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68. 스페셜 디너
손웅민은 오늘 토트넘의 유소년 팀 훈련장을 찾아왔다.
이번에 자신이 속한 에이전트 회사에 소속된 한국인 선수 2명이 이곳 유소년 팀에서 뛰게 되었기 때문.
“Pass! Baripary!”
연습 경기를 하는 유소년 선수들 사이에서 제법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Hurry up.’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Baripary.’는 한국어 ‘빨리빨리.’에서 온 단어라고 한다.
‘옛날에 영국에 온 한국인 이민자들이 곧잘 하던 말이 영국 사회에 전파되었다지?’
최초 전파자는 대한민국 최초의 유럽파 축구 선수 이준영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는 영어에 유창했지만, 급할 때나 감정적인 상황에서는 한국어를 마구 내뱉곤 했다고.
그렇게 내뱉은 말 중에 꽤 찰진 느낌의 단어들이 그와 교류하던 당대 영국 선수들이나 축구 팬들에게로 퍼진 것 같았다.
“아오, C8! 그것도 못 넣냐, 이 개발 시키야!”
“I’m not Kaval! Your pass was bad! Seevalnoma!”
연습 경기 중에 후배 한국 선수가 동료와 약간(?) 실랑이를 벌였다.
한국인들에게 꽤 익숙한 단어를 주고받으면서.
그 모습을 본 손웅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에휴, 영감님, 참 좋은 거 가르쳐 놨네.”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준영이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하는 말 따위 굳이 따라 익히려고 하진 않았을 테니까.
“선배님 오셨습니까.”
훈련이 끝난 후, 후배 선수들이 웅민에게로 인사를 하러 왔다.
그들의 어깨를 다독여 준 웅민은 애로 사항 같은 것이 없는지 물었다.
“아뇨. 딱히 불편한 점은 없어요. 런던에는 교민분들도 많고, 음식도 생각보단 잘 맞더라고요.”
“다른 팀에 있는 선배님들도 곧잘 도와주시고요.”
후배들의 이야기에 웅민은 아무래도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영국에 한국 선수가 별로 없던 것 같았는데, 상당히 많았으니까.
그것도 벤치 멤버나 유소년 선수가 아니라 주전 자리를 꿰차고 있는 이들도 상당히 있었다.
‘그 정도 활약이면 분명히 들었을 텐데, 왜 모르고 있었던 걸까?’
심지어 국내에서 선수 생활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표팀 동기가 여전히 영국에서 뛰고 있기도 했다.
은퇴한 선배들 중에도 그런 케이스가 있었다.
현재는 해설가로 유명한 왕년의 국가대표 스트라이커 최영수가 대표적.
웨스트햄에서 5시즌 뛰면서 꽤 활약했다고 하면서, 해설에서도 베르캄프랑 맞붙어 본 썰을 늘어놓곤 하는데 정작 웅민은 들은 바 없었다.
‘J리그에서 뛰셨던 거 같은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이상한 건 그렇게 잘못 알고 있던 게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주 쓰던 노트북도 애플이 아니라 ‘넥스트’라는 영국 메이커 제품이었다.
본사가 맨체스터에 있는 이 회사는 모바일 시장에서도 애플, 삼성과 함께 세계 시장을 삼분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손웅민은 요즘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은 것은 조사해서 새로 살펴보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한 덕분에 온갖 잡다한 상식이 많이 늘었다.
“선배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냐. 아무것도……. 출출할 테니까 간단하게 뭔가 좀 먹을래?”
“예, 선배님이 사 주시는 거면 뭐든지 좋아요.”
웅민은 새까만 후배들을 데리고 근처의 미스터리 치킨 체인점으로 향했다.
“패스트푸드는 안 좋다고 들었는데…….”
“야 인마, 뭐든지 좋다며? 그리고 이따금씩 먹는 정도는 괜찮아.”
“그래요?”
“그럼. 이 통닭집 세운 사람도 축구 선수라고.”
그것도 그 유명한 이준영 옹이시다.
맨체스터에 본사를 둔 미스터리 치킨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심지어 치킨의 신흥 강국인 한국에도 프랜차이즈 매장을 둘 정도로 세계적인 브랜드다.
“여기 유명하잖아. 샌더스 대령도 영국에 왔을 때 여기 양념 치킨 맛보고 울고 갔다던가?”
“확실히 맛있긴 하죠.”
