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67화 (167/400)

Round 167. 가시밭길

1958년 6월 15일.

잉글랜드 대표팀은 예테보리 동쪽 보로스의 리비네 경기장에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마지막 3차전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말해 두었지만, 게르하르트 하나피와 칼 콜러 이 2명은 절대 눈을 떼지 마!”

윈터보텀 감독이 경계하는 하나피는 준영도 21세기에서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정도의 만능 플레이어였다.

여기에 칼 콜러 역시 공수 양면에 뛰어난 미드필더.

이들은 지난 대회 우루과이를 물리치고 오스트리아를 3위에 올렸다.

그야말로 오스트리아 리즈 시절 최고의 레전드 플레이어들이었던 것!

‘애석하게도 이번 대회는 대진 운이 나빴지.’

오스트리아는 브라질, 소련을 상대로 연패를 하면서 현재 탈락이 확정적이었다.

이에 잉글랜드는 가능하면 다득점 승리를 거둬 1위로 8강 토너먼트에 나가고자 했다.

선발 멤버는 지난 경기와 동일.

베테랑인 톰 피니는 이번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고질적으로 앓고 있다는 사타구니 부상이 도진 탓이다.

“피니 아저씨는 토너먼트에는 출전할 수 있을까?”

“글쎄, 알 수 없지. 나이도 적지 않으니까…….”

톰 피니는 올해 36살.

21세기 기준으로도 화석이 되어 가는 나이대의 노장 플레이어다.

소속 팀인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하드캐리하고 있었지만,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이번에도 하프백 출전이구나.’

포지션은 같아도 윈터보텀 감독은 이전 경기보다 좀 더 공격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을 지시했다.

“알겠나, 존? 하나피가 함부로 중앙선을 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예, 감독님. 전력을 다해 압박(Press)하겠습니다.”

“어, 그래. 콱 눌러 주라고!”

윈터보텀 감독은 아직 압박에 대한 전술적인 해석은 부족했다.

하지만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시간 됐다. 가자!”

“Let’s win!”

빌리 라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 대표팀은 사기충천한 기세로 출전했다.

이들과 달리 오스트리아 선수들의 표정은 절박함 그 자체였다.

3패로 귀국할 수 없다는 의지를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

‘음, 쉬운 경기는 되지 않겠군.’

상대 선수들의 표정을 읽은 준영은 윈터보텀 감독이 지목했던 게르하르트 하나피를 찾았다.

백넘버 5번에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하나피는 작지만 강인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잘 발달된 다리의 근육은 꽤 뛰어난 테크닉을 가졌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삐익-!

오후 7시, 네덜란드 출신의 국제 심판 얀 브롱호스트가 길게 휘슬을 불면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오스트리아는 상당히 저돌적인 기세로 덤벼들었다.

그 바람에 경기 초반 잉글랜드 수비진이 약간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틈을 타고 전반 12분, 요주의 대상인 칼 콜러가 미드필드 지역에서 공을 잡았다.

‘저거 그냥 두면 위험할 텐데?’

거리가 있었던 준영은 콜러와 가까이 있는 동료 윌리엄 슬레이터에게 맡겨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윌리엄이 살짝 방심한 틈을 타서 콜러가 벼락같은 중거리 슛을 날렸다.

크로스바 위로 넘어가긴 했지만,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 차례 위기가 지나간 후, 빌리 라이트의 호통이 터져 나왔다.

“정신 차려, 이 자식들아! 아직 8강 진출 확정 난 거 아니야!”

그의 말대로 아직은 모른다.

만약 이 경기를 패하고, 소련이 브라질을 이기는 상황이 벌어지면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 경우에는 잉글랜드, 브라질은 1승 1무 1패가 된다.

21세기라면 2, 3위가 승점이 같으면 골 득실 차나 카드 누적, 그리고 페어플레이 점수 등으로 따지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았다.

이틀 후 플레이오프 경기를 통해 8강 토너먼트 진출자를 가리도록 되어 있었다.

즉, 피곤하게 1경기를 더 하게 되는 셈이다.

플레이오프 결정전에서 이긴다 해도 이틀 후에 토너먼트 경기를 치러야 하니 이만저만 손해가 아닌 것.

‘맞아요, 주장. 경우의 수 같은 거 따지지 않게 깔끔하게 이겨서 갑시다.’

준영은 21세기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뛸 때도 머리 아픈 경우의 수 계산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절대 골 때리는 상황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물론 이긴다 해도 경우의 수는 남아 있다.

하지만 지는 경우와 비교도 되지 않기에 어떻게든 이 경기는 잡고 가는 게 최선이었다.

