를 발탁해서 선발 출전까지 시켰겠습니까?”
(그만한 실력이 있는 거로군. 던컨과 비슷한 천재인가?)
“예, 그 꼬마는 상상 이상의 괴물입니다. 절대 얕보면 안 돼요.”
미래의 축구 황제 펠레.
그는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월드컵 데뷔 골을 넣으며 팀을 4강에 올려놓는 대활약을 했다.
역사에 변동이 없다면 분명히 그리될 테지만…….
‘만약에 내가 해 준 경고 덕분에 웨일스가 브라질을 덜컥 잡아 버리면?’
그리되면 펠레, 가린샤와 결승전에서 맞붙는 것은 완전 무산.
무척 아쉬운 일이 되겠지만, 준영은 그런 변동도 피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정보를 좀 알려 준 정도로 무너질 브라질이라면 펠레와 가린샤도 기대할 수준은 못 된다는 거잖아.’
이에 준영은 브라질 선수들과 그들의 전술에 대해 낱낱이 머피에게 알려 주었다.
(고맙네, 존. 우리 쪽 전력 분석관이 알아 온 것보다 훨씬 상세하군. 역시 필드에서 직접 뛰어 본 선수는 달라.)
“그럼 스웨덴의 정보를 알려 주시죠.”
(그러지. 말해 줄 게 꽤 많은데, 미리 필기할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
“이미 준비해 놨습니다.”
(좋아, 스웨덴은 자네도 어느 정도 알고 있겠지만, 군나르 그렌이 핵심 선수로…….)
준영은 부지런히 연필을 놀렸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는 복습이 될 것이요, 모르고 있었던 것은 숙지 대상이 될 것이다.
금세 그가 펼쳐 놓은 백지에는 스웨덴에 대한 정보들이 빽빽하게 채워졌다.
***
스톡홀름 교외의 로순다 스타디움.
3만의 관중들이 입장한 가운데, 양 팀 선수들이 필드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기 색깔에 맞춰 청색과 황색의 유니폼을 걸친 스웨덴 선수들과 하얀 상의에 푸른 하의를 입은 잉글랜드 선수들.
그들은 서로를 응시하며 조용히 기 싸움을 벌였다.
‘역시 바이킹 놈들이라 그런지 한 덩치들 하는군.’
축구 선수 평균 신장이 160∼170대가량인 다른 나라들과 달리, 스웨덴은 180대 선수들이 많았다.
특히 수비수들의 신장이 컸다.
‘그래 봤자 나보다 작지만.’
준영이 꽤 신경 쓰였던지 스웨덴 선수들은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특히 AC 밀란 소속으로 유러피언 컵에서 거하게 한 방 먹었던 스웨덴의 주장 닐스 리드홀름이 엄청난 경계의 시선을 보냈다.
진지한 그와는 사뭇 반대로 헤실거리며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선수가 있었다.
바로 11번 레나트 스코일룬이었다.
“맙소사, 술을 얼마나 퍼마신 거야?”
“한두 잔이면 몰라도……. 경기를 제대로 뛸 생각이나 있는 건지 모르겠군.”
자신들을 우습게 본다는 생각에 잉글랜드 수비수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빌리 라이트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 주정뱅이가 엄청난 개인기와 슈팅 능력을 가졌다고 준영이 일러 준 것을 잊지 않았기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굉장한 플레이를 보여 준다고 했었지.’
승부에서 방심은 금물.
돌이킬 수 없는 토너먼트 경기는 더더욱 그랬다.
“입장하십시오!”
안내 요원의 외침에 선수들은 심판과 함께 필드로 나갔다.
오늘 주심은 소련의 니콜라이 라티세프.
잉글랜드 선수들 입장에선 약간 좀 찜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들에게 패하여 보따리를 싼 나라의 심판이 과연 공정하게 판정해 줄까 미심쩍었으므로.
“잉글랜드의 포진이 좀 이상한걸?”
“그러게. 멤버는 조 예선 때랑 별 차이가 없는데…….”
