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66화 (166/400)

Round 166. 노르웨이에서 온 사람

0 대 0.

이 균형을 무너트리기 위해 잉글랜드와 브라질 양 팀 선수들은 필드에 뜨거운 땀방울을 흘렸다.

하지만 득점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후반전에서 여전히 단단한 잉글랜드의 수비, 그리고 수차례 멋진 선방으로 카나리아 군단을 구한 지우마르의 활약 덕분이었다.

“거참, 양 팀 다 경기력은 나쁘지 않은데 스코어가 아쉽구만.”

“이대로 끝나면 월드컵 최초의 무득점 경기가 될 거야.”

“그것도 나름 기록이군요.”

스코어보드의 시계가 멎은 상황에서 기자들은 오늘 경기의 무승부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필드의 선수들 역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한 방, 단 한 방의 기회를 잘 살릴 수 있다면……!’

부지런히 눈을 굴리며 기회를 포착하던 준영은 수비 가담을 했던 바비 찰튼이 공을 따내자 곧장 브라질 진영을 향해 달려갔다.

‘패스!’

소속 팀 맨유에서 발을 잘 맞춘 덕분에 바비 찰튼은 정확하게 준영이 가는 쪽으로 패스를 넘겨주었다.

마지막 공격 찬스!

90분 동안 뛰느라 땀을 뻘뻘 흘렸던 조니 헤인스와 데릭 케반, 바비 찰튼 3명이 좌우 중앙으로 부챗살처럼 퍼져 나갔다.

그들을 따라 수비가 흩어지자, 자연히 슛을 날릴 공간이 나왔다.

‘마침 풍향도 좋고!’

살짝 공을 툭 쳐 놓았던 준영은 그대로 가속도를 담아 오른발 강슛을 날렸다.

뻐엉-

정면으로 쭉 곧게 날아간 슈팅.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지우마르 골키퍼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잡을 수 없어!’

어설프게 잡으려다간 흘려 버릴 강슛!

그는 양 주먹을 모아 힘껏 펀칭을 날렸다.

퍼억-!

둔탁한 소음과 함께 얼얼한 통증이 손목에 전해졌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리바운드 볼을 향해 데릭 케반이 달려들고 있었으므로.

탱크처럼 벨리니와 카르발류를 밀치고 들어온 데릭은 몸을 던져 발리슛을 날렸다.

지우마르의 손을 스치고 나간 필사의 슈팅은 골대를 넘어가 버렸다.

“크악, 젠장! 하필 떠 버리다니!”

너무나도 아까운 마음에 데릭은 땅을 쳤다.

마지막 찬스를 보고 불끈 주먹을 쥐었던 준영도 머리를 움켜잡았다.

삐익- 삑!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하던 양 팀 선수들은 마주 서서 악수를 주고받았다.

‘펠레도, 가린샤도 없는데 이기지 못하다니…….’

그 둘과의 만남도, 팀의 승리도 얻지 못했다.

결과가 못내 아쉬웠던 준영은 오늘 최고의 활약을 보여 주었던 지우마르 골키퍼와 유니폼을 교환하자는 제스처를 보냈다.

이에 지우마르는 곧장 상의를 벗어 준영의 유니폼과 바꿨다.

“고마워요. 결승전에서 다시 만나요.”

“Até logo(다음에 봅시다).”

눈빛으로 말뜻을 이해한 두 사람은 서로의 선전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

“리 선수, 오늘 경기에 대해서 한마디 해 주시죠!”

“3차전에도 출전하는 겁니까?”

경기가 끝난 후, 준영은 취재하러 온 기자들과 상대해야 했다.

‘근데 왜 이리 많아, 이거?’

영국인 기자들뿐만 아니라 유럽과 남미에서 파견 온 특파원들, 심지어 중국과 일본 취재원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디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를 꺾으면서 국제적인 명성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경기 전에 가린샤와 펠레 두 선수가 출전하지 못한 걸 아쉬워하셨다지요?”

“예, 굉장히 뛰어난 선수들이라 들었습니다. 맞붙지 못해 너무 아쉬웠죠.”

유럽에서도 이름을 날린 선수가 자국 선수들을 높이 평가하는 게 기뻤던지, 브라질 특파원은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프랑스 기자가 물음을 건넸다.