***

전반전 초반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저돌적인 공격을 막아 낸 잉글랜드는 차근차근 볼 점유율을 높이며 공격을 주도해 나갔다.

이전 경기들과 마찬가지로 조니 헤인스가 주로 패스 공급을 담당하고, 데릭 케반이 특유의 돌파력을 발휘하며 오스트리아 문전을 비집고 들어갔다.

여기에 바비 찰튼 역시 부지런히 움직이며 공격 찬스를 노리는 한편, 반격을 차단했다.

‘나쁘진 않은데… 마침표 찍기가 힘들군.’

잇달아 잉글랜드에 기회를 내주고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의 조직력은 나쁘지 않았다.

‘저 에른스트 하펠이라는 노땅 센터백이 수비진을 잘 이끌고 있어. 주장인 하나피도 미드필드 지역에서 미리 공격을 차단하는 데 애쓰고 있고.’

특히 하나피는 준영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윈터보텀 감독이 그를 요주의 대상으로 여겼듯, 오스트리아 감독 역시 준영을 요주의 대상으로 꼽았던 것.

아무튼 하나피의 수비는 훌륭했다.

조니 헤인스나 바비 롭슨 등 동료 선수들이 준영에게 패스를 하면 이를 먼저 끊어 내곤 했다.

이 때문에 공중볼로 패스를 건네면, 또 머리나 가슴으로 쉽게 공을 다루지 못하게 바싹 달라붙었다.

이 경우엔 유니폼을 잡거나 발로 걷어차는 등 파울도 서슴지 않았다.

‘젠장, 모기 같은 작자로군!’

근방을 맴돌다가 치고 빠지는 방식이 모기 그 자체.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자연히 준영이 있는 쪽으론 패스가 잘 안 오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준영을 마크하느라 바쁘다 보니 하나피 역시 이렇다 할 공격 찬스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결국 양 팀의 요주의 대상들은 본의 아니게 따돌림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말라고.’

수비와 달리 공격은 단 한 번의 찬스만 살리면 된다.

준영은 그 찬스를 살릴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전반전 34분, 마침내 찬스가 왔다.

바비 롭슨이 측면을 돌파하면서 빠르고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린 것.

문전에 있던 데릭 케반과 바비 찰튼을 견제하던 오스트리아 수비수들은 후방에서 빠르게 쇄도하던 준영을 보지 못했다.

바싹 쫓아온 하나피와 한발 늦게 가세한 하펠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준영이 이마로 돌려놓은 헤딩슛은 그대로 골 그물을 흔들었다.

“들어갔다!”

“하하핫! 너 그냥 공격수 해라!”

잉글랜드 선수들이 신나게 골 셀레브레이션을 즐기는 가운데, 스코어보드의 점수판은 1 대 0으로 수정되었다.

팽팽한 균형이 무너지면서 잉글랜드는 한결 더 홀가분하게 경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

1 대 0으로 전반을 마친 잉글랜드는 후반전이 되어서도 공세를 이어 갔다.

후반 11분, 조니 헤인스가 오스트리아 페널티 박스 앞에서 날린 슈팅이 수비수의 발을 맞고 골대에 들어가며 추가 골이 나왔다.

점수 차가 벌어지자, 마냥 수비만 할 수 없게 된 오스트리아는 반격에 나섰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공격을 주도해야 할 게르하르트 하나피가 준영에게 꽁꽁 묶여 있었으므로.

“전반전에 많이 귀찮게 해 줬지? 댁도 한번 체험해 보라고.”

“Verdammt!”

뭔가 욕하는 것처럼 투덜거린 하나피는 준영의 끈질긴 마크를 뿌리치지 못했다.

오히려 칼 콜러가 보낸 패스를 빼앗겼고, 준영은 곧장 전방에 있는 공격수들의 앞쪽 빈 공간으로 스루패스를 넣었다.

“나이스 패스… 아앗!”

패스를 잡기 위해 뛰어가던 바비 찰튼은 하펠에게 어깨를 잡혀 나동그라졌다.

그는 곧장 항의에 나섰지만, 네덜란드 심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뒤이어 달려들던 데릭 케반이 공을 잡고 오스트리아 문전으로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라붙는 수비수들을 어깨로 밀어내며 탱크같이 질주한 데릭은 골키퍼의 다리 사이로 슛을 날리며 세 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후반 19분, 스코어 3 대 0.

아직 시간은 20분 넘게 남았지만, 이미 승리의 여신은 잉글랜드 쪽으로 손을 들고 있었다.

“좋아! 아주 좋아!”

