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65. 하드캐리
‘쳇, 뭐야? 이게 브라질이야, 우라질이야.’
펠레와 가린샤가 출전하지 않은 브라질 대표팀.
그 둘이 없어도 브라질이라는 이름값은 있으니 만만하게 봐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경기가 시작되니 생각하곤 딴판.
‘확실히 개인 기량은 좋아. 하지만 팀 조직력은 꽝이야.’
4-2-4 포메이션을 쓰는 브라질은 전술의 완성보다는 선수들의 개인기와 창의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질서와 통제가 전무한 창의성은 빛을 보기 힘들었다.
공격수들은 연계 플레이가 부족하고, 수비수들의 진영도 공고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니우통 산투스는 공격한다고 너무 전진해 있어서 밸런스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실점했으면 벌써 망하고 남았을 거다.’
사실 브라질 같은 팀들이 있다.
대회 초반에는 조직력이 어수선해서 허당같이 보이다가 토너먼트만 올라가면 귀신같이 강해지는 팀.
‘경기를 거듭하며 조직력이 쌓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마음가짐의 문제도 있을 테지.’
패배해도 다음 경기에서 만회할 수 있는 조 예선과 달리, 토너먼트는 그야말로 물러설 수 없는 한 판이니까.
현재 브라질은 1차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2차전은 어느 정도 여유롭게 해도 된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 점은 잉글랜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쪽도 조 2위가 될 생각은 없었다.
축구 종가의 자존심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존심을 걸고 뛰는 건 준영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밖에 못하냐? 너희들, 전부 레전드급 아냐? 내가 기대했던 만큼 깜짝 놀라게 해 달라고!”
준영의 외침을 브라질 선수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맹수같이 사나우면서도 날카로운 수비는 그들을 주눅 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디노 사니가 자갈루에게 패스, 하지만 그 앞을 존 Y. 리가 막고 있습니다. 주춤하는 자갈루, 페인트 한 번 걸고 돌파해 들어갑니다!」
라디오 중계 캐스터는 자갈루의 플레이에 주목했다.
자갈루는 활동량이 많고, 순간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가 주특기.
그 특기를 살리면 저 맹수 같은 동양의 거인을 제쳐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체격이 큰 만큼 순발력은 부족할 테지. 그 점을 노리고 들어가면……!’
중계 캐스터뿐만 아니라, 지금 공격을 시도하는 자갈루 역시 똑같은 판단을 했다.
그러나 존 Y. 리라는 녀석은 마치 자석처럼 쫓아왔다.
공을 치고 놈의 사각으로 빠져나가고 싶어도 자세를 바싹 낮춘 상태에서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갈루가 치고 들어가려는 방향을 눈치채고 발을 뻗어 공을 가로챘다.
‘이 무슨! 덩치도 큰데 스피드까지 있다고?’
좀 전에 니우통 산투스를 막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
아무튼 곧바로 잉글랜드의 역습이 전개되었다.
준영에게 패스를 받은 조니 헤인스가 빈 공간으로 파고드는 바비 롭슨에게 정확하게 공을 건네주었다.
재빨리 측면을 돌파한 롭슨은 중앙으로 쇄도하던 데릭 케반에게 크로스를 올려 보냈다.
데릭의 이마에 맞은 공은 아슬아슬하게 브라질 골대를 스쳐 갔다.
관중들의 아쉬운 탄성이 울레비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잉글랜드 녀석들, 대단한걸!”
“방금 전 저 3명의 움직임은 그레놀리 삼총사 같아 보였어!”
“무슨 소리. 제법이긴 해도 우리 그레놀리에겐 못 미치지.”
스웨덴 관중들은 잉글랜드의 단단하고 조직적인 플레이에 감탄을 연발했다.
뮌헨 비행기 사고로 국대 핵심 선수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수페르가의 비극을 겪은 이탈리아처럼 전력이 급락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전력은 건재했다. 아니, 더욱 강해진 것 같았다.
“오늘 경기, 어쩌면 잉글랜드가 이길지도?”
“하지만 브라질은 남미 최강이라고!”
“과연 그럴까? 유럽 최강이라는 레알 마드리드를 격파한 주역들이 잉글랜드에 있는데?”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관중들과 달리, 브라질 선수들의 표정에선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러다 정말 오늘 경기에서 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제 생각났어. 저 큰 놈, 디 스테파노를 쓰러트렸다는 바로 그 녀석이야!”
