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63. 유랑자의 메시지
예테보리.
스웨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항구 도시다.
현재 이곳에선 제6회 월드컵의 4조 1차전 소련과 잉글랜드의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각국에서 몰려온 기자들의 카메라는 필드에서 각축을 벌이는 선수들의 모습을 담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들의 카메라에 가장 많이 들어온 선수는 잉글랜드 15번 존 Y. 리.
오늘 경기 하프백으로 선발 출전한 준영은 중원에서 부지런히 소련의 예공을 차단했다.
「발렌틴 이바노프, 브라이언을 따돌리고 패스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존 Y. 리가 끊어 냅니다!」
코앞에서 공을 뺏긴 니키타 시모니안이 태클을 날렸다.
살짝 주춤했지만, 그래도 준영은 공을 갖고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곤 조니 헤인스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패스를 밀어 주었다.
“우와, 순식간에 역습을 만들어 내는 것 좀 봐!”
“굉장하군! 저 동양인, 대체 누구야?”
“이런, 모르는 거야? 저 녀석이 레알 마드리드를 쓰러트렸다고!”
준영의 활약에 원정 응원을 온 잉글랜드 팬들은 물론, 스웨덴 관중들까지 탄성을 터트렸다.
그 환호성은 전반 15분에 더욱 커졌다.
톰 피니가 끌고 가다 뒤로 흘려준 공을 벼락같이 달려든 준영이 받아 강슛을 날린 것!
터어엉-!
왼쪽 포스트 바를 세차게 맞힌 슈팅이 코너 쪽으로 튕겨 나갔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레프 야신은 슬쩍 골대를 만져 봤다가 깜짝 놀랐다.
골대에서 미세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
‘세상에, 무슨 슈팅이…….’
골대를 부쉈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무래도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혀를 내둘렀던 야신은 얼이 빠져 있는 수비수들을 보고 냉큼 호통을 터트렸다.
“정신 차려, 보리스! 공이 아직 살아 있다고! 유리, 측면에서 크로스 못 올리게 막아! 케사레프 이 자식아, 공격수 놓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야신은 쉴 새 없이 고함치며 수비수들을 다그치고, 슈팅을 막아 냈다.
알아듣진 못해도 시끄럽다 보니 톰 피니는 귀를 막지 않을 수 없었다.
“존, 다음번엔 저 자식 입에다 축구공을 박아 넣어. 시끄러워서 경기 집중을 못하겠다.”
“하하하, 노력해 보죠.”
일단은 득점을 만들어야 저 투머치토커가 조용해질 것 같았다.
아무튼 아직 점수가 나지 않은 점을 제외하면 경기는 순조로웠다.
이렇다 할 공격 찬스를 만들지 못하고 성급하게 중거리 슛만 날리는 소련과 달리, 잉글랜드는 차근차근 상대 수비를 헤집고 있었으니까.
‘철벽같은 야신의 선방에 균열이 가는 순간, 전세는 완전히 기울어질 거야.’
이렇게 생각한 건 준영뿐만 아니라 경기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
소련은 지난달 홈에서 열린 평가전에서 잉글랜드에게 분패를 당했다.
그렇다 보니 본선에서는 반드시 되갚아 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전반전이 다 끝나 가는 동안 변변한 찬스를 잡지 못했다.
“최전방의 니키타 시모니안, 세르게이 살리코프, 아나톨리 일린, 이들 공격수들에게 제대로 공이 가지 못하고 있어.”
“중원에서 패스가 다 끊기고 있으니까.”
“특히 저 15번이 대부분 차단하고 있어.”
공중볼은 물론, 낮게 들어오는 패스까지 모조리 끊어 버렸다.
공이 가는 곳 주변에는 항상 자리를 잡고 있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량을 보이는데, 이런 움직임은 소련 미드필더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완전 진공청소기가 따로 없군.”
“오버 페이스야. 지금은 몰라도 후반전엔 퍼지고 말걸.”
하지만 오버 페이스가 아니라는 건 이미 한 번 겪어 본 소련 선수들이 더 잘 알았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후반전에서도 준영의 활동량에는 변함이 없었다.
“저 녀석, 인조인간인 게 틀림없어.”
“인조인간이 어딨어? 아마 각성제라도 잔뜩 먹고 나왔겠지.”
관중들이 오해하든 말든, 준영은 활발히 움직이며 중원을 장악했다.
그 덕분에 잉글랜드 수비수들은 한결 막아 내기 수월해졌다.
