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64.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서전을 기분 좋게 승리한 잉글랜드 대표팀은 6월 11일 열리는 브라질과의 경기를 대비했다.
우데발라에 가서 브라질과 오스트리아의 경기를 보고 온 전력 분석관이 선수들에게 정보를 늘어놓았다.
“재능 있는 선수들이 많더군. 거기다 상당히 공격적이었어. 레프트백이 상대 진영 깊숙이 올라와서 골을 넣을 정도니까.”
“와, 그 자식, 미친 거 아닙니까?”
다들 어이없다는 반응이었지만, 오히려 준영은 그런 동료들의 반응이 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걸 오버래핑이라고 하는 거야, 이 양반들아.’
이 시대에도 수비수나 풀백이 공격에 가담하는 일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세트 플레이 상황에서 가세하거나 공격 패스나 크로스를 해 주는 정도였지, 직접 치고 올라가 골까지 만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전력 분석관의 말을 들어 보니 그 풀백의 공격 가담도 전술적으로 의도한 오버래핑도 아니었다.
감독이나 다른 수비수들은 자제하라 사인을 보내는데 멋대로 올라가서 설쳐 댔다고.
‘미친놈 맞네.’
21세기에서도 그랬다간 징계성 교체를 당할 수 있었다.
무책임한 오버래핑으로 골까지 먹으면 팬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을 것이고, ‘돌아오지 않는 풀백’이라는 별명을 들을 터이다.
“그 정신 나간 녀석, 이름이 뭐죠?”
“니우통 산투스.”
‘헐!’
이름을 듣는 순간, 준영은 자신이 정신이 나갔음을 느꼈다.
니우통 산투스.
강력한 피지컬과 빼어난 공수 능력에 뛰어난 지능을 가진 브라질의 레전드 수비수가 아닌가.
학창 시절 감독과 코치님들이 심심찮게 들먹였던 명인을 미친놈 취급했다니!
“아무튼 조직력은 부족해 보이더군. 포메이션도 특이하던데 완성된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
이 밖에도 전력 분석관은 브라질의 문제점들을 더 지적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빌리 라이트가 물었다.
“재능 있는 선수들이 많다고 했는데, 요주의 대상은 누가 있습니까?”
“일단 바바 대신 출전한 조세 알타피니라는 공격수가 상당하더군. 공 다루는 능력도 좋고, 순간적인 움직임도 상당히 빨랐어. 볼 결정력도 뛰어나고.”
“짧게 말해 좋은 공격수란 얘기군요.”
“그래. 그 녀석을 받쳐 주는 자갈루라는 7번 선수도 인상적이더군. 부지런한 데다 수비 가담도 잘하고.”
전력 분석관의 말에 준영이 흠칫하며 물었다.
“자갈루? 마리우 자갈루 맞습니까?”
“응, 아는 녀석이야?”
“예…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선수로서 기량은 잘 모른다.
준영이 아는 마리우 자갈루는 후대에 감독으로 더 명성을 떨쳤으니까.
“혹시 그 경기, 가린샤나 펠레는 출전하지 않았습니까?”
“가린샤? 악마의 드리블러라고 소문난 녀석 말이야? 그놈은 출전하지 않았어. 펠레라는 애송이도 마찬가지이고.”
브라질은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 주전급 선수들을 출전시키지 않은 걸까?
아무튼 그 추정은 미루기로 하고, 준영은 전력 분석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나 놓치는 게 있을까 싶어 수첩에 적어 가면서.
나중에 복습하기 위함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숙지해 두어야 브라질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테니까.
‘현장에서 찍은 경기 영상 같은 게 있으면 훨씬 좋을 텐데.’
지금은 전력 분석을 하는 데 영상 기기를 활용하지 않고 있었다.
휴대용으로 쓸 만한 장비들이 전무한 것은 아니다.
준영이 알아본 바에 따르면 16밀리미터나 8밀리미터 필름을 쓰는 휴대용 영상 카메라들이 있었다.
물론 미래의 캠코더만큼 편리하진 않다. 재생 시간도 짧고 가격도 상당히 비쌌지만, 활용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아직 거기까진 생각을 못하는 거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고.’
아무튼 거기에 대해서는 월드컵이 끝난 다음에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지금은 브라질을 상대하는 데 집중해야 하니까.
‘가린샤, 펠레… 다음 경기에는 반드시 나오겠지?’
같은 시대에 뛰고 있는 최강 전설의 플레이어들.
만나기도 힘든 그들과 대면할 기회가 생겼으니, 반드시 맞부딪쳐 보고 싶었다.