그들이 들어온 체인점에는 토트넘의 레전드 대니 블란치플라워와 그의 동생 재키의 사진이 크게 붙어 있었다.
런던에서 최초의 체인점을 열었던 게 이들 형제들이기 때문.
대니는 맨체스터에 갔을 때 맛본 치킨 맛을 잊지 못했고, 이준영과 친한 동생을 내세워 매장을 세웠다고 한다.
“토트넘 인근의 매장들은 룰이 하나 있지. 바로 스퍼스가 경기하는 날은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거야.”
“토트넘 핫스퍼의 상징이 닭이라서 그런 거군요.”
“그래, 그와 달리 다른 팀들은 토트넘과 경기할 때 치킨을 반드시 먹곤 하지.”
잠시 떠들다 체인점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곧장 메뉴를 보고 주문을 했다.
“반반무마니 주세요.”
“Banbanmumani, 스페셜 디너(Special Dinner) 말이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의 말에 일행은 빈자리에 앉았다.
그때 후배가 궁금한 표정으로 웅민에게 물었다.
“왜 반반무마니를 스페셜 디너라 부르는 거죠? 저녁에 많이 먹어서 그런가?”
“그거? 1958년 월드컵 때 있었던 일인데 말이야…….”
웅민은 인터넷을 통해 최근에 알게 된 일화를 후배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
구수하고 향기로운 기름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잉글랜드 축구대표팀 캠프 부근을 지나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이 군침 돌게 하는 냄새는 뭐지?”
“잉글랜드 녀석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온 동네 길고양이와 들개들이 슬금슬금 캠프 안으로 들어갔다.
녀석들이 모여든 식당에는 잉글랜드 선수들이 둘러앉아 특식을 즐기고 있었다.
“와, 이렇게 맛있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야!”
“닭은 로스트 치킨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크으! 맥주하고도 너무 잘 어울려!”
선수들이 부지런히 씹고 뜯고 맛보고 있는 건 치킨 요리.
그것도 양념 반, 프라이드 반, 절인 무를 많이 곁들인 반반무마니였다.
벌써 한 접시 뚝딱 해치우고 옆 동료의 것을 보며 손가락을 빠는 이들도 있었다.
“아직 더 있으니까 많이들 먹어요.”
“고마워. 잘 먹을게, 존.”
8강전을 앞두고 준영은 선수들에게 특식을 선물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기를 끌어 올리는 데는 맛있는 음식과 술이 최고였기 때문.
‘잘 먹고 사기가 높아야 경기를 잘할 거 아니야. 그렇게 성적이 좋아야 내가 레전드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거고.’
이런 생각에 준영은 직접 나서 치킨 요리를 만들었다.
닭고기를 비롯한 식자재를 사고, 이를 손질한 후에 맨체스터의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 공장에서 배송된 소스를 써서 조리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혼자서 다 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팀 지원 스태프나 캠프 요리사들, 그리고 오슬로에서 자신을 만나러 온 이철호의 도움도 받았다.
“힘들게 휴가 받아 왔는데 이런 식으로 부려 먹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형님. 덕분에 진짜 기가 막힌 레시피를 배웠어요.”
요리사로 수련을 하는 이철호에게 있어 오늘 경험은 진짜 황금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아까 한 점 먹어 봤는데, 정말 기가 막혔다.
천국의 요리가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
“이건 정말 누구라도 좋아할 거예요. 오슬로로 돌아가면 당장 셰프에게 추천해 보고 싶어요.”
“그러든가. 다만 정식으로 메뉴에 올리고 싶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해서 허락을 받아야 할 거야.”
그렇게 일러둔 준영은 이철호와 함께 갓 조리한 치킨을 맛있게 먹었다.
그때, 식당 안으로 윈터보텀 감독이 들어왔다.
“거 냄새 한번 기가 막히는군. 혹시 내 몫도 있나?”
“물론이죠.”
준영은 곧장 반반무마니 한 접시를 윈터보텀 감독 앞에 내놓았다.
“음, 포크나 나이프는?”
“이건 손으로 직접 들고 뜯어 먹어야 맛있어요.”
“그래?”
좀 머뭇거리던 감독은 이내 다른 선수들처럼 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러곤 볼을 불룩하게 한 상태로 미소를 지었다.
“맛있어. 반년 후의 크리스마스가 지금인가 싶을 정도군.”
연방 감탄을 하던 윈터보텀 감독은 잊은 것이 있다는 듯, 냅킨으로 손을 닦고는 전보를 꺼내 들었다.