패스를 이용한 연계가 시원찮은 소련 측이 할 수 있는 건 미드필드를 생략한 롱 패스와 성급한 중거리 슛뿐이었으니까.
“거참, 적일 때는 그렇게 얄밉더니만, 같은 편일 때는 진짜 든든하단 말이지.”
너털웃음을 지었던 빌리 라이트는 방금 헤딩으로 가로챈 공을 준영에게 보냈다.
경기가 안 풀리자 화가 났던지, 소련 미드필더가 발바닥이 보일 정도로 높은 태클을 날렸다.
‘저런 시벌노무시키.’
슬쩍 태클을 피한 준영은 빌리가 보낸 패스를 방향만 돌려서 바비 롭슨 쪽으로 보냈다.
그 절묘한 논스톱 패스에 관중석에서 또 한 번 탄성이 터져 나왔다.
“Go! Go!”
“이번엔 반드시 넣는다!”
준영의 패스를 받아 측면을 시원하게 내달린 바비 롭슨은 소련 페널티 박스로 파고드는 조니 헤인스에게 패스를 보냈다.
소련 수비수들이 황급히 헤인스에게 붙었지만, 정작 헤인스는 롭슨의 패스를 흘려버렸다.
그리고 그 패스를 받은 건 데릭 케반.
데릭은 야신과 일대일 상황에서 과감히 슈팅을 날렸다.
‘이건 들어간다!’
‘어림없다!’
확신을 하고 날린 데릭의 슈팅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인 야신의 다리에 맞고 튕겨 났다.
역시나 거미손!
감탄하던 소련 수비수들 사이로 준영이 비호같이 파고들었다.
삼사자 군단의 호랑이는 리바운드 볼을 그대로 소련 골대 안에 밀어 넣었다.
“들어갔다-!”
“저 자식, 결국 저질러 버렸어!”
경기장이 환호성으로 크게 들썩이는 가운데, 준영은 카메라를 든 기자들 가까이 다가가 보란 듯이 웃통을 벗어 던졌다.
‘어라, 속에 유니폼을 하나 더 입고 있었잖아?’
‘저 이상한 엠블럼은 대체… KOREA?’
백호 엠블럼과 그 아래 새겨진 5개의 알파벳, 그리고 붉은 유니폼에 선명하게 돋보이는 태극기.
바로 준영이 2026년 북미 월드컵 때 입었던 유니폼이었다.
그동안 가방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이 유니폼을 오늘 다시 입고 나왔다.
‘나는 이 시대에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뛰고 있다!’
미래에서 온 유랑자의 이런 메시지를 먼 훗날 누군가 알아주기를.
숨겨 둔 정체성을 잠시 드러냈던 21세기 대한민국 대표 선수는 다시 필드로 돌아갔다.
***
후반 60분에 터진 준영의 선제골로 기선을 제압한 잉글랜드는 약 10분 후 바비 롭슨이 돌파 과정에서 페널티킥을 얻어 냈다.
그리고 키커로 나선 톰 피니가 이것을 가볍게 성공, 2 대 0으로 앞서 나갔다.
소련은 이후 도널드 하우의 실수를 틈타 시모니안이 만회 골을 넣었다.
하지만 승부를 뒤집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경기는 2 대 1로 마무리.
서전에서 승리를 거둔 잉글랜드는 오스트리아를 3 대 0으로 제압한 브라질과 공동 1위에 올랐다.
이 승전은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지구 반대편 한국까지 들썩이게 만들었다.
“와, 이준영이 또 엄청난 활약을 했군!”
“정말 쾌거가 아니냔 말이지! 한국 선수가 월드컵에서 골을 넣다니!”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시큰둥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흥, 쾌거는 개뿔. 누가 보면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나간 줄 알겠소.”
“맞아. 이준영 그놈은 한국 사람이 아니잖아.”
하지만 이런 의견은 소수였고, 곧장 다수파에게 반박을 당했다.
“무슨 소리! 여기 이 사진을 보라고! 코리아라는 단어 보이지?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뛴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맞아. 조국을 잊었으면 이렇게 하지도 않을걸.”
준영의 21세기의 유니폼은 약간은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 반응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특히 경무대의 높으신 분도 그랬다.
“참으로 기특한 젊은이가 아닌가. 해 준 것도 없는 조국을 이렇게 마음에 두고 있으니 말이야.”
신문 1면에 실린 커다란 사진을 보며 껄껄 웃던 늙은 대통령의 말에 곽영주 경무관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사옵니다, 각하. 실로 갸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곽영주는 대한축구협회장 김윤기를 비롯해 여러 장관들을 쏘아보았다.
