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und 160. 러브 콜
베르나베우 회장은 레몽 코파를 제외하고,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을 먼저 보냈다.
그리고 준영의 일행과 함께 박람회장 안에 위치한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좀 더 조용한 자리로 옮겼으면 좋겠지만, 시간 낭비는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일세.”
레몽의 통역을 들은 준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디를 가더라도 마찬가지일 듯싶었다.
‘레알 마드리드를 쫓아온 기자나 파파라치들이 이 만남을 놓치려 들 것 같지 않거든.’
준영이 근처에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무리들을 슬쩍 바라보고 있을 때, 베르나베우가 물음을 건네 왔다.
“그쪽의 숙녀분들은 누군가?”
“제 가족입니다.”
“가족이라…….”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베르나베우나 레몽도 이내 납득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란히 앉은 준영과 리즈를 봐도 어떤 사이인지 알 만했으니까.
“영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아무래도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좋은 분들을 만난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운이 좋았다는 건가?”
“부정할 순 없네요.”
만약에 리즈를 만나지 못했다면? 알버트가 빌 섕클리에게 자신을 추천해 주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이 시대에서 프로 축구 선수로 활동하는 데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혹시 더 좋은 사람을 만나 더 높은 곳으로 나갈 생각은 없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할 마음이 없느냐 이겁니까?”
“그래. 우리 팀이 이번에 고배를 마시긴 했지만, 유럽 최강이거든. 실력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면에서도 말이야.”
베르나베우 회장의 말에 준영은 순순히 동의했다.
21세기에서 갑툭튀한 놈이 아니었다면, 레알은 1960년까지 유러피언 컵 5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했을 테니까.
만약에 이 시대에 처음 와서 오늘 같은 제안을 받았다면 덥석 승낙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미 말씀만 고맙게 받겠다고 했습니다만?”
“시합에 집중하려고 그랬던 거라 생각했지. 정말 이적할 마음이 없는 건가? 축구 종가라고 하지만 영국은 축구 하기 좋은 나라는 아니야.”
그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선수 급료도 낮고, 축구 인프라도 열악하다. 여기에 FA는 보수적이기 짝이 없다.
그에 비하면 유럽 본토는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는 외국인 선수들도 많이 뛰고 있고, 프랑스는 인종 문제에서도 훨씬 자유로웠다.
유러피언 컵에 나간다고 협회에서 반대하는 일도 없었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힘든 건 사실입니다.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그런데도 생각이 없나?”
“네, 이미 뿌리를 너무 깊게 내렸거든요.”
겨우 1년 남짓이지만 많은 일이 있었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많은 것을 이뤄 냈다.
선수로서의 명예, 팬들의 지지, 번창하고 있는 사업과 투자.
그리고 사랑스러운 연인과 가족들, 끈끈한 우애를 쌓은 동료들.
레알 마드리드라는 간판에 혹해서 그 기반을 내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조사해 보셨다면 이렇게 성급한 제안을 하진 못하셨을 겁니다.”
“확실히 성급하긴 했지.”
베르나베우 회장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양에서 온 이 마법사를 영입하기 위해선 보통 수단이나 조건으론 어림도 없다는 걸 말이다.
***
‘이런, 완전히 파투 날 분위기잖아.’
중간에서 통역을 하던 레몽 코파는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존 Y. 리를 영입하겠다는 회장의 뜻에 적극 찬성했다.
결승전에서 그가 보여 준 실력을 똑똑히 봤으니까.
측면에서 자신이 올리는 크로스나 패스는 죄다 끊어 버리고, 내로라하는 팀의 간판 공격수들까지 죄다 주저앉혔다.
디 스테파노가 괜히 마법사라고 한 게 아니었다.
‘저런 녀석이 최후방을 떡하니 지키고 있으면 마음 놓고 공격을 할 수 있을 텐데…….’
레몽이 내심 아쉬워하고 있을 때, 베르나베우 회장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네의 뜻은 그렇다 치지.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구단의 생각은 어떨까?”
살짝 뜸을 들였던 베르나베우가 말을 이어 나갔다.
“2월에 뮌헨에서 있었던 사고 때문에 유나이티드의 손실이 컸다고 들었네. 부상자의 치료와 재활 지원에 배상, 새로운 선수 영입 등등…….”
“네, 저도 그 문제는 들었습니다.”
준영도 그동안 구단 주식을 사들이면서 재정 상황이 어떤지는 대략적으로 전해 들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실제 역사에서도 레알 마드리드가 적잖은 도움을 줬다고 들었고.
“자네를 영입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이적료를 지원한다면, 아니 우리 쪽에서 유나이티드에 지속적인 지원과 투자를 하겠다면 과연 뿌리칠 수 있을까?”
“그럼 확실히 다들 고민할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그건 저보다 하드먼 회장님과 상의할 문제라고 봅니다만?”
준영의 지적에 베르나베우는 다시금 너털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네. 나는 그저 자네가 원치 않아도 상황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글쎄요. 과연 그렇게 될지 의문입니다.”
만약 맨유의 성적이 나빴다면, 실제 역사대로 FA컵에서 준우승, 유러피언 컵 4강 탈락에 그쳤다면 맨유는 베르나베우의 제안을 수락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 낮아졌다.
비록 리그 우승은 놓쳤지만, FA와 유러피언 컵 더블 우승으로 팀의 가치가 높아졌으니까.
즉, 그만큼 투자와 지원이 들어올 거라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팀의 주축 선수를 판다? 언론에서 질타하기 전에 회장과 임원들은 팬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을걸.’
더구나 맨유의 하드먼 회장은 그런 경솔한 결정을 할 사람이 아니다.
맷 버스비 감독만큼이나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니까.