“그런 건 좀 일찍 말하라고!”
“언제 관심이나 있었어?”
브라질 대표팀의 정보력은 썩 좋은 편이 못 되었다.
가까운 남미 국가들이면 모를까, 대서양 건너 유럽의 일을 속속들이 아는 건 힘들었기 때문.
대회 직전에 스웨덴에 와서 모은 정보도 썩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유러피언 컵에 대한 것도 대강 영국 클럽팀이 레알 마드리드를 격파하고 우승했다는 정도였다.
더구나 대다수 선수들도 정보 수집을 중시하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실력으로 얼마든지 제압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쩐지, 디 스테파노를 물먹인 놈이니 저렇게 괴물같이 강한 거로군.”
“어설픈 개인기론 어림도 없겠지?”
“그럼 스피드로…….”
“안 돼! 산투스나 자갈루가 당한 거 못 봤어? 겉보기와 달리 날렵한 놈이라고!”
사실 껄끄러운 15번이 있는 중앙은 놔두고 양쪽 측면을 활로로 뚫어도 된다.
하지만 브라질 공격수들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공격 루트를 다양하게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한때 남미를 주름잡고 유럽으로 떠났던 디 스테파노라는 거물을 쓰러트린 괴물과 맞붙어 보고 싶다는 승부욕이 컸으니까.
‘기왕 붙는 김에 이기면 더욱 좋지!’
‘그럼 난 디 스테파노도 두 손 든 괴수를 쓰러트린 스트라이커가 되는 거니까!’
야심으로 불타오른 브라질 공격수들은 공을 잡으면 준영을 상대로 일대일 돌파를 시도했다.
그중에는 비센치 페올라 감독의 신임을 받고 있는 스트라이커 바바도 있었다.
자신감 있게 덤벼들었던 바바는 정작 준영을 상대로 발재간을 부려 보다 난감함에 빠졌다.
‘젠장, 밸런스까지 좋은 놈이잖아.’
몸집이 크니 밸런스는 떨어질 줄 알았는데 웬걸.
몇 번 페인팅을 걸어도 속지 않거나 금방 균형을 잡아서 따라붙곤 했다.
결국 감당이 안 된다 싶던 바바는 뒤로 공을 돌리고 말았다.
이 거인을 상대로 일대일은 답이 아니란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패스 플레이뿐이야.’
하지만 그 방법조차도 잘 통하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결코 원맨팀이 아니었으니까.
“이 자식들아, 나는 만만해 보이냐?”
“네놈들 골통에 에디 클램프 님의 함자를 선명하게 새겨 주마!”
대표팀 신참의 활약에 자극받은 선배 수비수들이 거침없이 브라질 공격수들을 몰아붙였다.
그들의 의욕이 넘치는 플레이 덕분에 잉글랜드는 계속 주도권을 잡고 경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
브라질의 공격이 부진한 사이, 수비는 대환장 파티를 경험하고 있었다.
준영이 찔러 주는 롱 패스에 몇 번이나 뒷공간이 뚫리는 상황에서 조니 헤인스 역시 기가 막힌 패스를 보여 주었다.
데릭 케반, 바비 롭슨, 바비 찰튼.
이 3명의 공격수들이 번갈아서 헤인스의 패스를 받아 브라질 문전을 쑤시고 다니며 슈팅을 날려 댔다.
“제기랄, 진짜 정신없이 몰아치는구만.”
“조심해, 카르발류!”
주장 벨리니의 다급한 외침에 카르발류는 깜짝 놀랐다.
슬그머니 접근해 온 바비 찰튼이 인터셉트를 시도했기 때문.
황급히 공을 지키려고 했지만, 바비 찰튼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이, 이 자식, 공격수 아니었어?’
전천후 선수로 수비력도 뛰어난 바비 찰튼은 결국 공을 빼앗아 냈다.
‘망했다! 난 이제 죽을 거야!’
바비 찰튼의 슈팅이 터진 순간, 카르발류는 어릴 때 마라카낭에서 보았던 브라질 팬들의 살기등등한 분노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귀국하지 말고 스웨덴에 남아 있는 게 신상에 좋지 않을까?
하지만 카르발류의 망명 계획은 백지화되었다.
골키퍼 지우마르가 구석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슛을 멋진 펀칭으로 걷어 냈던 것!
“정신 차려, 카르발류! 무사히 집에 가야지.”
