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전드 1957-161화 (161/400)

Round 161. 새로운 별

맨체스터 시내에 우렁찬 행진곡이 울렸다.

마치 십수 년 전에 전쟁이 끝났을 때처럼 길거리에 나온 군중은 승리에 기뻐하며 함성을 지르고, 개선 용사들에게 갈채를 보냈다.

“United! United!”

“Manchester is Wonderful!”

차를 탄 맨체스터 선수들은 카퍼레이드를 신나게 즐겼다.

주장으로 유러피언 컵 트로피를 들고 있는 준영도 퍼레이드 차량 주변으로 몰려온 군중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리틀 존, 맨체스터에 오래오래 남아 줘요! 스페인에 가면 안 돼!”

“은퇴할 때까지 뛰어 줘!”

“아냐. 나중에 시티로 와 줘!”

“뭐? 이 블루스 시키가 죽으려고!”

시티즌, 맨체스터 시티 팬들도 맨유의 우승을 부러워하면서 축하해 주었다.

언젠가 자신들도 저렇게 유럽 최강에 오를 날을 상상하면서.

느릿느릿하게 시가지를 통과한 퍼레이드 차량은 올드 트래퍼드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행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미 경기장 안에는 수만 명의 팬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고, 맨유의 임원들과 시장을 비롯해 여러 높으신 분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2월에 크나큰 아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유나이티드 선수들은 불굴의 의지로…….”

높으신 분들의 담화가 이어진 후, 맨유 선수와 코칭스태프들은 시장에게서 꽃다발과 기념 메달을 건네받았다.

메달에 우승을 상징하는 별과 함께 ‘자랑스러운 맨체스터의 용사’라는 문구를 본 준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용사라니……. 마치 마왕을 무찌르고 온 것 같잖아.’

어찌 보면 맞을지 모르겠다.

저승사자 군단이라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는 마왕과도 같은 강력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 마왕을 쓰러트린 맨유 역시 유럽 언론에서 ‘붉은 악마’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미 영국 국내에서 나돌던 악마라는 별명이 이번 우승으로 좀 더 명확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할 수 있었다.

“주장, 한마디 해 보게.”

시장의 권유에 준영은 마이크를 잡고 팬들 앞에서 말했다.

“먼저 우승에 오르기까지 성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팬 여러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저희만의 승리가 아닌 우리 모두의 승리니까요.”

준영의 말에 관중석에서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준영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번 우승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년에도 유러피언 컵에 다시 나갈 겁니다.”

준영은 슬쩍 하드먼 회장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귀국하던 도중에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재정난과 사고 우려 때문에 구단에서 내년 유러피언 컵 출전은 포기할 수도 있다고.

이미 UEFA에서는 결승전 전에 맨유에 다음 시즌 유러피언 컵 출전권을 주겠노라고 공표한 바 있었다.

리그 우승을 하지도 못했고,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이길 확률이 희박했음에도 그런 말이 나왔다.

사고에도 불구하고 선전한 점을 높이 샀기 때문.

그럼에도 맨유 구단 임원들은 이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유럽, 아니 세계 모든 사람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이름을 기억하고 동경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계속 전진할 겁니다! 다 같이 정상으로 갑시다, 여러분!”

“와! 와아아아아!”

우레 같은 함성과 갈채가 올드 트래퍼드에 울려 퍼졌다.

그 열광적인 반응에 준영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공표해 버리면 회장과 임원들도 거절하기가 힘들어지겠지.’

준영의 의도적인 발언에 하드먼 회장의 표정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대회 참가를 포기할 마음을 접은 것 같았다.

***

축하 행사는 밤에도 이어졌다.

맨유 선수들은 맨체스터 지역 유지들이 연 사교계 파티에도 참석하여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리 선수, 사인 좀 해 주시겠어요?”

“저쪽에서 같이 사진 좀…….”

“홍콩에서 자라셨다면서요? 그때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어요?”

선수단에서 단연 인기 1순위는 준영이었다.