“아 참, 방금 스톡홀름에서 연락이 왔어. 웨일스가 플레이오프에서 매직 마자르에게 역전승을 거두고 8강에 올랐다는군.”
“우와!”
다들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푸스카스 등 주축 멤버들이 망명으로 빠졌다지만, 헝가리는 결코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웨일스가 그들을 이기다니!
‘훗, 머피 코치님이 사고를 치셨군.’
준영은 이 경기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잉글랜드가 8강에 오른 것처럼, 다른 조에서도 원래 역사와 다른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기에 섣불리 예단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미 머피는 실제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매직 마자르를 잡았다.
‘맨유 임시 감독으로 FA컵 우승에 유러피언 컵 제패, 여기에 매직 마자르까지 잡았으니 몸값 엄청 오르시겠군.’
이러다 다른 데서 오퍼 오면 맨유를 떠나는 건 아닌지?
준영이 이 점을 살짝 걱정하고 있을 때, 톰 피니가 아쉬운 기색으로 말했다.
“역시 조 1위를 했어야 했는데…….”
매직 마자르를 잡느라 사력을 다한 웨일스가 8강 상대였다면 쉽게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그의 생각에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그건 모르죠. 웨일스 입장에서도 브라질보다 우리가 더 편한 상대일 테니.”
“곧잘 맞붙어 봤기 때문이란 거야?”
“네, 낯선 상대보단 낫다는 거죠. 거기다 머피 코치, 아니 감독님이면 우리 팀 정보를 다 꿰고 있을 겁니다.”
게다가 머피 코치는 맨유에서 준영을 오래 봐 왔다.
그러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브라질도 쉽게 이기지 못했지. 펠레의 골로 겨우 1 대 0으로 이겼을 정도니까.’
혹시 8강에서 웨일스가 브라질을 꺾는 건 아닐까?
그리되면 결승전에서 브라질과 재회하는 것도, 펠레나 가린샤와 맞붙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미안해요, 코치님. 전 브라질의 선전을 기원하겠어요.’
마음속으로 사과를 한 준영은 브라질과 잉글랜드가 부디 결승까지 순항하기를 빌었다.
***
스톡홀름의 유흥가.
삼삼오오 한잔하러 가던 사내들은 거리에 나타난 한 남자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거 함린 아니야?”
“쿠르트 함린? 헉, 진짜네!”
“무슨 일로 여길 온 거지? 설마…….”
신속의 양발잡이 쿠르트 함린.
그레놀리 삼총사의 뒤를 이어 스웨덴 축구를 짊어지고 나갈 이 젊은 천재 선수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쳇, 여긴 아니군.”
투덜거리면서 나온 함린은 이후 몇 군데 주점을 더 들락날락거렸다.
한잔하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가 찾는 사람은 바로…….
“젠장, 선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마침내 함린은 목표 대상을 발견했다.
자신과 함께 스웨덴의 양 날개를 맡고 있는 레나트 스코일룬.
잔뜩 취해 불콰해진 스코일룬은 함린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 어여 오라고. 후배님도 한잔하지?”
“하! 당장 일어나요! 갑자기 사라져서 다들 얼마나 찾고 있는지 알기나 합니까!”
“쩝, 알았어. 마누라도 아닌데 잔소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스코일룬.
조금 전부터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저런 주정뱅이가 국가대표 선수라니 믿어지지 않았던 것.
“아 참, 함린, 8강 상대가 누구였더라? 소련이었나?”
“아뇨. 잉글랜드입니다.”
“오, 축구 종가란 말이지?”
흥미로운 표정을 짓던 스코일룬은 바닥에 구르던 맥주 캔들을 가볍게 걷어찼다.
까앙-! 깡!
발끝에 맞은 맥주 캔들이 멀리 떨어진 쓰레기통에 연달아 정확하게 들어갔다.
주정뱅이가 했다고는 볼 수 없는 발재간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잉글랜드라……. 이틀 후 저녁의 특별 만찬으로 손색없겠어.”
미소 짓는 스코일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레나트 스코일룬은 축구뿐만 아니라 아이스하키, 농구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스포츠맨이었습니다.
상당히 빠른 발에 볼을 기가 막히게 다루었는데, 자신의 테크닉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걸 몹시 좋아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프리스타일 축구의 달인쯤 되겠군요.
세리에 리그의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굉장한 활약을 보여 줬지만, 알코올 중독자라 음주 때문에 항상 말썽을 일으켰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