***
1958년 6월 11일 저녁.
예테보리의 울레비 경기장에 월드컵 4조 경기 2차전 브라질과 영국의 경기를 보기 위해 4만여 명의 관중들이 모였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지난 경기와 거의 변동 없이 그대로 출전했다.
바뀐 점이 있다면 톰 피니를 대신해서 바비 찰튼이 출전했다는 점.
사실 윈터보텀 감독은 톰 피니의 대타를 두고 고민했다.
리버풀의 공격수 알란 아코트와 맨유의 바비 찰튼을 저울질하다 결국 바비 찰튼을 뽑았다.
‘바비 찰튼은 다재다능하게 이용할 수 있어. 활동력도 좋고 공격력도 나쁘지 않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결승 골을 넣었을 정도니까…….’
바뀐 역사로 인한 수혜를 입게 된 바비 찰튼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기대는 했지만,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월드컵 본선 경기에 출전하게 될 줄이야!
“너무 쫄 거 없어.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된다고.”
준영은 바비 찰튼의 어깨를 도닥이며 긴장을 풀어 주었다.
그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바비도 미소를 지었다.
소속 팀에서든, 대표팀에서든 가장 든든한 동료의 격려를 받으니 떨리는 기분이 사그라들었다.
“존은 뭔가 즐거워 보이네요?”
“즐겁지.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플레이어들과 맞붙는 거잖아.”
1차전도 이겨서 오늘 경기는 한결 여유로웠다.
그만큼 부담감이 적으니 브라질의 톱 플레이어들을 상대로도 마음껏 겨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카나리아 군단은 오늘 누가 출전하는지 볼까?”
팀원들과 함께 라커룸을 나간 준영은 대기실에서 멈춰 섰다.
오늘 경기의 주심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존, 저 사람, 우리가 AC 밀란이랑 경기할 때 나왔던 독일 심판 맞죠?”
“그래. 이름이 알베르트 두쉬였던가?”
좀 아쉬운 구석은 있지만, 그래도 공정하게 판결하려고 노력하던 사람.
자신들을 보며 아는 척하는 심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준영은 막 라커룸에서 나온 카나리아 군단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어디 보자, 누가 나오셨나?’
준영은 신문과 잡지로 본 브라질 대표팀의 사진을 떠올리며 오늘 상대 선발 선수들을 살폈다.
골키퍼는 지우마르 두스 산투스 네베스.
브라질에서 20세기 최고의 골키퍼로 손꼽는 수문장으로, 준영도 21세기에 있을 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수비수는 주장 힐데랄도 벨리니와 올란도 페사냐 드 카르발류, 측면 풀백은 니우통 산투스, 니우통 데 소르디.
‘미드필더는 디노 사니와 디디, 공격수는 마리우 자갈루에 조세 알타피니, 조엘, 바바…….’
상대 선발 11명을 모두 확인한 준영.
들뜬 기분이 차갑게 식어 버리는 가운데, 밀려오는 실망감에 버럭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뭐야! 가린샤 어디 갔어? 펠레는!”
급흥분한 준영의 반응에 잉글랜드 선수들은 물론 브라질 선수들도 당황했다.
키 큰 동양인의 입에서 왜 자기 팀 애송이들의 이름이 나오는 걸까?
말은 못 알아듣겠지만, 반응을 보자니 그 둘이 안 나왔다고 짜증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기대 만빵이었는데 안 나오면 어쩌냐고! 왜 안 나오는 건데, 왜?”
한국어로 연방 분통을 터트리는 준영에게 브라질 선수들이 손짓발짓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부상으로 못 나온다는 모양이야.”
“오, 이런 젠장!”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결국 악마의 드리블러와 축구 황제와의 만남은 나중으로 미뤄지고 말았다.
***
잠시 후, 양 팀 선수들이 필드로 나왔다.
기념사진을 찍고, 선전의 악수를 나눈 그들은 동전 던지기로 진영을 정했다.
시계를 보던 주심 알베르트 두쉬는 오후 7시가 되자 곧바로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을 불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경기장 한쪽에 자리한 흑인 소년.
그는 아쉬움과 흥미가 반반인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막내야! 이거 마시면서 봐.”
“고마워요, 마누에우 형님.”
소년은 쾌활하지만 어수룩해 보이는 청년이 건네는 콜라를 받았다.
사이좋게 자리에 앉아 콜라를 마시는 두 사람.
그냥 구경만 하기엔 따분했던지, 마누에우가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막내야, 네가 보기엔 누가 이길 것 같아?”
