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62화 (162/400)

Round 162. 또 다른 변동

5월의 마지막 날.

준영은 어제 정리해 두었던 여행용 캐리어에 새 옷과 세면도구 등이 제대로 들어 있나 체크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확인을 마친 준영은 정장에 모자를 눌러쓰곤 방에서 나왔다.

손녀들, 그리고 고용인들과 더불어 그를 배웅하러 나온 알버트가 혀를 찼다.

“어제 돌아왔는데 다시 출국이라니…….”

“삼사자 군단에서 애타게 찾고 있는데 응하지 않을 수 없잖습니까.”

“하긴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긴 하지.”

준영의 이번 행선지는 스웨덴.

이번 월드컵에 참여하는 잉글랜드 대표팀에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월드컵행 막차에 올라탄 것은 분명 기뻐할 일이지만, 알버트는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리그가 끝나고 유러피언 컵 일정, 그리고 곧바로 또 월드컵.

“거기다 스웨덴에서 돌아오면 다음 시즌에 대비해서 팀 훈련에 들어가겠지. 안 그런가?”

“예, 감독님이 전지훈련 계획을 짤 거라고 들었습니다.”

상태가 많이 호전된 맷 버스비 감독은 서둘러 다음 시즌을 준비하려 했다.

그는 맨유가 유러피언 컵 결승전을 준비하는 사이, 조 암스트롱과 더불어 다음 시즌에 영입할 선수까지 골라 두었다고.

“축구 선수니까 그런 일정이야 당연하겠지만, 리즈가 염려하고 있네. 그러니 그 애가 속이 탈 만한 일은 없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근데 리즈는 어딜 간 거죠? 안 보이는데…….”

알버트의 곁에 있는 건 앤지와 카린뿐.

준영이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리즈가 나타났다.

그녀는 준영에게 십자가와 여러 가지 문양들이 새겨진 로켓을 건넸다.

“탈리스만(Talisman)이라는 거예요. 돌아가신 어머니가 주신 건데,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호해 주고 행운을 안겨 준대요.”

“이런 귀한 것을…….”

“안에 제 머리카락을 넣어 놨어요. 그러니까 잃지 않게 항상 지니고 있어요.”

리즈의 말에 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탈리스만을 목에 걸었다.

“고마워. 잘 다녀올게.”

준영은 리즈를 가볍게 포옹한 후, 키스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환호성을 터트렸지만, 알버트는 좀 못마땅했던지 헛기침을 크게 내뱉었다.

“그러다 비행기 놓치겠구먼.”

‘시간 아직 넉넉하거든요.’

작별 키스를 마친 준영은 차에 올랐다.

출발하기 직전, 리즈가 말했다.

“준, 대입 시험 끝나면 스웨덴에 응원하러 갈게요. 그러니까 내가 갈 때까지 탈락하면 안 돼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여왕 폐하. 왕림하시기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손을 흔드는 연인을 뒤로하고 준영은 다시 길을 떠났다.

약 1년 전에는 기대하지도 못했던 월드컵.

유럽과 남미에서 뛰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선수들과 맞붙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

간드러지는 비파 소리가 들려오는 화려한 기방.

이곳에 5명의 축구 선수가 정좌로 앉아 있었다.

일본 국가대표를 지내고 현재 실업팀 후루카와 전기에서 뛰고 있는 수비수 히라키 류조, 하프백 야에가시 시게오, 공격수 나가누마 겐.

나머지 둘은 작년 도쿄대를 졸업한 오카노 슈니치로와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인 가와부치 사부로였다.

“도대체 야쿠자 두목이 우릴 왜 찾는 걸까요?”

“운동선수니까 힘 좀 쓴다고 여기는 게 아닐까?”

“거참, 난 야쿠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데.”

후루카와 3인방이 쑥덕이는 가운데, 오카노 슈니치로는 벽 한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오늘이 6월 8일…….”

“왜요? 뭔가 특별한 날입니까?”

가와부치 사부로의 물음에 오카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스웨덴에서 제6회 월드컵이 시작되지.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들이 자웅을 겨루고 있을 거란 말이지.”

그리 말한 오카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우리 수준에선 꿈꿀 수 없는 무대야.”

당장 지난달 아시안게임 축구에서도 일본은 홍콩과 필리핀에 밀려 조 예선 탈락을 했다.