사실 준영은 예전부터 알버트를 따라 맨체스터 사교계를 곧잘 찾아왔지만, 이번 우승을 계기로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신비한 동양의 왕족(?), 잘나가는 식품 업체 사업가, 유럽 전역에 이름을 날린 스포츠 스타.

거기에 훤칠하고 듬직한 체격에 보면 볼수록 눈에 드는 시원한 용모와 뭔가 세련된 패션과 몸가짐.

그야말로 명사(名士)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로맨스를 꿈꾸는 소녀들이나, 남의 인기에 편승해 관심을 얻으려는 이들, 여기에 한탕을 노리는 꽃밭의 뱀까지 준영에게 몰려들었다.

“거봐, 내가 말한 그대로지?”

으쓱이는 앤지와 달리 리즈는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지금 준영은 헬렐레하고 있다기보다 성가셔하는 기색이 역력하니까.

그래서 예의상 적당히 상대해 주는 정도였다.

“나는 준을 믿어.”

“그래도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어. 언니 거라고 미리 깃발을 꽂아 두는 게 좋지 않을까?”

깃발은 이미 꽂아 두었다.

‘존 Y. 리, 레알 마드리드행?’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기사에 지난번 베르나베우 회장과 만났을 때 모습이 찍혔던 것.

그때 준영의 곁에 있던 자신도 덩달아 찍혔다.

기사에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기자가 ‘Lee’s other half’라고 언급해 두기도 했다.

‘그걸로는 모자랄지도? 깃발이 아니라 새겨 놓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리 판단한 리즈는 준영에게 다가갔다.

딱히 큰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준영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건네 왔다.

“리즈, 무슨 일이야?”

“저쪽에 준을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요.”

“그래? 기다리게 해 드려서는 안 되지.”

리즈 덕에 준영은 귀찮은 여자들에게서 탈출할 수 있었다.

뒤에서 날카로운 눈길들이 쏟아졌지만, 리즈는 오히려 보란 듯이 준영의 팔짱을 끼며 몸을 바싹 붙였다.

“많이 피곤했죠?”

“말도 마. 안 그래도 도망칠까 생각하던 차였어.”

서로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을 때.

준영을 빼 오려고 둘러댔던 리즈의 거짓말은 엉뚱하게 이루어졌다.

“여, 신수가 훤하구먼.”

“안녕하십니까, 각하.”

오랜만에 보는 동글동글한 인상의 노인.

바로 윈스턴 처칠이었다.

“축하하네, 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네.”

“각하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하하, 자네가 몸 둘 데 없다고 몸 빼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준영의 넓은 등을 툭 하니 친 처칠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런던은 물론이고 영국 전역에서 자네 팀의 우승에 들뜬 상태야. 라이벌이라 해도 자네 팀 우승에 기뻐하는 모양이더군.”

“자신들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리그 우승을 한 울버햄프턴의 빌리 라이트는 언론에 큰소리를 쳤다.

다음번 유러피언 컵 우승은 자신들이 차지할 거라고.

이렇게 ‘질 수 없음!’이라는 경쟁의식이 퍼져 나가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만큼 관심이, 그리고 투자와 발전이 이루어질 테니까.

“일부에서는 자네가 활약해서 우승한 것을 두고 탐탁잖게 여기기도 하더군. 그래서 내가 말해 줬지. 존 Y. 리도 영국 시민이라고 말이야.”

처칠의 말에 준영은 웃음을 지었다.

사실 돌아오면서 영국 신문들을 봤지만, 부정적인 기사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평소에 동양인인 자신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던 타임즈나 데일리 메일 같은 보수 언론에서도 영국의 승리 운운하면서 자신을 영국인으로 취급했다.

‘21세기식으로 말하자면 국뽕이 차오르고 있는 거지.’

영국 입장에서 그렇게 느낄 만했던 게, 축구 종가라고 해 놓고 국제 무대에서 아직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진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바람에 곧 시작되는 스웨덴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도 덩달아 높아졌다.

“자네도 월드컵에 출전하지? 폐하께서도 기대가 많으신 모양이니 열심히 하게.”