“리 선수는 식품 회사 운영도 한다죠?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는데 프랑스 음식에도 관심이 있는지?”

“네, 오믈렛이나 부야베스를 좋아합니다. 대강 만들 줄도 알고요.”

“혹시 그 요리들이 뛰어난 체력을 유지하는 비결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도움은 되죠. 달걀은 모든 영양소가 든 완벽 식품인 데다, 해산물은 원기를 회복하는 데 좋으니까.”

뭔가 질문이 좀 산으로 갔다 싶을 때, 스페인 기자가 루머를 들먹였다.

“베르나베우 회장의 영입 1순위에 올랐는데 언제 마드리드에 오실 생각인지?”

“글쎄요. 맨체스터에 있을 건데요.”

뒤이어 이탈리아 기자가 엉뚱한 소리를 내뱉기도 했다.

“체사레 말디니 선수와 서로 애인을 걸고 승패 내기를 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애인이 아니라 애마입니다.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십쇼.”

뒤이어 브뤼셀에서 사진에 찍힌 소녀가 애인이냐는 둥, 언제 만났냐는 둥, 어느 정도까지 진척된 사이냐는 둥, 시답잖은 질문들이 날아들었다.

그런 질 낮은 질문에 노코멘트로 일관하며 슬슬 자리를 뜨려고 할 때, 어눌한 영어로 질문이 날아왔다.

“산케이 스포츠의 고바야시입니다. 리준욘 선수, 이번에 나가누마 겐을 비롯한 일본을 대표하는 축구 선수들이 영국 리그 진출을 선언한 것을 아십니까?”

“금시초문입니다.”

그걸 알게 뭔가.

심드렁해하는 준영에게 고바야시라는 일본 기자는 끈덕지게 따라와서 질문을 건넸다.

“같은 동양인 선수로 그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실 수 있는지?”

“영어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해 주고 싶군요.”

낯선 땅에서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

그래서 해 준 말이었는데, 고바야시라는 기자는 준영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고 봤던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든 말든 할 말을 마친 준영은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

호텔에 돌아온 후.

준영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리즈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나야, 리즈. 다들 별일 없지?”

(네, 준은 어때요? 어디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여왕님. 근데 오늘 경기를 비겼어. 맞붙고 싶던 선수들도 안 나왔고.”

그러면서 준영은 간략하게 오늘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야기했다.

(정말 여러모로 아쉬운 경기였겠네요.)

“응, 나중에 결승에서 다시 만나면 그땐 반드시 결판을 내려고.”

(결승까지 가면 6월 말까지 스웨덴에 있는 거죠?)

“맞아. 왜? 뭔가 곤란한 일이라도?”

준영의 물음에 리즈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살짝 일러 주었다.

(실은 준을 만나고 싶다며 멀리서 찾아온 손님이 있어요.)

“멀리서? 혹시 한국에서 온 사람이야?”

혹시 또 김창룡 같은 놈이 온 건 아닌지?

걱정되었던 준영은 당부를 해 놓았다.

“혹시 거만하게 굴거나 쓸데없는 요구를 하면 바로 쫓아내. 행패를 부리면 곧바로 경찰 부르고.”

(괜찮아요. 말은 서툴러도 예의 바른 학생이었으니까.)

“학생?”

(후후훗, 돌아와서 만나면 알 거예요. 아무튼 그쪽에는 좀 더 기다리라고 얘기해 놓을게요.)

도대체 어떤 녀석이 찾아온 건지?

궁금했지만, 큰 문제는 아닌 듯해서 일단 미뤄 두기로 했다.

리즈 말대로 돌아가서 만나도 늦진 않을 듯했으니까.

“알았어. 내일 또 연락할게.”

(네, 내일 연락도 기다릴게요.)

리즈와의 통화를 마친 준영.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가 TV 볼륨을 올린 룸메이트 바비 찰튼이 히죽 웃음을 지었다.

“아주 깨가 쏟아지는군요.”

“부러우면 여친을 만들라고.”

준영의 대답을 들은 바비는 바로 투덜댔다.

“거참, 너무 쉽게 말하네. 리즈 양 같은 착한 여자를 만나는 게 쉬울 것 같아요? 존은 진짜 복 받은 거라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여왕님만 한 아가씨는 없지.”