아시아에서도 그 수준인데 어찌 월드컵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오카노 씨, 그런 패배주의에 찌든 말은 하지 마십쇼! 우리 일본도 월드컵에 나갈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그래, 언젠간 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패기 넘치는 가와부치를 보며 오카노나 후루카와 3인방이 피식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좍 열리면서 양복 차림의 대머리 노인과 하오리를 걸친 험상궂은 장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선수들의 시선이 하오리 차림의 남자에게 쏠렸다.

그가 바로 야쿠자 두목, 정치 깡패로 유명한 코다마 요시오였으니까.

‘그런데 저 대머리 노인네, 낯이 익은데…….’

오카노가 주목한 대머리 노인은 날카롭게 눈알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큰소리 탕탕 친 게 누구지?”

“저, 접니다.”

조심스럽게 손을 든 가와부치의 앞으로 다가온 노인은 함박웃음을 짓더니 그의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이거야! 암! 야마토의 사내라면 그런 기백이 있어야지! 이런 친구가 지난 전쟁 때 있었으면 귀축영미에게 수모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침을 튀기며 가와부치를 칭찬한 노인은 잠시 후 술상과 함께 게이샤들이 들어오자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네, 제군. 이 몸은 구 제국군 육군 대좌이자, 이시카와 현직 중의원인 츠지 마사노부라고 하네.”

거창한 소개에 오카노의 얼굴이 은박지처럼 구겨졌다.

“작전의 신이라 불린 분이시군요.”

“하하하, 그 별명을 아직 기억하는 친구가 있을 줄은 몰랐구먼.”

괜히 왔다.

자칭 작전의 신이라 거들먹댔던 죽음의 신을 만나게 될 줄이야.

‘그래도 궁금하긴 하군. 이 교활한 간신배가 우리 같은 운동선수들을 왜 부른 건지 말이야.’

안 그래도 츠지가 그 이야기를 했다.

“자네들, 영국에서 축구를 하는 동양인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겠지?”

“리준욘 말이군요. 알고 있습니다.”

후루카와 3인방 중 히라키 류조가 눈빛을 반짝였다.

안 그래도 자신과 같은 수비수라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놈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았지. 일본인일 거라고 기대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렇진 않았어.”

“네, 기대했다가 실망한 사람들이 많긴 했죠.”

축구 종가 영국의 중심에서 축구로 백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드는 선수가 일본인이 아니었다니.

심지어 사실은 조센징이었다니!

“우리가 얼마 전에 리준욘과 접선한 적이 있었어. 어느 정도 말이 통할 줄 알았는데 기대에 어긋났지.”

술 한 잔을 들이켠 츠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인이 아니라도, 흑룡회 쪽 연줄과 조직원을 동원하면 대동아공영을 부활시킬 초석으로 써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온 건 총알 세례.

조직원들은 죄다 현장에서 사살당하고, 노구를 이끌고 설득하러 갔던 박춘금은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나중에야 리준욘이 후테이센징과 손을 잡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심지어 런던의 일본 대사관에서 전한 정보를 들으니, 그의 부모와 지인, 심지어 본인조차도 MI6의 정보원이었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같은 편이 되라고 꼬드기려 했으니!

“흥, 조센징 따위에게 기대하신 게 잘못입니다.”

“맞습니다. 내선일체로 가르치고 보살펴 준 은혜도 모르는 짐승 같은 것들 아닙니까. 아니, 짐승도 은혜는 알아요!”

나가누마 겐의 말에 가와부치가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반응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린 츠지가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에 영국 축구협회가 외국인 선수 영입 제안 조건을 완화했다고 하더군.”

“어떻게 완화된 겁니까?”

“영어를 못하는 선수도 출전이 가능해졌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자네들도 영국에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거지!”

츠지의 말에 나가누마와 가와부치, 그리고 히라키까지 반색을 했다.

유럽, 그것도 축구의 종가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마음이 들떠 올랐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오카노는 냉소를 지었다.

***

“그렇다 한들 영국의 어떤 팀이 일본 선수를 영입하겠습니까? 1부는커녕 2, 3부 팀도 어림없을 겁니다.”

냉정하게 현실을 말하는 오카노에게 나가누마가 버럭 호통을 쳤다.