“아, 동양인이 전방으로 배치되었어!”
기자들이 본 대로 준영은 오늘 인사이드 포워드로 전진 배치되었다.
원래 그의 자리는 바비 찰튼이 맡았다.
‘존 Y. 리와 바비 찰튼 둘 다 공수 능력이 뛰어나지. 상황에 따라 둘이 포지션 체인지를 하면 스웨덴을 교란할 수 있을 거야.’
윈터보텀 감독은 그런 판단에서 준영의 위치를 바꾸었다.
조 예선에서는 계속 하프백으로 출전시키긴 했지만, 솔직히 수비만 시키기에는 피지컬과 발재간이 아까웠으니까.
그래서 조 예선이 끝난 뒤에 바비 찰튼과 포지션을 바꿔 전방으로 올리는 훈련들을 계속했다.
삐이익-!
주심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함께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나가라, 블로굴트(* Blågult, 스웨덴 대표팀의 별칭)!”
“축구 종가 따위 박살 내 버려!”
홈 관중들의 환호성을 등에 업은 스웨덴은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군나르 그렌과 닐스 리드홀름이 미드필드에서 중심을 잡아 주며 측면의 쿠르트 함린과 레나트 스코일룬에게 번갈아서 공을 밀어 주었다.
“젠장, 듣던 대로 엄청 빠르구만!”
잉글랜드 수비수 도널드 하우는 함린의 스피드와 테크닉에 진땀을 쏟았다.
크로스를 올릴 것처럼 페인트를 취했던 함린은 도널드를 제쳐 버리곤 문전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바비 찰튼이 재빨리 막아서 공을 확보하면서 공격은 무산.
하지만 공격으로 전환하던 패스는 리드홀름에게 끊겨 이번엔 반대편 레나트 쪽으로 공이 갔다.
“어이쿠!”
패스가 오는 걸 대비하지 못했던 레나트는 하마터면 공을 놓칠 뻔했다.
그를 마크하기 위해 접근했던 에디 클램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주 비틀비틀하는구만. 스웨덴 감독은 제정신인가? 이런 주정뱅이를 뭘 믿고 출전…….’
좌우로 크게 휘청인다 싶던 레나트가 순간 에디의 다리 사이로 공을 통과시키고 바람같이 빠져나갔다.
순간적으로 보여 준 놀라운 움직임에 에디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것은 뒤에 대기하고 있던 토미 뱅크스도 마찬가지.
화들짝 놀라 막아서는 순간, 레나트는 토미마저 선물 포장지처럼 벗겨 버렸다.
“비키세요. 골 들어갑니다~”
황급히 마크에 나서는 빌리 라이트와 골키퍼 콜린 맥도널드의 반응을 보며 레나트는 슈팅 모션을 취했다.
하지만 그때, 뒤에서 바람같이 날아온 커다란 덩치가 발바닥으로 잽싸게 공을 긁어 가 버렸다.
삼사자 군단의 호랑이, 이준영이었다.
***
‘뭐 저런 게 다 있어? 혼자 취권, 아니 취구를 하다니!’
레나트의 공을 인터셉트한 준영은 어이가 없었다.
취한 상태에서도 굉장한 실력을 보인다고 머피 코치에게 듣긴 했지만, 설마 저 정도의 비범한 드리블 실력을 보일 줄이야!
가세하는 게 늦었으면 진짜 실점을 할 뻔했다.
“어이, 중국인! 그건 내 공이야!”
크게 헛발질을 했던 레나트가 곧장 준영에게 달려들어 인터셉트를 시도했다.
이를 제쳐 낸 준영은 레나트가 날린 높고 거친 태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삑!
“쳇, 우리가 홈팀인데 눈감아 주지.”
파울을 저지르고 돌아가는 레나트를 잠시 노려보던 준영은 1차 마크에 실패한 에디 클램프에게 눈길을 돌렸다.
“절대 방심하면 안 돼. 저놈, 인터밀란의 주전 공격수라고.”
“아, 알았어. 주의할게.”