사실 21세기에 있을 때도 연애를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성격이 안 맞거나, 속물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

“복 받은 건 던컨도 마찬가지이지. 그 녀석도 참 좋은 짝을 만났으니까 말이야.”

“몰리 씨 말이죠? 하긴 재활하는데 뒷바라지를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준영이 바비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호텔 로비의 지배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리 선수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하는 손님이 있어서요.)

혹시 경기장에서 쫓아온 기자인가 생각했는데, 지배인이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리 선수에게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며 보여 줬습니다. 서명을 보니 확실히 일치하더군요.)

“내가 보낸 편지라고요? 혹시 노르웨이에서 왔답니까?”

(예, 오슬로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준영은 통화를 마치고 냉큼 로비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노르웨이에서 온 사람은 진짜 ‘Mr. Lee’인 듯했으니까.

***

로비에 내려온 준영은 깔끔한 차림을 한 동양인 청년을 보았다.

그도 준영을 알아봤는지 곧장 반색을 했다.

“아…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준영 선수. 저는…….”

“알아요. 이철호 씨 맞죠?”

노르웨이 최초의 한국인.

실제로 미스터리 푸드 컴퍼니를 세운 주인공.

다큐멘터리에서 본 사람을 실제로 만나게 되어 반가웠던 준영은 한참 동안 그와 악수를 나눴다.

“반가워요. 꼭 한 번 만나 보려 했는데 먼저 찾아올 줄이야!”

“원래 여유가 되면 영국에 직접 가려고 했어요. 근데 이준영 선수가 스웨덴 월드컵에 참여했단 소식을 신문으로 보게 되었죠.”

그때 이철호는 곧장 지도를 펼쳐 잉글랜드 대표팀 캠프가 있는 예테보리가 어딘지 살폈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오슬로에서 4∼5시간만 차를 타면 되는 가까운 곳임을 확인했다.

그에 곧장 일터에 휴가를 요청해서 이렇게 오게 되었다고.

“분명히 호텔 주방에서 일한다고 했죠?”

“예, 반년 동안 감자 깎이를 하다가 요즘은 조금씩 요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상업학교에서 경영학 쪽으로 공부도 하고 있고요.”

사업가로 역량을 쌓고 있다는 얘기에 준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느끼고 있었다.

미래에 그가 성공시킬 사업 아이템을 자신이 가로채 버렸으니까.

물론 앞으로 30년은 더 지난 다음의 일이고, 준영도 이철호에게 어떤 식으로 보상을 할지 생각을 해 두었다.

“올해 몇 살이죠?”

“21살입니다.”

겉보기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어리다니.

아무래도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듯싶었다.

“내 동생뻘이네요. 어때요? 진짜 형님, 아우처럼 터놓고 지내는 건?”

준영의 기습 제의에 이철호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예? 저, 저야 좋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될지……?”

“얼마든지 되지. 철호 너나 나나 낯선 땅에서 고생하는 신세잖냐.”

그러자 이철호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잘 지내보자고.”

준영은 형제의 연을 맺은 이철호를 앞으로 잘 지원해 줄 생각이었다.

보상해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지만, 투자의 의도도 있었다.

‘혼자서도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지만, 도중에 시행착오나 실패도 적지 않았어.’

그런 이철호에게 제대로 공부하고 사업 경험을 쌓도록 지원해 준다면?

분명 그 재능이 빠르게 빛을 발하고 좀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터이다.

‘미래에 석유왕이 될 발판이라고 하지만, 식품 사업을 접을 필요는 없잖아. 뛰어난 사업가에게 맡겨서 계속 키워 나가야 해.’

노르웨이의 라면왕을 유럽, 아니 세계의 라면왕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하면 자신의 꿈은 뚜렷하게 이루어질 테니까.

***

이철호(1937~2018) 씨에 대해서 다큐멘터리로 본 분들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천안에서 태어나 한국 전쟁 난민으로 노르웨이에 와서 맨손으로 성공해 이민자 최초로 노르웨이 국민 훈장을 받은 분이죠.

셋째 따님인 이리나 리 기자가 쓴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제목의 그의 일대기가 2011년에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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