“이봐, 조센징인 리준욘도 활약하는데 왜 우리 일본인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

“나가누마 씨, 리준욘은 필리핀의 알칸타라 수준으로 별종이야. 당신 따위가 감히 운운할 선수가 아니라고.”

“뭐, 뭐라고?”

나가누마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지든 말든, 오카노는 그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거기다 당신도 국가대표라면 현실을 알 텐데? 월드컵 예선에서 한국에게 호된 꼴을 당했으면서 그들을 깔보다니, 진짜 주제 파악도 못하는군.”

“이 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술상을 박차고 일어난 나가누마가 오카노의 멱살을 잡으려 할 때였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코다마 요시오가 버럭 호통을 쳤다.

“그만하지 못하겠나! 멱살 잡고 싸우라고 네놈들을 부른 줄 알아!”

야쿠자 두목의 서슬 퍼런 기세에 나가누마는 진땀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너희가 지금 일본에서 제일 축구를 잘하는 놈들이라 들었다! 그래서 기회를 주려고 부른 거야!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츠지 의원님 말씀을 들어!”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장내가 조용해지자, 츠지가 다시 5명의 선수에게 말했다.

“방금 코다마 씨가 말했듯이 우린 자네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네. 진짜 일본인인 자네들이 영국에서 활약하면 국민들도 그만큼 힘이 나지 않겠냔 말이지.”

츠지는 일본이 다시 부흥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자부심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미국이나 유럽을 상대로도 지지 않는다는 희망과 자신감.

스포츠라는 총성 없는 전쟁은 그것을 보여 주기 딱 좋았다.

‘거기다 스포츠는 사람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떼어 놓을 수도 있지.’

현재 일본 정치판을 생각하면 빵과 서커스는 필수적.

츠지가 내심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을 때, 히라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근데 기회를 주신다는 게 어떤 건지……?”

“그거? 자네들이 영국 프로팀, 그것도 1부 팀에 입단할 수 있게 우리가 도와주겠네.”

“어떻게 말입니까?”

츠지는 술로 살짝 목을 축인 후에 자세한 지원책을 이야기했다.

“우리랑 협력, 후원하는 기업과 자본가들이 있지. 그들이 자네들의 스폰서가 되어 입단을 성사시킬 거야.”

“저, 정말입니까?”

“그럼! 자네들은 거기서 활약하며 야마토 민족의 기상을 떨치기만 하면 돼.”

히라키는 물론이고, 나가누마와 가와부치까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오카노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오카노 군, 자네는 생각이 없나?”

“전 서독 유학을 준비 중이라서 말입니다. 저 나름대로 그쪽에서 선진 축구를 배울 겁니다.”

“그래? 서독에서 축구 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데, 어떤가?”

“뜻은 감사하지만, 그냥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적을 약하다고 단정하고 작전을 짜는 인간을 어떻게 믿고 도움을 받아들이겠는가.

더구나 군인으로 일말의 책임 의식도 없던 작자인데 말이다.

“야에가시 군? 자네도 생각이 없나?”

야에가시의 표정은 오카노보다 더 좋지 않았다.

들어 보니 결국 실력이 아니라, 돈을 써서 입단한단 얘기가 아닌가.

이건 뇌물로 청탁하는 거나 다를 게 없었다.

“저는 기대에 부응해 드리지 못할 듯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쩝, 어쩔 수 없지.”

결국 히라키 류조, 나가누마 겐, 그리고 가와부치 사부로 이 세 사람이 영국으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이준영이 일으킨 폭풍은 또 다른 변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

1. 실업팀 후루카와 전기는 현재 J리그 2부 리그팀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 치바로 바뀌었습니다.

왕년에 일본 국가대표 선수들이 많이 거쳐 갔고, 프로로 전환한 후에는 성적이 썩 좋지는 않더군요.

최용수 감독도 현역 시절에 여기서 뛴 적이 있는데, 현재는 윤정환 감독이 지휘하고 있습니다.

2. 히라키 류조는 일전에 언급된 적이 있는 최정민 선수와 맞대결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고 토로했었다고 하네요.

3. 나가누마 겐이나 가와부치 사부로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간 사람들인데, 행적이 그리 좋은 편은 못 됩니다.

나가누마 겐의 경우 2002년 월드컵 유치 경쟁에서 남미 축구 연맹에 거액의 로비를 해서 논란 이 되었고, 가와부치 사부로는 극우 인사로 악명 높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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