한 번 호되게 당해 봤으니, 그다음에는 주의하며 대처하겠지.
준영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다시 전방으로 향했다.
오늘 자신의 임무는 공격.
감독이 따로 지시하기 전에는 수비보다 공격에 집중해야 했다.
“다들 올라가!”
준영이 전방에 복귀하자마자 골키퍼 콜린이 길게 롱 패스를 올렸다.
스웨덴 진영 중앙으로 떨어지는 공을 향해 준영이 쫓아갔고, 그를 잡기 위해 뱅트 구스타프손이 달려왔다.
투웅-!
공중에서 근육이 부딪치는 소음이 크게 울렸다.
준영은 자신을 쉬 돌아서지 못하게 맨 마킹을 하는 뱅트의 수비력에 감탄했다.
‘과연, 50~60년대 스웨덴 최고의 수비수답군.’
뱅트 구스타프손.
이 시절 스웨덴은 그레놀리 삼총사가 유명하지만, 후방을 든든하게 지킨 뱅트가 있었기에 삼총사의 활약도 가능했다.
그 때문에 21세기에서도 스웨덴 역대 올스타에 언급이 될 정도.
‘확실히 만만치 않아. 단순히 피지컬로 대응했다간 당하고 말겠어.’
일단 공을 접근해 온 조니 헤인스 쪽으로 넘긴 준영은 재빨리 스웨덴 문전으로 달려갔다.
뱅트가 그의 뒤를 쫓는 사이, 헤인스는 데릭 케반에게로 공을 넘겼다.
오바르 베리마크를 앞에 두고서 데릭은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했지만, 오바르의 태클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흘린 공을 바비 롭슨이 달려들며 슈팅을 했지만, 골대 옆으로 흘러 나가 버렸다.
‘일단 첫 슈팅을 만들어 냈지만, 스웨덴 수비진이 생각보다 튼튼하군.’
스웨덴은 조 예선 3경기에서 단 1점밖에 내주지 않았다.
머피 코치에게서도 수비가 단단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또 달랐다.
‘어쨌거나 지금은 빈틈을 찾아 부숴야 해. 자칫 선제골이라도 내주면 경기가 꼬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준영은 곧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중원에서 바비 찰튼이 군나르 그렌과 닐스 리드홀름의 패스를 멋지게 끊고 있었기 때문.
바비는 자신의 왕성한 체력과 넓은 시야, 뛰어난 판단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스웨덴의 두 백전노장을 봉쇄했다.
‘그래, 저게 바로 바비 찰튼 경의 진짜 실력이지!’
준영은 몰랐지만, 뮌헨 사고 이후의 난관과 FA컵, 유러피언 컵 등을 거치며 바비 찰튼의 실력은 한층 성장해 있었다.
거기다 월드컵에서도 톰 피니를 대신해 계속 기용되면서 자신감 역시 많이 쌓였다.
“이 금발 애송이 녀석이!”
결국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자 군나르 그렌이 벌컥 짜증을 냈다.
그러든 말든, 바비는 자신의 플레이를 꿋꿋하게 해 나갔다.
‘디 스테파노는 경기장 모든 곳을 보고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을 미쳤지.’
바비는 유러피언 컵에서 맞붙어 보았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플레이를 떠올렸다.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렇게 확신한 바비는 멀리 전방을 바라보며 길고 빠르게 패스를 놀렸다.
그리고 그 공은 정확하게 준영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
실제 역사에서 바비 찰튼은 1958년 월드컵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 선수는 그가 유일했죠.
당시 잉글랜드 대표팀은 진짜 사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뮌헨 참사로 던컨 에드워즈나 토미 테일러 같은 핵심 선수들을 잃었고, 1957-58 시즌 36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왕에 오른 토트넘의 로버트 A. 스미스까지 발목 부상 여파로 뛸 수 없었습니다.
베테랑 톰 피니 역시 부상으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고요.
공격 쪽에 좀 더 확실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는 선수가 뛸 수 있었다면, 그 대회 성적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