이준영이 아시안게임 차출을 거절하고 이후 영국 대표팀을 선택했을 때, 장관들이 자신을 두고 빈정거린 일이 있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들이켜는 사람이 있다는 둥, 아직 젊어서 생각이 없는 것 같다는 둥.
그때 얼마나 무안하고 분통했는지 모른다.
이제 그것을 갚아 줄 시간이다.
“이준영이가 이렇게 조국을 생각하는데, 나라를 등졌다는 둥, 무늬만 한국인이라는 둥 지껄인 분들 있지요? 다들 반성하십시오!”
“영국 대표팀을 선택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체신부장관 이응준의 불만스런 대꾸에 곽영주는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거야 영국 정부가 받아 주고 축구를 하게 해 준 걸 고맙게 여겨서 은혜를 갚으려 그런 거라고 본인이 말했잖습니까!”
“말이야 그럴듯하게 할 수 있죠. 속내를 누가 알겠습니까?”
이응준의 반박에 곽영주는 코웃음을 쳤다.
“거참, 그러는 이 장관님께선 나라를 사랑해서 속내를 감추고 왜놈 군대에 들어가셨습니까? 대좌 계급 달고 학도병 참전 독려 연설을 하고 다녔고요?”
“뭐라고!”
자신의 흑역사가 들춰지자 이응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당장이라도 곽영주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야, 인마 너는! 넌 뭐가 잘났다고! 네놈도 일본군에 자원해서 군조까지 된 주제에!”
“그만! 그만!”
이승만이 핏대를 올리며 탁자를 내리치자, 두 사람은 이내 입을 닫아걸었다.
“그만들 해. 지난 일을 들춘다고 좋을 게 뭐가 있나. 그럴 시간에 좀 더 건설적인 일을 해야지!”
“죄송합니다, 각하.”
꾸벅 허리를 숙이는 곽영주에게 손을 내저은 이 대통령은 대한축구협회장 김윤기를 바라보았다.
“김 회장, 지난번에 자네가 말했었지? 이준영이가 한국 국적도 없는데, 한국 대표팀에 뽑으면 안 된다고 말이야.”
“예, 각하. 제가 알아본 바로는 국적도 없는 상태에서 대표팀에 발탁하면 국제축구연맹에서 해당 선수에게 징계를 내린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군. 이보게, 조 장관. 현재 우리나라는 복수 국적이 금지되어 있지?”
“그렇습니다, 각하. 이게 아무래도 악용할 수 있기에…….”
외무부 조정환 장관의 말에 이승만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일세. 예전에 나라를 잃었을 때 망명한 사람들도 많지 않나? 그렇게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지.”
생계가 힘들어 나간 이민자들이나, 일제와 투쟁하기 위해 망명한 독립투사들의 후손들 중에서도 귀국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저들도 현지에서 힘겹게 자리를 잡았을 텐데, 이제 와서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하면 꺼려질 수밖에 없을 게야.”
“각하, 그럼 허용해 줘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전면 허용은 당연히 안 되겠지. 하지만 국가에서 심사해서 국가 재건에 힘이 될 인재들에게는 허용해 줘도 되지 않겠나.”
현재 한국 내각에는 부흥부라는 부처가 따로 있을 정도로 전후 재건에 힘을 쏟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말은 그럴듯해 보였지만…….
‘결국 이준영이를 뽑자고 저러시는 건가?’
‘그뿐만은 아니겠지. 원래 각하의 텃밭이 미국과 하와이인 점을 생각하면 이는 정치적인 노림수일 수도 있어.’
다들 이모저모 생각해 보았지만, 누구도 ‘아니 되옵니다!’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다만 에둘러 말하는 이는 있었다.
“그러한 특별법은 일단 국회에서 통과되어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 우리도 명색이 민주주의 국가인데 절차를 거치는 게 중요하지. 자유당에 내 뜻을 전해 두도록.”
준영의 선전은 원래 없었던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득이 될지 해가 될지 알 수 없는 변화를.
***
예전에 K리그에 마시엘이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1997년에서 2003년까지 전남에서 뛰며 184경기를 출전했는데 당시 김태영, 강철 선수와 더불어 마태철이라 불리는 단단한 수비 라인을 꾸려 명성이 높았지요.
워낙 좋은 활약을 보여 주었기에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에서 귀화 제안도 했고, 본인도 한국 대표로 월드컵에 나가고 싶어 솔깃해했지만, 한국과 브라질 복수 국적은 안 된다는 걸 알고 포기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