“예, 반드시 쥘리메컵(* Jules Rimet Trophy, 1970년까지 사용된 월드컵 우승컵)을 가져오겠습니다.”

준영의 말에 처칠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목표를 너무 높이 잡는 거 아닌가?”

“야망이 커야 이룰 수 있는 것도 큰 법이니까요.”

“하하하, 맞는 말이야!”

호탕하게 웃은 처칠은 준영의 곁에 있는 리즈를 보고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아 참, 요새 보수당 녀석들이 대륙붕 법안과 관련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더군. 듣자 하니 프레드로 남작이 부추긴 거라고 하던데 말이야?”

‘아, 그거…….’

제네바에서 국제 해양법 협약이 이루어진 후, 알버트 프레드로는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북해 유전을 탐색, 개발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국내 법안 통과가 필요했으니까.

“리즈 양, 조부에게서 무슨 말을 들은 게 없나?”

“자세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영국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 하셨어요.”

“미래라……. 하긴 남작은 현재보다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지.”

변화와 혁신.

정계에서 은퇴한 지금은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진 듯싶었다.

그리된 것은 눈앞에 있는 이방인을 만났기 때문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아까 여러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존 Y. 리가 식품 사업 외에도 토목이나 유전 개발 같은 데에도 관심과 투자를 하고 있더라고 하니까.

“남작이 진행하는 일이 잘되었으면 좋겠군.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말한 처칠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들이 세상에 나오기 위해서도 이 늙은이는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겠군. 둘 다 즐거운 시간 보내게나.”

찡긋 윙크를 보낸 처칠이 자리를 떴다.

‘저 영감님, 갑자기 섹드립을 날리고 가다니.’

처칠의 뒷모습을 째려보던 준영은 리즈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말에 꽤 당황했던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준영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길에 리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가슴은 연방 두근두근댔지만, 조마조마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

“그러니까 얘가 사장님을 찾아와서는 영국에 가서 존 형님을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며 애원했단 말이죠?”

조셉 포스터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교복 차림의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볼일을 마치고 귀국하려는데, 김포공항으로 배웅 나온 이억관이 데려온 소년을 보았다.

“동북고등학교 축구 선수라는데, 발재간은 확실히 좋더군.”

“그래요? 얼굴은 꽤 투박해 보이는데…….”

조셉은 소년을 유심히 살폈다.

이제 17∼18세가량 되어 보이는 이 소년은 운동깨나 했는지 탄탄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특히 다리 근육을 보면 순간적인 움직임이 뛰어난 듯했다.

할아버지가 육상 선수였고, 운동화나 축구화 등을 만들면서 선수들의 몸과 근육을 많이 봐 왔기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딱 한 번만 준영 형님을 만나게 해 주십쇼! 일생의 소원입니다!”

소년의 강한 애원에 이억관은 조셉에게 말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을 안 들어줄 수는 없지 않나.”

“혹시 형님을 만난다는 핑계로 딴짓을 하려는 거면요?”

“어린놈이 못된 짓을 하다 걸리면 인생의 쓴맛을 알려 주는 것도 어른의 의무일세.”

억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조셉은 다시 억관의 통역을 받아 소년에게 말을 건넸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아, 조윤옥이라 합니다. 그냥 편하게 조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조. 나랑 같이 영국에 갑시다.”

“가, 감사합니다. 베리 머치 땡큐!”

조윤옥의 어설픈 영어에 조셉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준영을 만나겠다고 머나먼 외국에 가려는 녀석의 배짱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

조윤옥(1940~2002) 선수는 손흥민 선수가 재학했던 동북고를 졸업하고 육군 특무대 축구단과 제일모직, 대한중석에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청소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 양쪽 모두에 선발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었고, 1960년 아시안컵 득점왕으로 우리나라에 우승컵을 안겨다 주기도 했죠.

아시아 올스타에 세 번 선정될 정도로 당대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였지요.

별세하신 날이 2002년 스페인전 당일이었는데, 우리나라가 승부차기에서 이기는 걸 보시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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