“미,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카르발류와 달리, 바비 찰튼은 아쉬운 마음에 잔디를 걷어찼다.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 듣던 대로 대단한 골키퍼야.”
코너킥 공격에 가담하러 온 준영은 지우마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전반전 내내 잉글랜드는 경기를 주도하고 여러 차례 유효 슛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득점을 얻지 못했다.
지우마르가 연달아 선방 쇼를 보여 준 덕분이었다.
‘다른 선수들은 변변한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하는데… 그야말로 혼자서 팀을 캐리하고 있구만.’
저러면 후반에 브라질이 살아날 수도 있다.
그러니 골을 넣을 기회가 오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온다!”
“마크할 상대를 놓치지 마!”
빠르고 날카로운 코너킥이 문전으로 날아오자 양 팀 선수들이 낙하지점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유니폼을 잡아당기는 상황에서 뛰어오른 준영은 그대로 머리로 공을 내리찍었다.
지면에 한차례 바운드가 된 공은 골대 오른쪽을 향해 들어갔다.
하지만 골라인을 넘기 직전, 지우마르가 뻗은 손이 공을 쳐 냈다.
리바운드 볼을 바비 롭슨이 밀어 넣으려 했지만, 짐승같이 몸을 날린 지우마르가 공을 잡아챘다.
‘이런 미친! 그걸 막냐?’
20세기 브라질 최고의 수문장.
그는 카나리아 군단의 위신을 꿋꿋하게 지켜 내고 있었다.
***
지우마르의 선방 쇼로 전반을 무사히 넘긴 브라질은 후반전에는 확실히 진지하게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니우통 산투스가 측면에서 제자리를 확실히 지키면서 수비는 훨씬 안정되었고, 공격수들도 활발하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잉글랜드의 빈 공간을 노렸다.
그렇게 조직력을 가다듬은 상태에서 화려하고 창의적인 개인기들이 제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중들도 좀 더 흥이 올랐다.
“저거야! 저게 바로 브라질 축구라고!”
“하지만 잉글랜드 녀석들도 침착하게 잘 막는군.”
브라질의 공격력이 살아났지만,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준영이란 진공청소기를 간신히 넘고 나니, 그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게 국가 대항전을 100경기 가까이 소화한 백전노장 빌리 라이트였기 때문.
“이 자식! 어디서 감히 발바닥으로 공 굴리고 자빠졌어!”
알타피니가 잉글랜드 문전에서 드래그 백을 시도하다 빌리 라이트에게 공을 빼앗겼다.
빌리는 드래그 백과 관련해 트라우마가 있었지만, 이번에 완전히 극복해 냈다.
준영에게서 어떻게 하면 드래그 백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지, 한 수 배웠기 때문.
“옜다! 냉큼 역습으로 연결시켜!”
“알겠습니다, 주장.”
빌리에게 패스를 넘겨받은 준영은 앞으로 공을 치고 가다 바비 롭슨 쪽으로 길게 스루패스를 찔러 넣었다.
하지만 쇄도하는 준비가 약간 늦었던 롭슨이 그 공을 놓치면서 역습은 아깝게 무산되었다.
“와, 몇 번을 보지만 진짜 끝내주는 패스야.”
가린샤와 함께 경기를 보던 펠레는 탄성을 금치 못했다.
잉글랜드의 공격을 주도하는 조니 헤인스의 패스 능력도 일품이지만, 한 번에 푹 찔러 넣는 존 Y. 리의 침투 패스도 정말이지 기가 막혔으니까.
‘헤인스의 패스가 송곳 같다면, 존 Y. 리의 패스는 마체테(정글도) 같아.’
언뜻 투박해 보이긴 하지만, 한번 제대로 걸리면 끝장나는 치명적인 패스.
거기에 매료된 미래의 축구 황제는 존 Y. 리의 움직임을 연방 좇으며 머릿속에 담아 갔다.
***
지우마르(1930~2013)는 대표팀은 물론 소속 팀도 펠레와 같은 산토스에서 뛰어서 ‘펠레의 골키퍼’라고 불렸습니다.
냉정한 판단력과 굉장한 반사 능력을 갖고 있어 브라질이 스웨덴과 칠레 월드컵에서 연속 우승을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겉보기엔 차가워 보여도 성격은 정말 좋아서 동료 선수들, 특히 수비수들이 그를 무척 좋아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