필드 밖에 있는 윈터보텀 감독은 만족한 미소를 머금고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토너먼트 진출은 확정적.

남아 있는 경우의 수는 1위로 가느냐, 2위로 가느냐뿐이다.

‘토너먼트에 올라가면 3조 팀 국가들과 맞붙게 돼. 그쪽 순위 상황이…….’

현재까지 파악된 3조 순위는 개최국인 스웨덴이 1위, 그리고 웨일스가 2위, 헝가리가 3위였다.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매직 마자르의 과거를 생각하면 참으로 딱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헝가리는 현재 멕시코와 3차전 시합 중일 테지. 이 경기 결과에 따라 놈들도 회생할 가능성이 있어.’

윈터보텀 감독은 기왕이면 웨일스와 맞붙기를 바랐다.

같은 영연방 팀인 웨일스와는 곧잘 경기를 했었고, 그만큼 상대 팀에 대한 정보도 많아 경기하기 편하니까.

***

후반전 정규 시간이 모두 지났다.

스코어보드의 3 대 0 점수를 힐끔 바라봤던 심판은 딱히 추가 시간을 길게 주지 않고 경기를 종료했다.

“이겼다!”

“토너먼트 진출이야!”

경기가 끝나자 준영과 잉글랜드 선수들은 신나게 환호성을 지르며 기쁨을 만끽했다.

남미 축구 강호 브라질, 멜버른 올림픽 축구 금메달을 따낸 소련, 지난 대회 3위 오스트리아.

만만찮은 상대들에게서 2승 1무라는 좋은 성적으로 조 예선 관문을 통과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선수들과 달리 윈터보텀 감독과 코치들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준영의 물음에 윈터보텀 감독은 아쉬움이 진한 한숨을 내쉬며 사정을 설명했다.

“방금 라디오 뉴스에 나왔는데, 브라질이 소련을 2 대 0으로 이겼다더군.”

“어, 그럼…….”

“브라질이 조 1위야. 우리가 그다음이고.”

그 말을 들은 선수들도 약간 허탈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회 규정상, 조 예선에서 토너먼트에 나가는 상위권 두 팀의 승점이 같을 때는 골 득실 차로 순위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소련과의 경기를 2 대 1로 끝낸 잉글랜드는 단 1골 실점 때문에 2위로 밀려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토너먼트 첫 상대는… 스웨덴이 되는 거군요.”

“그래, 가시밭길로 가는 셈이지. 만만찮은 실력을 가진 개최국과 싸우게 되다니…….”

윈터보텀 감독이 한숨 쉴 만했다.

준영이 알기로 이 시기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은 역대 최고의 전성기.

지난 스위스 월드컵 때 예선 탈락하긴 했지만, 8년 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을 누르고 3위를 차지했다.

‘거기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지.’

비록 결승에서 브라질에게 고배를 마셨다고 하지만, 4강에서 지난 대회 챔피언인 서독에 대역전승을 거둘 정도로 전력이 막강한 팀.

거기다 그레놀리 삼총사 중에서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홀름이 건재하고, 쿠르트 함린, 레나트 스코일룬이라는 역대급 윙어들까지 있었다.

“만만찮긴 하죠. 하지만 그 가시밭길을 밟고 가지 않으면 우승은 바랄 수 없어요.”

“우승이라…….”

윈터보텀 감독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준영의 말에 잠시 잊고 있었던 최종 목표가 떠올랐던 것.

그것은 빌리 라이트를 비롯한 다른 대표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상대가 누구든 밟고 가야 정상에 서겠지!”

“어디 한번 해보자고!”

준영과 잉글랜드 선수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가시밭길이 앞에 있더라도 깡그리 재로 만들 자신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기세는 뜨거웠다.

***

과거에 오스트리아는 유럽에서 축구 강호로 손꼽혔습니다.

오늘 소개된 게르하르트 하나피(1929~1980) 이전에 마티아스 신델라라는 전설적인 선수가 있어서 상당히 유명세를 떨쳤죠.

하지만 나치 독일에 오스트리아가 합병되면서 오스트리아 선수들도 강제로 독일 대표팀에 뛰게 되는 등 부침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1980년대까지는 월드컵에 나오면 그럭저럭 성적을 내는 팀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는 유럽에서도 완전히 중하위권으로 떨어져 버렸죠.

그래도 축구 리그는 나쁘지 않아서 오스트리아에서 실력을 키운 선수들이 분데스리가를 비롯한 상위권 리그의 팀으로 곧잘 이적해 가고 있지요.

대표적인 게 황희찬 선수이고, 서정원 감독도 현역 말년에 오스트리아에서 날아다니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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