“회장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저에게 해 주시는 까닭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적은 결국 선수의 의지에 달려 있으니까요.”
“옳은 말이야. 아무튼 결론은 자네는 생각이 없다는 거로군.”
“저한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최고니까요.”
베르나베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준영이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1년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바로 맨유의 감독 맷 버스비에게서.
“자네 뜻은 잘 알겠네. 하지만 자넬 영입하겠다는 우리 뜻에는 변함이 없을 걸세.”
‘앞으로도 끈질기게 오퍼를 보내겠다 이거구만.’
좀 성가셔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레알 마드리드 같은 거대 명문 구단이, 그것도 구단주가 직접 러브 콜을 보내는 만큼 명성은 더 올라갈 테니까.
“준은 점점 유명해지는 것 같네요.”
베르나베우 회장이 돌아간 후, 리즈가 들뜬 표정으로 말을 건네 왔다.
“혹시 올해 발롱도르는 준이 받는 거 아니에요?”
“글쎄, 받을 수 있다면 기쁠 테지만…….”
준영은 발롱도르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전의 발롱도르는 유럽 선수들에게만 수상했으니까.
그 때문에 축구 황제 펠레도 발롱도르를 받지 못했다.
“언니, 앞으로 조심해. 존이 유명해지는 만큼 달려드는 여자들도 많을 테니까.”
“그건…….”
리즈는 앤지의 농담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준영은 이미 유명 인사인 데다, 재산도 상당하니까.
부와 명예를 노리는 이들은 인종적인 편견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존이 바람을 피울지도?”
“인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가볍게 앤지를 쥐어박은 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장난하지 말고 좀 더 둘러보자. 내일은 돌아가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주장님.”
일행은 다시 박람회 구경을 계속했다.
몇몇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쫓아왔지만, 준영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
웸블리의 영국 축구협회 회의실.
스탠리 루스 총무를 필두로, 여러 이사들이 이번 시즌 마무리나 다음 시즌과 관련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맨유의 유러피언 컵 우승 이야기도 자연히 나왔다.
“대규모 환영식을 치러 줘야 하지 않느냐고?”
“예, 총무님. 유나이티드가 유럽 클럽 최강자가 된 건 우리 영국 축구의 쾌거가 아닙니까?”
환영식을 제의한 이사의 주장에 루스 총무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게 왜 영국 축구의 쾌거인가. 유나이티드의 쾌거지. 환영식 따위, 그레이트 맨체스터 지역 협회가 알아서 하라고 해.”
“그래도…….”
“우승 축하 전문을 보내는 걸로 충분해. 유러피언 컵 참가에 반대한 우리가 이제 와서 환영식을 치른다고 호들갑을 떨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단물만 빤다고 손가락질을 당할 바에야 시종일관 냉담하게 품위를 지키는 편이 낫다.
이런 루스의 주장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던지 더 이상 환영식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총무님, 몇몇 팀들이 외국인 선수 영입 규제를 완화해 달라는 요청을 계속하고 있는데 어찌할까요?”
“흥, 유나이티드의 성공 사례를 보곤 다들 눈이 돌아간 모양이군.”
루스가 지적한 대로였다.
올 시즌 보여 준 존 Y. 리의 눈부신 활약에 다들 해외 선수 영입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맨유가 유러피언 컵 우승을 했으니 이제 규제 완화에 더욱 목소리를 높일 것이 뻔했다.
‘하여간 그 노란 원숭이 놈은 여러모로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군.’
내심 투덜거리던 루스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이사들에게 말했다.
“귀찮게 졸라 대니 적당히 완화해 주도록 하지. 일단 언어 제한부터 풀도록 하자고.”
“그럼 영어를 못하더라도 영입과 출전이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겁니까?”
“그래. 말귀도 못 알아듣는 놈들 출전시켜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당 구단에서 알아서 하라지.”
언어 제한을 푼다고 해도 실제 영입되는 외국인 선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인 주급 상한제가 존재하니까.
‘그래도 출전 보너스와 승리 수당을 생각하면 영국에 오고 싶어 하는 놈들도 적지 않겠지.’
현재 대부분의 유럽과 남미 리그들은 세미프로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거기다 경제 규모가 영국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들도 많다.
하지만 그런 나라에도 나름 공을 찰 줄 아는 재주꾼들은 있을 터!
‘어디든 좋다! 그 노란 원숭이 놈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면 나치 크라우트든 아프리카 검둥이든 상관없다고!’
굳이 실력으로 누르지 않아도 된다.
고의적인 파울로 부상을 당해 선수 생활을 접는 선수가 나타나는 게 드문 일도 아니니까.
‘남미 놈들이 꽤 추잡하게 공을 찬다고 하던데……. 그쪽 야만인들이 좀 넘어오면 좋겠군.’
루스 총무가 내심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회의실 밖에서 서기가 들어와 루스에게 서신 하나를 건넸다.
“누가 보낸 겁니까?”
“선수 선정위원회에서 보냈군. 월터랑 월드컵에 데려갈 대표팀 최종 명단을 정한 모양인데…….”
루스는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윈터보텀 감독이 저지른 만행이 떠올랐으니까.
‘땜빵으로 그 노란 원숭이를 뽑았지. 하지만 설마 본선까지 데려가지는…….’
서신을 펼친 루스의 낯빛이 와락 구겨졌다.
스웨덴 월드컵 최종 명단에는 존 Y. 리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
1956-57시즌 유러피언 컵에서 버스비 감독이 보여 준 지도력에 주목한 베르나베우 회장이 레알 마드리드로 오라고 꼬셨답니다. 오기만 하면 천국과 같은 최고의 지원을 해 주겠다며 말입니다.
하지만 버스비 감독은 ‘맨체스터가 나의 천국.’이라며 거절했다고 하네요.