“당연히 브라질이죠! 최강의 공격력을 가졌잖아요. 전반전이 끝나기 전에 2골은 넣을걸요.”
“음, 잉글랜드가 그리 쉬운 상대는 아닌데…….”
마침 브라질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디디의 패스를 받은 알타피니가 툭툭 드리블을 해 가며 잉글랜드 선수들을 제쳤다.
“잘한다! 계속 돌진하라고!”
“아냐. 패스! 바바의 위치가 더 좋다고!”
알타피니는 패스보다 슛을 선택한 듯, 페널티 아크에서 슈팅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 괴물 같은 덩치를 가진 동양인 선수가 어깨로 그를 밀어내곤 공을 빼앗아 갔다.
근처에 있던 마리우 자갈루가 파울이라고 어필했지만, 심판이 고개를 저으면서 경기는 그대로 진행.
공을 잡고 전진하던 동양인은 달려드는 디노 사니의 마크를 한 바퀴 돌면서 뿌리쳤다.
둔해 보이는 장신의 선수가 보여 주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드리블에 관중들은 물론 소년과 마누에우도 감탄을 터트렸다.
“와, 저게 축구 종가의 기술!”
“흥, 저 정도는 나도…….”
마누에우는 도중에 말을 잇지 못했다.
살짝 전방을 응시하던 동양인이 툭 하니 롱 패스를 찔러 넣었는데, 그게 정확히 브라질 수비 뒷공간에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패스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잉글랜드 19번 선수가 공을 향해 달려갔다.
“골키퍼와 일대일이야!”
“위, 위험해!”
소년과 마누에우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잽싸게 달려 나온 골키퍼 지우마르가 19번이 공을 잡기 직전에 멀리 차 냈다.
“와, 진짜 위험했어.”
“저 동양인, 키만 큰 게 아니구나.”
발재간이 좋을 뿐만 아니라, 시야도 넓고 패스까지 정확히 찔러 넣을 줄 알았다.
만약 지우마르 골키퍼의 대처가 조금만 늦었다면 틀림없이 실점을 하고 말았으리라.
한 차례 위기를 모면한 브라질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빌리 라이트가 버티고 있는 최후방 수비진은 튼튼했고, 그 앞에서 활개 치는 장신의 동양인은 가차 없이 브라질의 패스를 끊어 냈다.
“아무래도 힘들겠는데?”
“산투스 아저씨가 가세하지 않으면…….”
소년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풀백인 니우통 산투스가 공격으로 올라왔다.
디디와 패스를 주고받으며 전진하던 그는 문제의 동양인과 맞대면했다.
툭툭 치고 들어가다 한순간 잽싸게 제치고 들어가려 했지만, 동양인은 낚이지 않고 길목을 막았다.
안 되겠다 싶었던 산투스는 공의 밑동을 툭 쳐올려 동양인의 머리 위로 공을 넘겼다.
하지만 영악한 동양인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고, 등지면서 슬쩍 옆으로 우회하는 산투스를 막았다.
그러곤 떨어진 공을 가까이 있던 동료에게 건넸다.
‘와, 산투스 아저씨가 저렇게 간단하게 막히다니!’
소년의 눈은 동양인 선수의 움직임을 좇았다.
마치 산투스가 했던 것처럼, 그 역시 공격에 가담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거기다 굉장히 빠른 판단력과 간략하지만 깔끔한 드리블까지!
“마누에우 형, 저 동양인, 이름이 뭐죠?”
“잉글랜드 15번이면…….”
경기 팸플릿을 펼쳐 보았던 마누에우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하, 뭐라고 적혀 있는지 모르겠어.”
“쩝, 줘 봐요.”
까막눈인 마누에우에게서 팸플릿을 받아 든 소년은 15번의 이름을 확인했다.
“존… 영… 리.”
다시 필드로 눈을 돌린 소년은 존 Y. 리의 플레이를 바라보았다.
“아깝네요. 저런 수비수를 상대로 플레이하면 재밌었을 텐데.”
“그러게. 구경만 하기엔 너무 아까워.”
아쉬움을 토로하는 두 사람.
그들이 바로 훗날 축구 황제라 불리는 펠레와 악마의 드리블러 가린샤였다.
***
왼쪽이 가린샤(마누에우), 오른쪽이 펠레입니다.
둘 중 누가 더 뛰어나냐는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지요.
아무튼 현역 시절에 이 두 사람의 시너지는 극강이라서 둘이 출전해서 진 경기는 없을 정도로 찰떡 콤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